응달에도 해빛이 들 때가 있다.
응달에도 해빛이 들 때가 있다.
박향선
금년은 도문시가 자치주의 현급 시로 된 지 5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천지개벽의 변화를 거듭하며 날로 아름답게 변모하는 고향을 바라보면서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공화국이 창건되던 해 도문에서 태여난 나는 70여년 인생을 고향과 고락을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래희 나이를 넘긴 오늘 눈부신 변화를 가져온 고향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희비로 얼룩진 지나온 세월들이 가슴에 사무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세기 60년대, 기근에 시달리던 그 시절 누군들 고생하지 않았으랴만 공장에 출근하던 아버지가 급작스레 세상을 뜨는 바람에 우리 가정은 하루아침에 천길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였다. 어린 삼남매를 먹여살리는 무거운 짐이 갓 서른을 넘긴 어머니의 어깨를 고스란히 짓누르게 되였다. 하루하루 눈물로 얼굴을 적셔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어머니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녀성이였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집에 있는 쓸 만한 기물들을 죄다 팔아 버티다가 나중에는 살림집을 판 돈에 여기저기서 빌려온 돈을 보태 길거리에 자그마한 복장점을 차리였다. 말이 복장점이지 작은 단칸방에 간막이를 하고 반은 살림집으로 써야 하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코딱지 만한 방에 불과하였다. 그래도 이젠 살길이 생겼다고 어렵사리 갖춘 재봉틀을 만지작거리는 우리들의 기쁨은 한량없었다.
그 때로부터 어머니는 복장점 일에만 몰두하고 맏딸인 내가 어머니의 한팔이 되여 집안일을 거들게 되였다. 두 남동생이 아직 어리다보니 가내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였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물을 길어들이고 밥을 짓고 설겆이를 하고 빨래를 하는 등이 어느새 나의 일상으로 굳어졌다. 주말이 와도 다른 애들처럼 신나게 뛰여놀 수가 없었다. 철길에 널린 석탄을 쓸어오고 목재공사에 가서 땔감을 끌어와야 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힘들었던 건 사놓은 석탄을 집까지 날라오는 일이였다.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한번에 100근씩 사서 두번에 나누어 큰 양철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날랐는데 어찌나 무거웠던지 마치 바위가 정수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임을 내려놓고 잠간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어도 그렇게 앉았다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곧장 집에 돌아오고 나면 온몸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하지만 언제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다시 양철대야를 들고 돌아서야 했다. 나머지 석탄을 마저 옮겨와야 했으니 말이다.
그 시절 나는 어머니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는 지어 학교 가는 날마저 나 보고 점심시간에 강변에 나가 빨래를 해오라고 일을 맡겼다. 저녁에 책을 펼쳐놓고 숙제를 좀 할라치면 굶어죽을 판에 무슨 공부냐며 책을 와락와락 걷어서 부엌에 집어던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울면서 부엌에 내려가 책을 주어오군 했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영화관람을 자주 조직했다. 한번에 10전만 내면 볼 수 있었는데 친구들이 웃고 떠들면서 영화구경을 떠날 때면 나는 구석에 숨어 눈물을 훔치군 했다.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어머니한테 맺힌 게 많았다.
초중시절의 일로 기억하고 있다. 체육시간인데 옆구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후에도 으슬으슬 몸이 떨려나는데도 티를 내지 않고 그런대로 하루하루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병원으로 가보자고 어머니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밤마다 끙끙거리며 신음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걱정하다가 간밤에 열이 펄펄 끓어오르자 덴겁한 모양이였다. 그길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았더니 륵막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후로 날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번마다 주사기로 옆구리에서 누런 물을 반병씩 뽑아냈는데도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면서 더럭 겁이 났다. 나중에 어머니가 용하다는 어느 중의를 찾아가 초약 60첩을 구해다 달여주어 먹고 나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돈을 금싸락같이 아끼던 분이 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여기저기 친척들한테 손을 내미는 역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음은 확 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따뜻한 사랑이 모성애란 걸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어린시절, 가난의 설음을 진저리 치도록 겪으면서 나의 마음속은 온통 하루빨리 이 구질구질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였다. “어려서 고생하던 계집애는 시집 가서도 고생하더라.”라며 주위사람들이 모여서 흉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어디 두고봐요. 이제 꼭 시집을 잘 가서 누구보다 잘 먹고 잘살 거예요.’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였다.
한바탕 병치레를 하고 나서 학교로 나간 지 얼마 안되여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미구하여 어머니의 복장점은 ‘자본주의꼬리’라는 딱지를 달고 문을 닫아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고 그 바람에 우리는 또 살길이 막막해졌다.
그나마 1968년 여름, 동학들은 모두 집체호로 내려갈 때 나만 ‘극빈호’ 명단에 올라 공장에 로동자로 추천받아 ‘철밥통’이나 다름없는 로동자가 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여 천만다행이였다. 하지만 복장점이 문을 닫고 하루아침에 무직자가 된 어머니가 농촌동원 대상이 되여 농촌에 내려가게 되다보니 그 때로부터 두 동생을 돌보는 짐이 가냘픈 내 어깨에 떨어지게 되였다.
몇년 지나자 나에게도 슬슬 혼사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처녀들이 가장 선호하는 결혼대상은 부대 군관이였는데도 나는 속으로 은근히 대학생을 점 찍고 있었다. 부대군관이요, 당원간부요, 고급기술원이요 하며 여기저기서 소개가 들어와도 대학생이 아니라는 리유로 나는 전부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농촌에 계시던 어머니마저 달려와 “어느 눈 먼 대학생이 동생이 둘씩 딸린 처녀를 데려가자 하겠느냐? 꽃도 한철이라고 이러다가 좋은 사람 다 놓친다.”라며 안달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은 보람이 있다고 할가, 마침내 나는 맘에 꼭 드는 대학생 총각을 만나게 되였다. 하지만 년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조건이 마음에 걸린다면서 어머니는 한사코 막아나섰다.
“동생을 둘씩 달고 어떻게 늙은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산단 말이냐? 당장 헤여져라.”
어머니의 불같은 성미를 잘 알고 있었던지라 나는 싹 트지도 못한 첫사랑을 마음 속에 깊숙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잘 듣던 나는 처음으로 어깃장을 부리면서 이미 약혼했다고 거짓말을 둘러대고 모든 청혼자들을 거절해버렸다. 일년 쯤 지나니 청혼이 점점 뜸해졌다. 다급해난 어머니는 나 몰래 그 대학생 총각을 찾아갔다. 어머니의 성격에 쉽지 않은 선택이였으련만 딸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은 모양이였다.
지난 세기 70년대초, 내가 24살 나던 해 우리는 검소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우리의 신혼은 년로한 시어머니와 나의 두 동생들과 함께 오구작작 붐비는 비좁은 집에서 시작되였다. 지금은 물론 그 세월에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였다. 너나없이 쪼들리며 살아가던 그 년대에 나는 달마다 단위 호조금을 당겨쓰면서 두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 두 동생을 부양하는 누나로, 시어머니를 모시는 무던한 며느리로 무탈하게 가정을 꾸려나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 부부가 손 잡고 드팀없이 가정이란 이 ‘둥지’를 알심 들여 지켜왔기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몇년이 흘러 농촌으로 내려갔던 어머니가 지천명의 나이에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세파를 겪을 대로 겪은 어머니는 어느덧 그 곱던 얼굴이 온통 주름투성이로 겉늙어버렸다.
할빈 지역에서 자란 어머니는 한족말이 막힘없는 데다 머리도 잘 돌아 큰 장사는 몰라도 작은 돈벌이에는 미립이 터있었다. 집매매가 성행하던 당시 어머니는 위치가 괜찮다 싶은 낡은 집을 사서 수리해 넘겨팔아 점차 손에 목돈을 쥐게 되였다. 후에는 또 위치가 괜찮은 도문 6거리 삼각지대에 〈신춘상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조석이 따로 없이 아등바등 돈을 벌어들여 일찍 도문시내에서 ‘돈 많은 로친네’로 소문이 났다…
누군가 인생은 달리는 렬차와 같다고 했다. 캄캄한 턴넬 같은 날들이 지긋지긋하긴 해도 참고 버텨내기만 하면 그 앞에서는 항상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으니까.
《로년세계》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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