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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약 없는 황혼육아여!
2020년 12월 29일 09시 34분  조회:893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아, 기약 없는 황혼육아여!


리평


자식들이 힘들어할 때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나 몰라라 하는 부모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 량주도 례외가 아니다. 딸애가 아이를 낳고 5개월간 함께 지내면서 돌봐주었던 안사돈께서 사정상 돕지 못하게 되자 딸과 사위는 보모를 구하겠다고 나섰다. 보모를 구하는 비용도 절약해줄겸, 그보다도 귀한 손주녀석을 차마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어 우리 량주는 토의 끝에 딸의 육아도우미로 나서기로 용단을 내렸다.
안해가 선발대로 먼저, 나는 뒤처리를 마무리하고 떠나기로 했다.
4월초, 코로나로 인한 복잡한 시국에 번잡한 수속을 마치고 안해는 청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딸집에 도착한 이튿날, 사위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출근할 념을 하지 않고 쏘파에 앉아 시름없이 텔레비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안해가 영문을 물었더니 집에 외지에서 온 손님이 있으면 회사 규정 대로 15일간 집에서 자가격리를 해야 한단다. 그러다보니 손주를 돌보는 것도 모자라 온 집 식구 때식까지 준비해야 하는 고역까지 치러야 했다. 로동 강도가 예상을 훨씬 뛰여넘어 힘에 겨웠던지 안해는 손주를 재우고 난 저녁시간이면 나 보고 하루빨리 오라고 전화로 닥달을 했다.
얼마 뒤, 나도 드디여 청도에 들어섰다. 안해는 내가 도착하자 바람으로 분공을 명확히 했다. 안해가 장보기와 때식을 도맡고 나는 손자를 돌보고 집안청소를 맡기로 하였다. 속으로는 불편하고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꾹 참고 근 반시간 넘게 안해로부터 육아와 현장수업을 전수받고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였다. 우선 젖병에 물과 분유를 넣는 비례며 분유 먹일 시간을 종이에 일목료연하게 작성하여 눈에 잘 띄는 곳에 반듯하게 붙여놓았다. 육아에 사용되는 젖병소독기, 더운물 끓이는 기계, 가열기, 항온기 등 설비들은 모두 현대식 전자제품들이라 생소한 데다 사용안내판 글씨마저 깨알같아 다루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였다. 분유를 타면 항상 알갱이가 남아 안해의 잔소리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익숙해지면 기교가 생긴다더니 꾸준히 하다보니 나름 대로 요령이 생기면서 차츰 일이 손에 익어갔다.
손주는 6개월부터 모유를 끊고 분유를 먹었다. 젖병만 보면 식욕이 발동하는지 놀고 있던 장난감도 휙 내치고 무작정 기여왔다. 한 성깔 하는 녀석이라 내가 분유를 타는 속도가 조금만 늦어져도 소리소리 지르며 울어댔다. 그러다가도 젖병만 입에 물리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울음을 뚝 그치고 걸탐스레 젖병을 빨아 순식간에 굽을 내고는 해시시 웃음을 지었다. 분유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거참 거하게 감사를 올리고 싶다.
애들은 배만 부르면 여기저기 기여다니며 장난감을 쥐였다가 물었다가 하며 기분 좋게 놀음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짜증을 부리며 장난감도 팽개친 채 눈을 비벼대며 운다면 이는 영낙없이 잠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이럴 때면 제꺽 안고 방안에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는 손주의 잠투정을 눈치 채지 못하고 타이밍을 놓쳐버려 투정이 점점 심해지는 데도 우두커니 바라보다 발만 동동 굴렀는데 자칭 육아능수가 된 요즘은 이럴 때면 당황하지 않고 애를 안고 ‘쪽쪽이’를 입에 물린 채 살살 다독여주며 재운다. 이 시점에서 ‘쪽쪽이’를 발명한 사람에게 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7개월에 접어들자 외손자는 앉아서 노는 시간이 길어졌다. 일어서겠다고 어찌나 바둥대는지 보다 못한 딸애가 인터넷으로 보행기(学步车)를 주문하였다. 참으로 나를 육아로부터 해방시켜준 으뜸의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보행기가 있은 뒤로 아이를 안아주는 차수가 퍽 줄어들었다. 손주녀석도 나름 대로 물 만난 고기마냥 집안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평소에 탐났던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며 신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 날 점심, 우리는 여느때처럼 아이를 보행기에 앉혀놓고 나서 밥상에 마주앉았다. 그런데 요 녀석이 보행기를 타고 밥상을 향해 쌩하고 돌진할 줄이야. 보행기가 밥상에 부딪친 충격으로 뜨거운 국사발이 엎질러져 국물이 아이의 팔다리에 튕겼고 뒤미처 째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가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안해가 먼저 손을 뻗어 손주의 옷을 벗겼다. 그제서야 딸애가 부랴부랴 안방으로 달려가더니 약을 가져와서 애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어른 셋이서 애 하나 진정시키느라 한참이나 진땀을 뺐다. 애가 울음을 그친 뒤 상처를 살펴보니 병원으로 가야 할 상황은 아닌 같아 간신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으나 우리 량주는 십년감수한 심정이였다. 이래서 다들 애를 돌보는 게 까다롭고 속을 말리는 일이라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날 이후로 나와 안해는 더욱 도정신하여 손주녀석을 보살폈다.
딸이 살고 있는 아빠트는 기초시설이며 아름다운 주위환경이며 마치 작은 공원을 방불케 했던지라 아이를 데리고 소풍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가까이에 바다를 끼고 있는 데다 어디라 없이 나무숲이 우거지고 파란 잔디가 깔려있어 무더운 여름날에도 오히려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 부부는 하루에 한두번씩 손자를 유모차에 앉히고 바깥 산책을 나갔다. 코로나로 인해 계속 집안에 갇혀 지내던 애가 갑자기 낯선 사람들을 보자 겁이 났는지 걸핏하면 울음보를 터뜨렸다. 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니 배짱이 두둑해졌는지 동네 사람들이 손을 내밀면 덥썩 잡는 용기까지 보였다. 요상한 놈이 우리가 유모차를 멈추면 이내 몸을 뱅뱅 탈며 짜증을 부리다가도 다시 움직이면 죄꼬만 얼굴이 다시 해시시해진다. 나무그늘 밑에 유모차를 세우고 마주보며 듣건 말건 두서없는 이야기를 해야 점잖게 가만이 앉아있고 그러지 않으면 또 투정을 부리며 차에서 내리려고 버둥거린다.
평소에 딸내외가 출근하고 나면 손주녀석은 우리 량주 곁에 찰싹 붙어서 지낸다. 하지만 저녁때가 되여 집안이 어둑어둑해지면 매삼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양이 은근히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러다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보행기를 밀면서 부리나케 문 쪽으로 달려간다. 자기 아빠가 들어오면 기쁘고 흥분한 나머지 괴성을 지르기도 한다. 아빠 품에 안기면 얼굴을 어깨에 딱 붙이고 비비며 야단법석을 떨어댄다. 그럴 땐 내가 손을 내밀어도 고개를 홱 돌리고 아빠 목을 꼭 끌어안는다. 온 하루 저 때문에 고생한 우리를 못 본 척하니 서운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까지 사랑스럽고 예뻐보이는 걸 어찌할 수 없다.
청도에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애가 9개월을 잡고 있다. 그동안 손주가 잠을 깨는 아침 6시가 우리 량주의 ‘출근’시간이 되였고 애를 엄마, 아빠에게 넘겨주는 저녁 8시가 우리 량주의 ‘퇴근’시간이 되였다. 황혼육아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일은 애의 투정을 달래는 것도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도 아니였다. 고래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무덥고 긴 여름날, 점심을 치르고 나면 몰려오는 졸음을 쫓으며 말똥말똥해서 놀고 있는 손자애의 시중을 드는 일이였다. 그리고 손자애의 안전 때문에 한 시각도 시름을 놓을 수 없이 긴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일상이였다.
황혼육아의 시간이 길어지자 이앓이가 도지며 야금야금 몸을 괴롭힌다. 평시에 고르던 혈압까지 오르락내리락하며 머리가 자꾸 지끈거린다. 
나는 오늘도 손주를 안고 베란다에 서서 청도의 아침을 맞는다. 창밖의 나무숲은 한결 푸르고 무성해보인다. 한낮이면 소란스레 울어대던 매미들도 늦잠을 자는지 잠잠해지고 여기저기에서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데 숲이 우거져서인지 새들의 꽁지는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갑자기 까치 한마리가 베란다 창밖 너머에 있는 오동나무가지 우로 날아와 긴 꼬리를 달싹대며 “깍깍깍” 하고 귀맛 좋게 울어댄다. 문득 고향집 생각이 나고 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떠오르면서 갓 걸음마를 뗀 우리들의 황혼육아의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아, 기약 없는 황혼육아여!

《로년세계》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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