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축복
김해연
얼마전, 우연히 워이신계정에서 《금희와 은희의 운명》이라는 조선영화를 보게 되였다. 부모님 세대한테는 감회가 남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츰 가족채팅방을 열고 영화 링크를 보냈다. 그랬더니 바로 어머니한테서 답장이 왔다.
“오래전의 영화네. 이 영화의 주제곡 〈자장가〉를 부르며 연이를 재웠었는데.”
연이는 나보다 8살 아래인 녀동생이다.
나는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보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자장가를 더 많이 듣고 자랐다. 아버지는 기분 좋은 날이거나 한잔하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영낙없이 이 〈자장가〉를 불렀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이 노래의 제목이 〈자장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축복〉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어린시절, 나는 아버지가 부르는 자장가, 녀동생은 어머니가 부르는 자장가를 들으면서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행복한 동년을 보냈다.
아버지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첫딸인 나를 보았다. 요즘 놓고 말하면 대학을 갓 졸업한 애숭이나 다름없는 나이에 말이다.
내가 열살이 되였을 무렵,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김서기가 큰딸을 안고 다니는 건 못 봤는데 작은딸은 늘 품에 안고 다니네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릴 적에는 멋을 몰라 이런 말을 듣고도 개의치 않았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보니 살짝 심술이 났다.
‘아버지는 내가 예쁘지 않았던 걸가? 왜서 동생만 안아주고 나는 안아주지 않았지?’
나중에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그 의혹이 풀렸다.
“어느 젊은이는 로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제 자식 곱다고 끌어안구 있는 게 보기 구차하더라.”
옛날에는 젊은이들이 동네 어르신들이 계시는 자리에서 자기 자식만 안고 있으면 례의가 없는 집안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 고와도 웃어른들이 계시는 자리에서는 티를 낼 수 없다보니 그 시대의 젊은 아버지들은 자연스레 자식에 대한 애정표현이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들의 시선이 신경 씌여서 자기 자식도 마음껏 안아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만 오시면 나한테 자장가를 불러주셨고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가문의 장손으로 태여난 아버지는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할 만치 우수하였다. 지난 세기 60년대초에 변방의 오지마을에서 연변1중에 진학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전 마을을 들썽케 하는 큰 화제거리였다. 그후 사회에 진출하여 나라의 공직자로서 당과 정부를 위한 사업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며 퇴직한 뒤에도 오래동안 차세대관심위원회 주임직을 맡으면서 정열을 불태웠다.
내가 태여나서 자란 곳은 웃세대부터 아래세대까지 이웃끼리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자그마한 현성이였다. 소학시절에는 아버지의 동창이 나의 선생님이였고 중학교 때에는 아버지를 잘 아는 지인 분이 나의 선생님이였으며 고중에 올라가니 아버지를 배워주셨던 분이 나의 교장선생님이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내 이름보다 ‘누구의 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워낙 우수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보니 항상 선생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가 봐, 부모님한테 실망을 안겨드릴가 봐 전전긍긍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자식들한테 특히 엄격했는데 칭찬에 린색했던지라 나와 동생은 하나같이 아버지에 대해 경외지심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출장이 잦았던지라 나한테 편지를 자주 써주었다. 물론 공부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였고 신문에서 오려낸 인물전기나 전국모범학생 사적에 관한 문장들도 가끔씩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장녀인 만큼 집안의 희망이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었다. 하지만 집안의 희망이라는 기대에 걸맞지 않게 나는 평범한 아이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가정을 이루고 자식까지 보고 나서 어느 날, 용기를 내여 왜 그 때 우리를 그렇게 엄하게 다스렸느냐고 넌지시 아버지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그 때 그렇게 엄했냐? 하긴 그 때야 엄하게 다스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 교육인 줄 알았지.” 하며 게면쩍게 웃으셨다.
아버지는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우리에게 책을 선물로 가져다주었다. 중국고전명작부터 세계명작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사다가 우리의 책꽂이에 꽂아놓았다. 명작을 리해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핍박’에 못이겨 할수없이 손이 가는 대로 펼쳐보게 되였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그 명작들을 다시 꺼내 읽었더니 책 내용뿐만 아니라 그 때 그 시절의 추억까지 고스란히 떠올라 참으로 행복하고 위로가 되였다.
동생 연이는 나와 달리 공부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특히 악기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다.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 손풍금이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 무렵 손풍금 하나를 장만하는 게 동생의 가장 큰 소원이였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사는 자그마한 현성에서는 손풍금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였다. 마침 그 때 아버지가 항주에 출장을 가게 되였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면서 손풍금 얘기를 슬쩍 내비쳤다. 얼마후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품에는 작은 손풍금이 안겨있었다. 덕분에 동생은 나중에 학교의 각종 행사에서 손풍금 독주자로 활약하였고 가문에 희사가 있을 때마다 신나는 연주를 하여 가족들의 흥을 돋우어주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칭찬 대신 “그만큼 배웠으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며 담담하게 얘기할 뿐이였다.
나는 1980년대 후반에 국가장학금으로 일본에 류학 간 외삼촌의 덕분에 남들보다 좀 일찍 일본류학의 꿈을 이루게 되였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떠나는 나에게 친히 시까지 써주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건 기대 만큼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외국 류학길은 결코 생각처럼 록록하지 않았다. 석사공부를 마치고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박사학업을 이어갈 대신 육아의 길을 택했다. 귀여운 손녀딸이 재롱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보다 행복해했던 아버지였지만 적어도 나는 아버지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분명 내가 박사공부를 포기한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45살에 다시 박사공부를 시작해서 48살에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오래동안 미루었던 숙제를 드디여 바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공부는 아니였지만 나를 집안의 희망으로 떠받들었던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린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이제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였건만 요즘도 아버지로부터 오는 무형의 ‘압력’ 때문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압력’들을 축복으로 받아들여 라태해진 자신을 채찍질하는 지혜를 터득해가는 중이다. 그래서 아직도 아버지 앞에서는 조신하게 처신하는 나지만 이것이 결코 싫지는 않다.
이젠 칠십 고개를 넘어 금혼까지 맞이한 아버지는 성격도 많이 유순해진듯 싶다. 동영상으로 손군들의 얼굴만 보아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그토록 칭찬에 린색하던 분이 손군들의 재주자랑에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동생 연이가 〈자장가〉를 한번 더 듣고 싶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동영상을 찍어 가족채팅방에 올려주었다. 어머니가 1절을, 아버지가 2절을 불러서 말이다
동영상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부르는 〈자장가〉에는 축복과 희망이 녹아있고 아버지의 엄한 단속 뒤에는 무한한 사랑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로년세계》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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