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기도
고려화
나이가 들수록 나를 더욱더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는 이미 과체중인 몸무게도 아니고 육아와 가게 일을 병행해 심신이 피페해지는 삶의 무게도 아니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무게, 그것이 제일 무겁고 두려울 뿐이다. 요즘 판타지드라마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로 전후생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죽음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도 덜 두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예측 불가한 미지의 세계라서 그냥 희망사항에 그칠 뿐 그 무게와 두려움은 전혀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이는 결코 리해하기 힘든, 심장이 멈춰버릴 듯한 숨 막힘에 눈물도 안 나오게 만드는 그 무게를 처음 실감하게 된 건 11년전이였다.
2009년 6월의 어느 날, 무더운 날씨임에도 그나마 카텐 사이로 솔솔 불어들어오는 바람 덕분에 집요하게 덮쳐드는 낮잠과 싱갱이질하던 중이였다. 집이라는 편안한 환경에서 하는 일이라 유치한 핑크색 잠옷 바람으로 컴퓨터 앞에서 가격 타협에 관한 일본 바이어의 메일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리는 회신은 안 오고 한국 전화번호가 액정에 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워이신이나 무료 국제전화 앱이 아닌 고가의 국제 전화비를 내면서 련락을 하던 세월이였다. 오랜만에 외국에서 오는 전화지만 이 시간대면 식당일에 한창 바쁜 엄마의 전화일 리 없고 한국에 간 지 1년이 되도록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놀고 있는 아버지의 전화일 거라는 추측에 얼굴부터 찡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 썩 반갑지 않은 간단한 겉치레 안부가 끝나자 아버지는 본론을 끄집어냈다.
“누구한테서 들은 건데 산동 쪽에 좋은 약이 있대, 그거 사서 부쳐줘.”
“또요? ”
“이번이 마지막이야.”
거의 애원에 찬 힘없는 목소리였다. 매일같이 약을 드시기는 해도 약과 상극인 술을 하루도 빠짐없이 마신다고 엄마가 얼마전에 전화에서 늘어놓던 푸념이 떠올랐다. 낮에는 술을 마시고 쉬고 나서 저녁엔 몸을 혹사하며 힘들게 일하고 퇴근한 엄마한테 주정 아닌 주정을 한다는 아버지를 리해할 수 없었다. 담보로 망한 집안 꼴을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보겠다고 출국을 했으면 열심히 일해서 보란듯이 귀국을 해도 모자랄 판에 술만 마시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크게 지장이 없는 병을 핑게로 일자리를 밥 먹듯이 바꾸며 거의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가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에 대한 련민이 커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굴린 눈덩이처럼 커져 이젠 약을 사서 부쳐주는 일도 싫어졌다.
“아니, 아무리 좋은 약을 드시면 뭘 합니까? 술 마시면 그냥 심해지는데… 아버지는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한평생 고생만 시키고 미안하지도 않냐구요? 그리고 이젠 나랑 사위한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나도… 숨 좀 쉬자구요…”
결국 전화는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나의 원망 섞인 잔소리로 막을 내리고 그 흔한 몸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따뜻한 인사도 없이 끊어져버렸다. 누가 먼저 어떻게 끊었던지는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확인할 길조차 없는 그번 통화가 우리 부녀지간의 마지막 통화가 돼버릴 줄 누가 알았으랴? 그 날 밤, 마지막 부탁이라던 애원에 섞인 아버지의 힘없는 목소리가 자꾸 메아리처럼 울려와 온밤 뒤척이다가 이튿날 결국 그 약을 주문했다. 며칠후, 그 약과 함께 신혼집 사진 몇장도 한국으로 보냈다.
졸업후, 잠간 출근하다가 남편이랑 같이 장사의 길로 들어선 지 2년도 안되여 길림시에 우리 둘의 힘으로 신혼집을 장만했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은 우리의 신혼집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썩후에야 엄마한테서 전해들은 얘기인데 약과 신혼집 사진을 받고 나서 아버지는 약보다는 딸내미의 신혼집 사진을 더 반가워하셨단다. 친척, 친구들만 만나면 고이 간직한 사진을 꺼내보이며 애처럼 자랑을 늘어놓았단다. 그 당시엔 시내에 층집을 산 친척,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내 또래에 자기 힘으로 마련한 거라니 아버지는 더욱 뿌듯해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버지한테 해드린 마지막 효도가 될 줄은 몰랐다.
똑같은 일상에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훌쩍 한달이 지나갔다. 7월 중순의 어느 날, 새벽에 엄마한테서 걸려온 전화에 비몽사몽이였던 나는 얼굴에 랭수 한그릇 맞은듯 잠을 확 깼다. 수화기 저편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말씀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응급실에 실려와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던 과정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방금전 중환자실로 옮겨갔다고 했다. 신분증, 호구부 등 필요한 서류들과 옷 몇견지만 대충 챙기고 남동생과 함께 무작정 떠나기로 결정했다. 일단 려권부터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려권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한국으로 날아갈 줄 알았던 어리석은 판단이였다.
그러나 려권이 나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하지만 비보를 접하고 나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한국에서 아버지를 화장하는 날이 마침 나의 27살 생일날이였다. 생애 제일 우울한 생일날, 난 결코 울지 않았다. 아버지의 골회함과의 첫 대면에도, 골회를 강에 뿌리러 가는 길에 기절하신 엄마의 모습에도, 흰가루가 되여 강물이 흐르는 대로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뒤모습이 아른거릴 때도 눈물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문득 ‘나에게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였을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과연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했을가? 어릴 때부터 뭐든지 꾹 참고 견뎌내서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독종이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느끼게 되였다. 그 해, 인순이의 히트곡 〈아버지〉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눈물을 한순간에 펑펑 쏟아내고 말았다.
아버지와 나 사이를 설명해주는 마음에 와닿는 가사를 보고 또 보면서 나는 묵묵히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엄마는 아들을, 아버지는 이 딸을 더 이뻐해주셨단 걸 번연히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였던지 미운 감정이 한을 담은 담배연기처럼 슬슬 피여오르기 시작했음을 인정하기 싫었던 거였다. 본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버지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쫓겨나고 엄마 가게마저 말아먹었다. 결국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났던 엄마는 사기당해서 되돌아왔고 진에 있던 기와집은 진작에 팔아버렸는지라 다시 농촌으로 돌아와 평범한 농사일을 시작해야만 했었다.
그 때라도 툭툭 털어버리고 용기 내여 일어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더라면 퍼그나 존경스러웠을 텐데 아버지는 결국 우리한테 나약함의 끝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역경은 친구를 시험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더니 잘 나갈 때 들러붙던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담보받고 도망친 친구에 대한 분노를 술로 삭히면서 아버지는 결국 집식구들한테 화풀이하는 그런 구질구질한 삶을 살아가셨다. 일말의 희망도 엿볼 수 없는, 연기가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집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부터 직격탄을 맞은듯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였다. 빨리 그런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바로 공부였다. 일부러 집과 멀리 떨어진 대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였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아버지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를 다룬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가 생전에 반기던 음식을 볼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건 무슨 영문일가?
그냥 물먹은 솜마냥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결혼식 때, 남들처럼 아버지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그 흔한 장면을 연출할 수 없어서 먹먹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처음 집에 데려간다는 4년 사귄 남자친구가 한족이라는 소식에 아버지는 뒤산에서 오래오래 슬피 울었다고 한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그 애틋한 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여서 뒤늦은 후회가 갈마든다.
내가 금방 태여났을 때, 남존녀비 사상이 심했던 아버지는 딸이란 말에 얼굴 한번 들여다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술 마시러 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로 아버지는 딸바보가 되여 친구와 동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항상 내 자랑만 늘어놓았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면서도 엄마 생일엔 작은 선물이라도 여러번 챙겨줬으면서 아버지 생일엔 생일을 축하한다는 간단한 메시지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난 엄동설한의 얼음물처럼 차가운 딸, 못된 딸이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통화마저 비수 꽂힌 잔소리로 상처를 주었으니 후회에 숨통이 조여드는 듯한 그 후유증은 지독하게 오래도 갔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면서 부모의 심정, 부모의 립장을 차츰 리해할 수 있게 되였다. 자식들이 아플 때면 대신 아파주지 못해 안달이 나고 내 자식이 다른 집 애들보다 잘 입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할 때면 누구보다 안타까운 게 부모 심정이 아닐가? 아버지도 분명 이런 심정이였을 것이다. 자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생활고를 겪는 현실 앞에 그걸 돌이키기엔 너무 무기력한 자신한테 화가 났을 것이고 가족 모두에게 더없는 죄책감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가끔 소등후 카텐 사이를 용케 비집고 새여들어오는 가냘픈 달빛을 바라보면서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버지가 사면팔방이 어둠으로 꽉 찬 마음이라는 작은 방에 갇힌 채 차가운 세멘트바닥에 앉아 좌절감에 빠져 방황할 때 내가 아버지의 은은한 달빛이 되여주었더라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소주병과 동무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심정을 조금만 리해해줬더라면 그 이는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았을가? 그 당시 모든 게 아버지 탓이라고 내몰지만 말고 이 또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좌절이라고 다독여줬더라면 결과는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가? 원망 대신 조금이라도 응원을 해줬더라면 아버지는 술을 덜 마셨을 테고 그러면 페와 간이 반 이상 하얗게 되도록 그 아픔을 못 느낄 정도로 무뎌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가? 혹여 아버지가 아픈 걸 느꼈음에도 죄책감에 병원에 가보자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술을 마시면서 자신을 마비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떠올리니 목이 메여와 하나 또 하나의 실면의 밤을 보내야만 했다.
무수한 실면 끝에 힘들게 잠들면 꼭 아버지가 꿈에 찾아온다. 호기심에 눈을 한웅큼 먹고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는데 아버지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흐뭇하게 웃으시다 홀연히 사라지는 꿈도 꾸었다. 아버지는 과연 이 못난 딸을 용서했을가? 수없이 용서를 빌고 또 빌었지만 그것 또한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핑게가 아닌가 싶다. 그저 아버지가 저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말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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