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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회의
2021년 02월 04일 10시 21분  조회:787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학부모회의 

김명화



설을 쇠고 개학하기로 한 어린 손주가 다니는 조기교육반이 세계를 휩쓴 신종코로나 때문에 몇달 뒤로 미뤄지게 되였다. 개학을 앞두고 학부모회를 한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아들며느리가 모두 직장에 출근하다보니 어린 손주를 조기교육반에 보내고 학부모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순리 대로 예순을 지척에 두고 있는 나의 몫이 되였다. 아무튼 갓 세돌이 지난 손주의 학부모회의에 모처럼 참석하게 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붕 뜬 아침이다.
애고사리 같은 손주의 보동보동한 손을 잡고 조기교육반 문 앞에 이르니 생기가 넘치는 젊은 선생님들이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일찌감치 대문 앞까지 나와서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마끔 아이 손을 잡고 해맑게 웃으면서 회의실에 들어가는 숱한 젊은 엄마들 가운데 훤칠하고 멋진 남자가 량손에 하나씩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알고보니 오누이쌍둥이를 둔 아빠란다. 오누이쌍둥이 아빠, 그러고 보니 나의 오빠도 오누이쌍둥이를 둔 아빠였는데… 그 남성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대학입학시험을 앞둔 고중 3학년 학부모회의에 오빠가 부모를 대신해서 참가한 일이 떠올랐다.
손꼽아 헤여보니 어언 40년전 일이다. 그 날은 마침 토요일이였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아버지처럼 듬직한 오빠가 학교 식당 문 앞에서 막내동생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 시골에는 소학교만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남존녀비사상이 심했던 외할아버지가 외삼촌 둘만 야학공부를 시키는 바람에 어머니는 남동생들한테서 몰래 글을 배워서야 겨우 조선글을 뗄 수 있었다. 어려운 나날에 그렇게라도 글을 익혔기에 참군한 오빠나 외지에서 공부하는 이 막내딸이 보낸 편지도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작은외삼촌이 길녘에서 주어온 탄알을 가지고 놀다가 터져 비명에 목숨을 잃는 바람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외할머니도 얼마 뒤 작은외삼촌을 따라 가버렸다. 해방후, 외할아버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17살에 난 엄마를 시집 아니, 돈을 받고 시집이라고 보내놓고 외삼촌만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며 어머니는 두고두고 외할아버지를 원망하셨다.
그렇게 중국에 남은 어머니는 생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을 이제나저제나 학수고대했다. 이제 한국에 가서 친정식구들을 만나게 되면 먼저 글을 가르쳐준 남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고향집 마당에는 홍시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홍시를 유난히 반기는 딸을 위해 해마다 설날이 되면 언 감은 꼭 사다가 찬물에 담가주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특별히 심은 거라고 하면서 아직도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평생 학교문에 들어서지 못한 게 여한으로 남아서 그랬던지 어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우리 4남매를 남들 부럽지 않게 모두 고중공부까지 시켰다. 우리들도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세라 한결같이 공부를 잘했다. 어린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 밤낮없이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하느라고 어머니는 한번도 우리네 학부모회의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학부모회의를 앞둔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사무실에 불러놓고 이렇게 단단히 일러주셨다.
“김명화, 이번 학부모회의는 아주 중요하니 부모님께서 꼭 참가하셔야 한다. 알았지?”
나는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지만 동네에 있는 학교에 다닐 때조차 학부모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어머니가 20여리의 먼 시골길을 걸어서 학부모회의에 참석할 리 만무하다는 걸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부모회의가 있던 날, 오전수업을 마치고 점심밥을 먹으려고 학교 식당에 가고 있는데 같이 가던 친구가 느닷없이 “명화, 너의 오빠야!”라고 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오빠가 학교 식당 앞에서 우리를 보고 반갑게 웃고 있었다. 오빠를 보는 그 순간 나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오빠가 “명화! 막내야!”라고 부르면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오빠! 어떻게?”
나는 금시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질 것 같아 머리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막내야, 학부모회의가 있다는 걸 왜 미리 알리지 않았어? 너의 담임선생님께서 널 칭찬하시더라. 문장을 잘 쓰고 랑송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구. 게다가 춤도 잘 추니 앞으로 사범학교를 나와 교원이 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오빠도 너의 선생님과 같은 생각이란다.”
오빠는 이렇게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한병과 돈 10원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빠, 올케한테 드려요. 난 괜찮아요.”
그 무렵, 올케는 오누이쌍둥이를 낳고 영양실조로 황달간염에 걸려 링게르주사를 맞고 있었고 어린 조카들은 우유를 사먹고 있는 힘든 형편이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로서는 오빠의 마음을 선뜻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빠는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한병을 꺼내 보여주면서 한병 더 있으니 걱정 말고 얼른 받으라고 밀어주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반죽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토닥토닥 등을 다독여주는 오빠의 따뜻한 사랑 앞에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한마디 말도 못했다…
그 날, 오빠가 학부모회의에 기적처럼 나타나 나를 응원해준 덕분에 그 뒤로 매일매일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여느때보다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비타민C를 한알씩 챙겨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밤자습이 끝나면 과자로 허기를 달래면서 밤을 새며 공부를 한 덕분에 대학에 이어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꿈까지 이루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우리가 사는 이 고장에도 한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돈을 번다고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막내야! 한국어시험에만 합격되면 한국에 갈 수 있는 정책이 나왔다는구나. 네가 대신 알아보고 좀 등록해줄래? 더 늙기 전에 돈을 벌어서 아들을 장가 보내고 로후대책도 마련해야겠구나. 막내야, 부탁한다.”
나는 오빠의 부탁 대로 어렵사리 인터넷으로 한국어시험 등록을 마쳤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어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오빠는 우리 한국어학과 선생님들마저 깜짝 놀랄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되였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오빠는 전화를 걸어와 회포에 잠긴 목소리로 속심말을 털어놓았다.
“막내야, 고맙다! 네 덕분에 엄마가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한국에 가게 되였다. 이제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엄마의 고향 경상북도에 가서 엄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외삼촌을 찾아뵐 거야. 생전이면 좋겠는데… 혹시 돌아가셨다면 산소에 찾아가 제사상을 올려 엄마의 마음을 전할 거야… 이제 돈을 많이 벌어올 테니 오빠 걱정 말아…” 그런데 막로동이 너무 고달팠던 걸가? 한국땅을 밟은 지 고작 26일 만에 오빠는 심장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오르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오누이쌍둥이 그리고 그동안 오빠를 아버지처럼 믿고 살아온 동생들과 작별인사 한마디도 없이… 이국땅의 반지하 세방에서 홀로 떠나야 했던 그 마지막 길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고 억울했을가.
9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가끔 터미널이나 기차역, 공항 같은 데서 오빠와 닮은 모습의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오빠!” 하고 부르면서 뒤쫓아가게 된다. 그리고 오빠의 친구 분들을 만나도 오빠 생각이 북받쳐올라 뜨거운 눈물을 훔친다…
그리운 고향에도 오빠가 돌아가신 후로 발길을 뚝 끊었다. 어머니와 오빠가 계시지 않는 고향은 이제는 추억으로만,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는 곳으로 남게 되였다.
나의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던 오빠의 모습을 새삼 되새겨보게 한 손주의 학부모회의, 모든 게 방불히 어제 일인듯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어린아이처럼 사랑하는 오빠를 애 타게 부르면서 흐느끼고 싶은 심정이다. 전화할 때마다 언제나 “오, 우리 막내, 명화구나.”라며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불러주던 오빠의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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