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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
2021년 02월 04일 10시 23분  조회:652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가을 들녘

최화숙



써늘해진 가을바람이 립추를 보내고 립동을 맞이할 차비를 서두르고 있는 계절의 변화를 암시해준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짙푸른빛으로 높아가는 하늘에 그리움을 실은 엽서라도 한장 띄워보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갑자기 단풍잎 하나가 머리 우에 살폿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그대로 발치에 미끄러져내린다. 가을은 사계절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만 자꾸 술렁대는 가을바람에 미처 채우지 못한 욕망 같은 게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면서 이름 못할 허전함과 아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잡혀 느릿느릿 걷던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퇴근길에 어김없이 만나군 하는 그 다감한 풍경이 한눈에 안겨왔다. 고향의 사랑방인양 약국 앞 계단에 모여앉아 가슴깊이 담아둔 삶의 애환들을 하나하나 꺼내놓는, 언제든 반가운 동네 어머님들의 모습이다. 시든 떡잎처럼 주름진 얼굴로 먼발치에 있는 나를 어느새 알아보고 한마디씩 반갑게 말씀을 건네온다.
돌이켜보면 어머님들과 인연을 맺고 지낸 지도 강산이 한번 반 변할 만큼 긴 세월이 흘렀다. 조촐하게 미장원을 차리고 개업하던 날, 동네 어머님들이 찾아와 내 손을 잡아주며 그렇게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민족이라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여 이제는 원하는 머리스타일을 할 수 있게 되였다면서 반색하던 어머님들, 그 때부터 나의 미장원은 동네 어머님들이 오가며 다리쉼을 하고 담소를 나누는 동네 사랑방 노릇을 도맡게 되였다. 
‘이란댁’, ‘탕원댁’, ‘목릉댁’, ‘7층댁’, ‘가방끈’, ‘노랑머리’, ‘담배쟁이댁’ 그외에도 많은 호칭들을 익혀가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할머니들이 ‘전라도댁’, ‘평안도댁’, ‘경상도댁’, ‘함경도댁’ 하며 서로를 부르던 호칭을 떠올리게 되였다. 거기에 개업 날 어머님들이 나에게 붙여준 ‘파마쟁이’란 호칭까지 모두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어머님들은 참으로 곱고 젊어보였다. 봄이면 아들딸이 사보낸 새옷을 화사하게 차려입고 미장원에 들려 머리를 곱게 다듬고 삼삼오오 모여 꽃구경도 가고 문구, 탁구 치러 가는가 하면 부채춤을 추러 다니기도 하고 마작이나 화투놀이도 했다. 몇년 뒤, 스마트폰이 보급되자 멀리에 있는 자식들의 얼굴을 보려고 뻐스를 타고 조선족문화관에 찾아가 무료로 가르쳐주는 스마트폰사용법을 익히던 어머님들이였다. 
8년간의 한국생활을 접고 할빈이란 낯선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갓마흔의 나이에 세살배기 작은딸을 돌보면서 한창 사춘기앓이를 하는 큰딸의 공부뒤바라지까지 하면서 일한다는 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는 일이였다. 그 때마다 나한테 위로가 되여준 건 어머님들의 살뜰한 관심과 보살핌이였다. 멀리 떠나간 자식들을 그리는 마음을 내게 쏟아붓는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봄이면 손수 들판에 나가 캐여 말쑥하게 다듬은 산나물을, 추석이면 송편을, 김장철이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김장김치를, 동지날이면 팥죽에 동치미까지 가져다주는 어머님들의 사랑을 수년간 듬뿍 받았다.
집에 인터넷이 끊겨도, 수도꼭지가 고장나거나 열쇠를 잃어버려도, 지어 물세, 전기료 미납통지서가 날아오거나 자식들이 부쳐온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갈 때도 먼저 나의 미장원에 들려 물어봐야 시름 놓던 어머님들, 파마를 곱게 하고 거울 앞에서 소녀처럼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던 어머님들, 어쩌다 끼니때에 맞춰 국수라도 끓여 대접하면 그렇게 행복해하던 어머님들, 가끔 명절날에 식당에 모시고 음식대접을 하면 맥주 한잔 기울이며 아리랑가락을 뽑던 귀여운 어머님들이였다.
할빈시조선족제1중학교 부근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겠다고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조선족들이 집거한 곳이다. 대개 젊은이들은 내지로,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고 로인들이 남아 어린 손군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민들레 홑씨처럼 어디든 뿌리만 내리면 하나가 되여 서로 나누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 미장원을 찾는 어머님들을 만나면서 감동으로 아침을 열고 감회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그녀들과의 소통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인생공부가 되였다.
몇해전부터 파마약에 심한 알레르기반응을 보이게 되자 미장일을 계속한다는 건 무리였다. 부득이 미장원을 접고 한국에서 갖고 온 헤어로션이며 염색약들을 어머님들에게 다 나누어주었다. 이사하던 날, 이른새벽에 이사짐회사의 차를 불러다 짐을 옮기고 있는데 어느새 기미를 챘는지 어머님들이 잇달아 미장원 앞에 모여들었다. 저마다 두루마리종이며 세척제, 가루비누, 식용유에 과일까지 두 손 가득히 들고 온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감격에 목이 꺽 메였다. 
자식들이 보내온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채소마저 이삭을 주어 보태는 어머님들, 허리며 다리가 아프면 쑥뜸을 뜨고 파스를 붙이면서도 병원에 가기를 망설이는 어머님들이 비싸고 질 좋은 걸로만 골라 챙겨온 선물을 손에 쥐여주면서 애를 키우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이쁘다고 등을 다독여주던 그 따뜻한 손길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그들 중 ‘이란댁’은 나의 미장원이 개업하던 날 찾아준 첫 손님이였다. 파란 웃옷에 연분홍 스카프를 두르고 갈색 모자까지 쓰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들어오던 멋쟁이였다. 한번은 우연하게 길에서 만나 1원짜리 무우청을 사드린 적이 있다. 한족장사군이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딸인가고 묻자 어머님은 서툰 중국말로 “맞소. 내 양딸이라오.” 하며 두 엄지를 척 내세웠다. 그후로 사이가 부쩍 가까워지게 되면서 어머님은 종종 미장원에 들려 파마기구에 앉은 먼지를 닦아주고 수건을 세탁기에 돌려주면서 나의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통원차에서 내리는 나의 작은딸을 대신 마중해주고 때로 저녁밥까지 안쳐놓은 ‘이란댁’은 모성애에 무척 목 마른 나에게 친정엄마처럼 살갑고 고마운 분이였다.
미장원을 그만두고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동안 나는 가끔씩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하군 했다. 그 때마다 동네에서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어머님들을 보면서 축 처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군 했다. 
그렇게 내게 힘을 실어주던 어머님들이 가을이 깊어가자 다들 객지에 있는 자식들이 무척 그리운 모양이다. 겨울방학이면 한국에 있는 자식을 보러 간다며 빨간 고추를 실로 꿰여 창밖에 주렁주렁 내다는가 하면 고추떡을 찐다, 무우말랭이를 만든다, 각종 절임을 만든다며 분주히 돌아친다. 우리는 모두 신종코로나를 전승한 승리자들이라고 즐거워하던 어머님들이 요즘에는 한국에서 신종코로나가 꽤 말썽을 피운다며 그 곳에 있는 자식들 걱정에 마음을 졸인다. 참말로 이놈의 신종코로나가 지구촌 곳곳에서 여간만 큰 말썽을 부리는 게 아니다. 애들마냥 “우리 아들이 한국에 새집을 장만했다오.”, “우리 딸이 식당을 차렸다오.”, “우리 손주가 글쎄 아들을 보았다오.”, “우리 손녀가 중국말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였다오.”라고 하면서 자녀들의 자랑에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고 어깨를 들썽거리던 어머님들의 수심에 잠긴 얼굴은 오늘따라 자글자글 쏟아지는 가을해살에 주름살이 더 깊어보인다. 나는 일시 무슨 말로 위로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큰딸이 결혼하고 외손녀가 태여나 할머니가 되자 나는 방학하기 바쁘게 작은딸과 함께 외손녀를 보러 한국으로 가군 했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갈 수 있을지 희망이 묘연하니 조바심만 난다. 화상채팅으로 말을 번지기 시작한 외손녀가 “채인인 할머니 최고”라고 종알거리면서 죄꼬만 엄지를 척 내밀 때면 단박에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기까지 한다. 
꽉 막혔던 배길과 하늘길이 다시 빠금히 열리고 있긴 해도 관련 수속이 까다롭기 이를 데 없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항공권가격에다 다른 비용까지 하면 한번 걸음을 걷는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에 로출될 가능성까지 커지니 더구나 발목이 잡힌다. 
살같이 흘러간 세월 속에 온갖 비바람 속에서도 녀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준 어머님들, 그 꽃밭에 듬성듬성 생겨난 빈자리들이 나의 마음을 저민다.
홀로 손녀를 돌보느라 너무 힘들어 성격마저 과격해진 ‘욕쟁이’어머님, 한국으로 떠난 남편이 행방이 묘연해지자 어린 네 자식을 키우면서 삶에 부대끼다가 귀가 절벽이 되여버린 ‘귀머거리댁’어머님, 마흔을 넘긴 아들이 허구한 날 말썽만 피우니 그 뒤수습만 하다 돌아간 ‘통화댁’어머님, 그 밖에도 몇몇 어머님들은 이제 한줌의 꽃구름이 되여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버렸다.  
내 평생에 잘한 일을 꼽으라면 말기암환자였던 ‘설안댁’어머님에게 마지막으로 파마를 해드린 거라 할 수 있다. 그 날, 워낙에 겁약한 나는 밤잠을 설칠 만큼 큰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침 일찍 푹 고은 토종닭과 함께 파마기구를 챙겨들고 ‘설안댁’을 찾아갔다. 그녀의 동생 분이 출근하고 나니 방안에는 나와 환자 둘만 남았다.
“어떻게 해드릴가요?”
“최고로 곱게 해주게나. 봄이라 이제 꽃들도 필 텐데 머리를 이쁘게 하고 꽃구경 가고 싶네. 여직 뭐하고 살았는지 꽃구경 한번 제대로 못했지 뭐야…”
울음조차 힘없이 토해내던 어머님,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어머님을 방석으로 받쳐준 뒤 파마를 곱게 말아놓고 나서 들고 온 닭곰을 꺼내여 살을 조금 찢어 입에 넣어드렸다. 힘겹게 입을 움씰거리며 한입 넘기는 둥 하던 어머님은 “자넨 이제 복 받을 게요. 마음이 착하니 딸들도 앞으로 다 잘될 거요.”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유난히 깔끔한 어머님을 위해 머리를 예쁘게 다듬어준 뒤 눈섭까지 정리해주었다. 문을 나서는 나에게 애에게 간식이라도 사주라면서 백원짜리 한장을 억지로 밀어주고는 내가 뿌리칠가 봐 문을 닫아버리던 어머님, 지금은 저 하늘의 한송이 꽃구름이 되였다… 
손군이 대학시험을 칠 때도 신종코로나로 막힌 길이 트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식들이 오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매일 밤잠을 설친다는 어머님들, 신종코로나 때문에 한하늘 아래에서 살면서도 자유로이 오갈 수 없게 된 요즘이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날들이 길어지면 년세가 많고 기운이 쇠약해진 어머님들은 얼마나 두렵고 불안해하실가. 지금 가로수 가지 끝에서 조락하는 잎새처럼 허전한 웃음을 짓고 있는 어머님들이 더없이 애처로워보인다.  
요즘 들어 부모님을 모시고 자식을 키우면서 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간다는 게 허다한 젊은이들에게는 사치스러운 꿈으로 되였다. 그러니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는 그들을 무작정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혹여 로모와의 리별이 영원한 아픔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삶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처지리라. 그리고 뼈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과 짙은 고독을 감내하면서도 자식들의 앞날이 훤하기만을 기원하는 건 이 세상 모든 어머님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멀리서 ‘달래’어머님이 ‘콩나물댁’어머님과 ‘새각시댁’어머님의 부축을 받으며 자꾸 한쪽으로 기우려는 몸을 애써 지탱하며 꽃을 찾아드는 나비인양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저 훈훈한 풍경, 멀리 떨어져 지내는 자식들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서로 다독이고 부축하며 살아가는 어머님들이야말로 가을 들녘에 피여나 은은한 향을 풍기는 국화꽃이 아닐가 싶다. 어머님들이 그리운 자식들과 재회할 그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부디 그 날까지 견뎌내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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