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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편에 깃든 엄마사랑
2021년 03월 30일 10시 00분  조회:569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송편에 깃든 엄마사랑
리향옥

엄마가 손수 빚은 송편은 쫄깃쫄깃하고 류달리 맛 있었다. 눈꽃처럼 하얗고 엿처럼 달콤한 그 맛을 나는 여직 잊을 수가 없다. 어릴 때 그토록 질리게 먹었던 떡인데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찾게 되는 까닭은 아마도 송편과 맺은 깊은 인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득히 멀어져가던 25년전 추억쪼각들이 퍼즐마냥 머리 속에서 하나하나씩 맞춰진다.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고 꽃망울은 수줍게 터질듯 꿈틀거리던 봄날이였다. 외사촌이모가 한국에 가게 되면서 서시장의 떡 매대를 엄마가 이어받게 되였다. 그 뒤로부터 엄마는 하루도 거를세라 입쌀, 팥, 사탕가루, 소금 등 재료를 대량으로 구매하여 송편을 알심 들여 만들어 가게에 이고 나가 팔았다.
송편을 맛보면 알듯이 만드는 데는 지극한 정성이 필수적이였다. 먼저 팥을 깨끗이 씻어 푹 불린 다음 삶아내여 으깬 후 따뜻하고 나긋나긋한 팥을 한입 크기로 길쭉하게 빚는다. 다음 입쌀로 보들보들한 떡가루를 내고 버무려 속을 넣은 뒤 가마에 쪄낸다. 쫀득쫀득한 떡을 손바닥 만한 크기로 동그랗게 밀어 팥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콕콕 찍어낸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떡과 달콤한 팥소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궁합이였다. 거기에 엄마의 손맛까지 더해져 떡이 맛 있다고 찾아오는 단골들이 날로 늘어났다.
어느 해 찌는듯 무더운 여름날이였다. 삶아둔 팥에 물이 조금 들어간 탓에 반나절도 안되여 팥이 모조리 쉬고 말았다. 고객이 송편을 가지고 매대에 찾아오자 엄마는 두말없이 돈을 돌려주었다. 쉬여버린 몇십근 되는 송편을 버리고 맥없이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코마루가 찡해났다. 새벽같이 일어나 팽이처럼 분주하게 돌아쳤는데 공든 탑이 그냥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하지만 엄마는 “돈을 내고 교훈을 샀다 치면 돼.”라고 하시더니 이내 훌훌 털고 일어나 다음날의 재료들을 준비하느라 서둘렀다.
온돌과 련결되여있는 가마에 떡과 팥을 쪄내기에 방안은 늘 찜통을 방불케 후끈거렸다. 장판마저 발바닥이 빨갛게 델 지경으로 뜨거웠다. 열기가 확확 와닿는 구들에서 엄마는 땀을 뚝뚝 흘리며 다리를 꿇고 앉아 송편을 빚었기에 무릎은 늘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떡 하나하나를 손수 빚다 나니 두 손도 늘 구운 고구마처럼 벌겋게 퉁퉁 부어있었다. 그렇게 송편을 판 수입으로 온 식구의 생활비를 마련했고 자식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해주었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 난방이 제대로 되여있지 않은 시장 안에서 온 하루 있어야 한다는 건 그야말로 견디기 힘든 고역이였다. 두꺼운 옷을 여러벌 껴입었다 해도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막기에는 태부족이였다. 추운 겨울인지라 시장을 찾는 고객들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다보니 땅거미가 지면 밖에 나가 부들부들 떨면서 팔아야 했다. 하얗고 곱던 얼굴과 손은 얼어터져 감자처럼 터실터실해졌는데도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 엄마는 일년 내내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만큼 부지런히 시장에 나갔다.
예약이 줄줄이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를 도와 송편을 대야에 담아야 했다. 하루종일 쭈크리고 앉아서 몇백개가 넘는 송편을 대야에 담아야 했으니 기름이 발린 손은 끈적끈적하고 몸에서는 떡냄새, 땀냄새가 물큰거렸다. 주말이면 엄마와 함께 공원놀이도 하고 쇼핑도 하고 싶었는데도 우리한텐 그런 여유가 전혀 없었다. 엄마도 녀자인데 왜 꾸미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어깨에 짊어진 짐 때문에 엄마는 그런 사치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끔씩 일찍 하학하는 날이면 엄마가 떡을 파는 매대로 찾아갈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를 매대에 세워놓고 자기는 밖으로 나가서 팔았다. 팥소를 넣은 송편은 하루만 넘기면 변질하기 십상이기에 날이 저물기 전에 팔아야 했다.
그 날도 도움이 되겠나 싶어 하학하고 엄마 매대를 찾았는데 해가 거의 질 무렵에 예쁘장하게 생긴 아줌마가 찾아와서 송편을 두근 달라며 백원짜리를 건넸다. 두근이면 거스름돈 96원을 찾아드려야 했는데 잔돈이 그렇게 많지 않아 밖에 있는 엄마한테 가서 잔돈을 바꿔가지고 와야 하니 좀 기다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줌마가 된다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엄마한테 달려가며 손에 있는 100원짜리 지페를 만지작거렸는데 촉감이 이상했다. 새 돈인데도 빨락거리지 않았다. 엄마는 돈을 하늘에 대고 빤히 쳐다보고 나서 툭툭 쳐보더니 가짜돈이라고 했다. 조심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또 온 하루 번 돈을 그냥 날릴 번했다.
그 뒤로 엄마는 떡장사를 5년간 더 이어갔고 나도 대학에 가게 되였다. 락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어느 가을날, 엄마가 숙소로 전화를 해서 이젠 떡장사를 접고 한국에 가서 일해보련다는 뜻밖의 속내를 터놓았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여서야 엄마는 외롭고 고난으로 얼룩졌던 타국살이에 종지부를 찍고 다시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요즘 엄마는 우리 식구들을 챙겨주랴, 어린 외손주를 돌봐주랴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이 보낸다. 오늘도 우리는 밥상에 빙 둘러앉아 엄마가 손수 빚은 떡을 먹으며 옛이야기꽃을 피운다.
“네가 대학을 다닐 때 학비와 생활비까지 해서 일년에 꼭꼭 만원씩 들어갔어. 일년 내내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끼면서 모아봤자 너의 학비밖에 안되더라. 그 땐 네 동생도 어렸으니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외국에 나가는 게 짧은 시간에 목돈을 벌 수 있는 지름길이였어. 하지만 외국에 가서도 불법이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어. 갚아야 할 빚은 산처럼 쌓여있고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데 만약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면 어쩌나 하고 밖에서 싸이렌 소리가 날 때마다 꼼짝 않고 집에 박혀있었지…”
마흔의 문턱에 들어선 오늘에야 엄마가 급하게 한국행에 나서게 되였던 리유를 알고 나니 마음이 찡해났다. 항상 우리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엄마가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고 그렇게 서러워했는데 이 모든 게 우리를 걱정해서였다는 걸 알고 나니 고마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40대 중반에 남편과 자식을 두고 낯선 외국으로 떠나는 엄마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한국에서 보모로 일하면서 주인집 아이를 볼 때마다 우리 얼굴이 눈앞에 삼삼해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엄마는 오늘에야 마음속 고충을 털어냈다. 으리으리한 별장인데도 보모한테는 창고로 사용하던 코구멍 만한 방을 침실로 내주었다. 난방도 안되는 선뜩한 바닥에서 며칠 자고 나서 하도 견디기 힘들어 주인한테 전기담요를 빌려달라고 했더니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안 주더라 했으니 얼마나 슬펐으랴. 오죽하면 엄동설한에 오돌오돌 떨며 고향에서 뜨끈뜨끈한 온돌에 앉아 송편을 만들던 추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겠는가. 집주인의 끊임없는 잔소리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그래도 고향에 있는 남편과 애들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고 하니 마음이 미여질 뿐이다.
얼마 뒤 보모일을 그만두고 식당에서 그릇을 씻는 일을 했는데 하필 떡을 파는 가게였다. 그 날 따라 왼쪽 눈이 유난히 푸들거려 불안했는데 조심하지 않아 뜨거운 물을 쏟는 바람에 팔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상처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듯 아팠는데도 약을 대충 바르고 그대로 계속 일을 놓지 않은 어머니였다. 아파도 누워있을 겨를이 없었고 달마다 빚을 꼭꼭 갚아야 했기에 하루라도 편히 쉴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엄마의 팔에는 아직도 그 때 사고로 남은 상처가 흉측하게 남아있다.
어느 날 아침, 채소 사러 나가는 길에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나기에 별생각 없이 걸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어깨에 멘 가방을 확 채고 달아나버렸단다. 화들짝 놀라서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분질러 한동안 고생을 심하게 했단다. 돈은 항상 호주머니에 챙기는 습관이 있어 가방에는 별로 요긴한 물건을 안 넣은 게 불행중 다행이였다. 그래도 시퍼런 대낮에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당했으니 그 뒤로 얼마나 마음을 조이며 살았겠는가?
“떡장사를 할 때는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도 매일 얼굴을 볼 수 있고 하루하루 커가는 너희들을 보노라니 힘든 줄도 몰랐어. 한국에 가서야 진짜 고생이란 게 뭔지 몸과 마음으로 실감했지. 8년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오니 소녀였던 네가 결혼한다고 신랑을 보여주지, 겨드랑이 밑까지 겨우 오던 둘째마저 훤칠하게 커버려서 처음엔 얼마나 서먹서먹했다구…”
우리 곁에 있어줘야 할 나이에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깊게 남아있는듯 엄마는 가볍게 탄식했다. 온 가족이 송편을 함께 만들던 시절이 그리웠는지 요즘은 늘 그 때 일들을 돌이키며 지난 얘기를 곧잘 꺼낸다.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여다니며 재롱 부리는 자식들을 떼여놓고 떠나가며 시름이 놓이지 않았는데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선택을 한 거겠지만 엄마는 그 아쉬움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가난하긴 해도 가족이 오손도손 함께 할 때가 제일 행복했다면서 엄마는 오늘도 옛말처럼 자주 외운다. 그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이젠 우리가 다 커서 홀로서기를 하니 엄마는 늙었네 하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상을 물린 뒤에도 엄마의 송편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엄마가 만든 송편 하나하나에는 가족과 자식에 쏟은 깊은 사랑이 녹아있었다. 눈바람이 휘몰아쳐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일년을 하루같이 매대에서 송편장사를 악착스레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외로운 타향에서 눈물로 세수를 하다싶이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자신의 두 손으로 가족을 지켜내고저 했던 엄마의 굳센 의지가 살아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월은 어느덧 엄마의 이마에 깊은 주름살을 그려놓고 머리에는 하얀 서리를 살폿이 뿌려놓았다.
고생으로 얼룩진 쓰디쓴 엄마의 인생은 알고보면 자식들한테 모든 걸 고스란히 바친 인생이였다. 인정은 물과 같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내리사랑에 비하면 치사랑은 너무도 초라하지 않나 라는 느낌이 갈마든다. 송편에 깃든 엄마의 이야기가 어쩌면 평생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오신 우리 엄마 세대들의 살아있는 전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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