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십 청춘의 초상
최룡권
이제 갓 일곱살인 손녀딸이 어느 하루 생뚱맞게 그랬다. “우리 할아버지는 청춘이야.” 그래서 “청춘이란 게 무슨 뜻인지 알아?” 하니 “청춘이란 건 얼굴에 주름살도 없고 힘도 세다는 말이지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말이야.”라고 종알거렸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입에서 그런 어물한 소리가 나오나 싶으면서 기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내 나이 륙십 하고 다섯, 옛날 같으면 쓰다 남은 돌 같은 로인네겠지만 요즘 같은 백세 시대에는 륙십이 청춘이라니 어깨를 쭉 펴게 된다.
퇴직과 함께 35년을 근무한 직장을 떠날 때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했다. 출근할 때는 마냥 힘들고 바빠서 ‘언제면 퇴직해서 원없이 려행도 다니고 친구들과 모임도 자주 할 수 있을가.’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퇴직을 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무료함이라도 달래볼겸 활동실에 드나들며 마작판에 끼여들었다. 평생 부기원으로 살아오면서 수자와 씨름해서인지 기억력이 남들보다 월등히 좋아 거의 백전백승이였다. 소일거리 삼아 푼돈을 가지고 노는 놀음이라 큰돈은 나들지 않아도 손녀딸들의 소비돈 벌기에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놀이도 하노라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허물들이 하나하나 보였다. 한평생 담배를 입에 댄 적 없었던지라 활동실에 넘치는 담배연기가 딱 질색이였다. 반나절씩 있다 보면 목이 칼칼하고 기침과 가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눈마저 아물거렸다. 게다가 허리가 아프고 팔다리도 뻐근해났다.
출근할 때는 퇴근후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했는데 마작을 시작한 뒤로는 운동도 뒤전이였는지라 몸도 점점 무거워났고 혈압도 덩달아 높아졌다. 까다로운 식성 때문에 날마다 활동실에서 제공하는 식사로 끼니를 때우자니 그것 또한 고역이였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활동실을 찾은 노릇이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여온 격이 되는 것 같아 그 뒤로 활동실에 발길을 딱 끊었다.
마음을 먹고 발을 끊은 것은 분명 잘한 일 같은데 그 뒤로 일상이 공허해지니 어쩔 수 없었다. 텔레비죤을 시청하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어쩌다 한두 날이지 그 뒤론 스마트폰을 들고 방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일과로 되여버렸다.
이러다 페인이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등산과 걷기 운동을 해보기로 마음을 잡았다. 등산을 즐기는 친구의 소개로 연변조선족자치주도보협회에 가입하면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아산을 포함한 주내 산과 벌을 타게 되였다. 모임 날이면 단체복을 맞춰입고 아침 8시에 출발해 등산한 후 함께 체조도 하고 기강도 다지며 체력을 올렸다. 매일 저녁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는 친구와 함께 하남다리부터 천지대교까지 왕복으로 한시간 반씩 걷기운동을 이어나갔다. 운동을 꾸준하게 견지하다보니 몸이 거뿐해지고 면역력이 높아진 건 물론 친구들과 어울리니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우리 도보협회는 20대로부터 70대까지 다양한 년령층의 회원을 두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한테서는 신생사물을 배우고 나보다 년세 있는 어르신들한테는 그들의 인생경험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세상 돌아가는 리치도 쉽게 배울 수 있고 사고와 지식의 폭도 넓어졌다. 아래우 세대를 아우르며 내 륙십 청춘도 무르익어가는 느낌이다.
등산하지 않는 날은 직장생활이 바쁜 딸을 도와 소학교에 갓 입학한 외손녀의 방과후 숙제를 책임져주고 주말이면 이제 갓 9개월이 된 손녀를 돌봐주기도 했다. 내 자식이 어릴 때는 그렇게 이쁜 줄 몰랐는데 손녀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 애들 간식을 사주느라고 퇴직금이 야금야금 축이 나도 전혀 아깝지가 않다.
그리고 퇴직전 나의 전공을 살려 정부구매 전문가시스템에도 등록했다. 아직은 내 여생의 불씨를 지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젊었을 때는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치렬한 삶을 사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도 모르고 지냈다. 내 나이 륙십 고개를 넘어 자식들이 성장하고 직장생활에도 종지부를 찍으면서 삶에 여유가 생기고 보니 이제야 세월의 덧없음을 페부로 감지하게 된다.
공자는 “내 나이 륙십에 귀가 순해졌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이 말의 뜻은 60세가 되니 거슬리는 말도 리해되고 용서되여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되였다고 뜻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불쾌한 말을 들었어도 젊었을 때처럼 당금 화를 내거나 서운해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가슴을 비우게 된다. 또한 세상사가 뜻 대로 되지 않거나 남의 말이 달통이 되지 않더라도 역지사지 즉 상대방의 립장에서 너그럽게 생각하고 헤아려보게 된다.
나이를 먹으니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게 되는 게 나 스스로도 참 이상해난다. 쓸데없는 걱정과 잔소리도 줄어들었다. 언제부턴가 지나친 간섭은 젊은이들에게 귀를 때리는 잔소리로 다가갈 수 있다는 도리를 깨달았다. “내가 젊었을 적에는… 우리 그 때는…” 이런 말을 하면 요즘 젊은이로부터 ‘늙은이’로 취급받기 일쑤다. 호감 받는 어르신이 되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 하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지난 인생을 참 치렬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거칠고 서툴고 후회도 많지만 그리 아쉬운 것만도 아니였다. 지금껏 지칠 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온 나 자신에게 그리고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때로는 스무살의 청년보다 륙십 로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고 한다. 세월은 살결에 주름이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은 시들게 하진 못하거늘 내 나이 륙십,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창 익어가는 중이라고 소리높이 웨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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