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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에 묻혀살았던 그 세월
2021년 03월 30일 10시 12분  조회:1097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글짓기에 묻혀살았던 그 세월

김일량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막혀 2년째 출국도 못하고 집에 꽁꽁 갇혀있는 신세가 안스럽다. 경작지마저 이웃 동네 한족들에게 도급 주다보니 안해와 함께 여러집 터전을 함께 다루어주는 외에는 시간만 나면 부지런히 철에 따른 여러가지 산나물 뜯으러 다니는 게 일상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구질구질 내리다보니 산행을 포기하고 집에서 책장 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한가한 시간을 달래보기로 마음을 비웠다. 책 뒤에 두툼한 서류봉투가 있어서 그것을 거꾸로 들고 툭 털어보았더니 내가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실려있는 신문, 잡지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그중에는 한복 차림의 안해와 행복하게 웃으면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화창한 산바람이 부드럽게 살을 간지럽히고 쾌청한 산새 울음소리가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 산간마을에 나의 꿈과 삶과 사랑이 깃든 집이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야릇하게 간지럽히는 시골의 그윽한 정취에 마음을 푹 삶으면서 나는 대자연을 자아화하여 아름다운 글을 창작하며 나의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해나갔다. 말하자면 내 글이 쏟아져나온 아지트가 바로 시골이였다.
농사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문학창작을 은근히 꿈꾸고 있었으니 몸은 일하고 있어도 상상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날아예고 있었다. 어느 한번은 소수레를 몰고 마을과 멀리 떨어져있는 산골 콩밭을 후치질하러 갔는데 밭에 도착해서 보니 멍에를 가져가지 않았다. 할수없이 소를 풀밭에 풀어놓고 이미 중천에 떠오른 따가운 여름해를 머리에 이고 털썩털썩 집으로 돌아가는데 골어구에 나서니 안해가 그 무거운 멍에를 가녀린 어깨에 메고 힘들게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나 미안했던지 금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또 한번은 아침에 일어나 부엌에 불을 지피고 절반 쯤 탄 장작불로 담배불을 붙인다는 것이 담배를 입에 무는 걸 그만 깜박하고 입술을 지져놓아 커다란 물집이 생겨 한참을 고생했다.
 어느 하루, 우리 또래 셋은 제각기 소수레를 몰고 마을과 10여리 상거한 산골로 달맞이꽃을 베러 가게 되였다. 가을을 예고하는 양 미묘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황홀한 대자연 속에서 숨박곡질을 하고 있는 늦은 여름날의 풍경은 한여름에 비하면 어딘가 산뜻하고 깨끗하고 눈부신 것 같았다. 우리는 잎담배를 한대씩 말아 피우고 달맞이꽃을 베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낫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밤 모 편집부에서 부탁한 원고를 마무리 짓느라고 온밤을 새우다싶이 하였고 아침에도 그 원고 때문에 들볶다보니 그만 깜박 잊고 낫을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여름 풀물이 완전히 가지 않은 달맞이꽃은 낫으로 베여야 하는데 손으로 꺾자니 뿌리까지 뽑히면서 잘 꺾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온종일 일하는 남들을 쳐다보다가 해질녘에야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사연을 알고 나서 안해는 동네가 창피하다고 바가지를 긁어댔다. 기분이 잡쳐서 친구네 집으로 마실을 갔다 와보니 내가 보배처럼 아끼던 《현대조선말대사전》과 원고지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 사전은 젊은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햇싸리부업을 해서 번 돈으로 힘들게 마련한 공구서였다. 그 때 향수구소에서 햇싸리를 수구하였는데 한근에 2.5전이였다. 며칠 동안 손을 얼구다싶이 일해서야 한사람에게 13원씩 겨우 차례졌다. 그 당시 13원이면 큰돈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그 돈으로 멋진 신발을 산다, 맛나는 음식들을 장만한다 신나 하는데도 나는 아버지에게 근들이술 한병을 사다준 외 나머지 돈은 장농에 깊숙이 넣어두었다가 어느 날 연길시 문화서점에 들려 두툼한 《현대조선말대사전》을 샀다. 그렇게 모르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사전을 뒤적이면서 어휘량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는 둘도 없는 보배였다.
그런데 분신마냥 내 곁을 지켜주던 사전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다니 분명히 안해의 작간이였다. 하지만 안해는 모르쇠로 발뺌을 하느라 그랬던지 한쪽으로 돌아누워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내가 밤 새워 정리한 원고들도 모두 사전에 끼워넣었던 터라 나는 급기야 안해를 깨워 자초지종을 물었다. 돌아오는 안해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하마트면 까무라칠 번했다. 까짓 돈도 안 나오는 책이 꼴도 보기 싫어 불태워버렸단다. 순간 가슴에 세찬 불길이 확 이는 것 같았다. 화가 난 김에 손이 가는 대로 책 한권을 쥐여 안해에게 뿌렸는데 면바로 안해의 얼굴에 맞힐 줄이야. 안해는 이내 얼굴을 싸쥐고 딩굴었다.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이웃에서 달려왔다. 화 날 대로 났을 텐데 안해는 얻어맞은 얼굴을 싸쥔 채 깨끗한 보자기에 곱게 싸서 사랑채에 감추어놓았던 나의 책들을 도로 가져왔다. 동네 아줌마들이 아무리 그래도 먹물이나 먹었다는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인가며 나를 나무라자 안해는 도리여 이 이가 가장 아끼는 책들을 감춰놓는 바람에 이런 빌미가 났다면서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렸다. 안해의 하늘 같은 아량에 다시한번 눈굽을 적셨다.
그 해 겨울, 나는 모 문학잡지로부터 내가 쓴 글이 대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게 되였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안해한테 알리고 싶었다. 상금도 상금이겠지만 말은 안했어도 그동안 모든 고생을 홀로 씹어삼키며 내 곁을 묵묵히 지켜준 안해와 이 영예를 함께 누리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였다.
그 뒤로도 나는 여러가지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릴 때마다 그 기쁨을 가장 먼저 안해와 나누었으며 시상식에 꼭 안해와 동참해서 기념사진을 한장씩 남기군 했다.
오늘도 나는 안해가 차려주는 소박한 반찬에 소주 몇잔을 기울이는 즐거움 속에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깊은 상상에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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