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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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 대한 단상
2007년 08월 11일 17시 27분  조회:4522  추천:105  작성자: 박문희

비평에 대한 단상

 

이 글은 이전에 우리 문단의 비평풍토에 느끼는 바가 있어 가끔 생각이 날때마다 적어 모아둔것이다. 단상이지만 한데 묶어놓으니 너무 길어졌다. 그런대로 여기 옮겨놓으니 읽는 이들의 량지를 구하는바이다.


*
누구나 장점이 있는 동시에 부족점이 있기 마련이며 아름다운 일면이 있는 반면에 추악함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누구나 찬양이나 아부의 대상이 될수 있으며 동시에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수도 있음을 의미하며 그 누구든 일정한 목표를 상대로 찬양 혹은 비판을 실시할 자유를 가질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리유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나 찬양이나 비평 앞에서 자유로울수 없는것이다. 

 

* 나에게는 남에게서 상처를 받았던 불쾌한 기억도 있지만 남한테 상처를 입혔던 아픈 기억도 있다. 상처받았던 일은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좋고 상처를 입혔던 일은 되도록 기억에 남겨두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수시로 자기에게 경종을 울려주는것이 좋다. 왕왕 우리는 이와 반대로 상처받은 일은 기억에 새겨두고 상처를 입힌 일은 흔적없이 지워버리기 일쑤다. 더욱 문제로 되는 것은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주고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나에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경우다. 상처받은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고 영원히 잊지 않는다면 그 인생이 내내 고달플수 밖에 없을 것이다.

 

* 고로 어떤 필요에 의해 누군가를 비평해야 할 때 자기반성을 반드시 곁들여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글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수 있다. 비평의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비평의 글을 쓸때 자기 반성이 글에 드러나지 않아도 별문제지만 쓰는 이에게 있어서 그런 속마음이 안받침돼 있어야 비평의 글에 타인에 대한 리해, 사랑과 관심 혹은 동정과 같은 따뜻한 마음, 모종의 바람직한 일을 촉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비평의 대상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 인간존중, 여기에는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다. 잘 사는 자가 못사는 자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잘생긴 자가 못생긴 자를, 자신감에 넘친 자가 움츠린 자를, 신체가 온전한 자가 신체장애자를, 용감한 자가 겁많은 자를, 권세 있는 자가 권세가 없는 자를, 고귀한 자가 비천한 자를,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잘 나가는 자가 일마다 막히는 자를, 총명한 자가 좀 모자라는 자를, 밝은 곳에서 활개치는 자가 어두운 곳의 매춘녀를  아무런 사려도 없이 함부로 비웃거나 비하하거나 괄시하거나 박대하거나 등쳐먹거나 타매할 권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제각기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평등원칙은 어느 때나 지켜져야 한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수 있겠는가.

 

* 비평, 비평의 비평과 비평의 비평에 대한 재비평. 무슨 비평이든 목적은 어디까지나 글의 생각이나 방법의 부족점을 극복하여 변화 발전 제고시키려는데 있다. 그런만큼 비평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예리한 비평이라고 해도 그 속에 따뜻한 감정이 내포돼 있어야 한다. 암만 말로 우리 민족을 걱정하고, 예리한 비평은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의중을 밝힌다  해도 글속에 야유와 조롱만 있고 민족의 아픔과 진로를 걱정하는 깊고 따뜻한 속마음(때론 예리한 메스에서도 가슴이 뭉클하는 따뜻함이 묻어난다)이 없다면 그 글을 민족을 걱정하는 글이라고 볼수 없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해서 그 글이 반드시 사랑의 글이 되는게  아니며 글에서의 사랑은 사랑한다는 낱말에서보다는 그 글줄 사이에 슴배여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쓰지 않는 글에서 아주 깊고 큰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리치에서이다.

*
비평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좋다. 고깝게 생각한 결과 복수 비슷한 감정이 글에 반영되여 대방에게는 비수가 되여 날아간다. 날아갔던 비수는 본인이 바랐던 바와는 다르게 도로 날아와 자기 가슴에 꽂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문단에 부당한 비평으로 앙숙이 져 문단의 건전한 발전에 영향을 주는 일이 있는지 자성해 보고 만약 있다면 매듭을 푸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 흔히 글로 모종 현상에 대해 비평할 때가 있다. 그러나 비평은 타인에 대한 비평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평 혹은 반성이기도 해야 한다. 도리를 따져서 리해가 돼야 반성이 그 의미를 갖게 되므로 주로 리치를 캐며 자기를 미루어 타인을 리해해주는 노력도 기울여야 할것이다. 비평에는 따뜻한 마음가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떤 비평은 의사가 환자의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듯 날카롭고 사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평에서는 진정 우리 사회, 우리 교육, 우리 경제, 우리 문단, 그리고 그 비평대상자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그 속에서 솔솔 풍겨나온다. 

 

* 비평의 겉과 속. 나는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민족의 허물에 날카로운 메스를 대는데 비평이 과하더라도 리해해 달라.고 초고층빌딩처럼 거창한 비평문의 서언에서 이렇게 초심을 밝히는 비평자들이 있다. 이렇게 할수 없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고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평문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 여부는 비평 자체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 비판동기에 대한 장황한 해석에서 표현되는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권의 비평서에 민족사랑이란 말 한마디 없어도 민족사랑을 표현하는데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을수 있다. 사랑은 글줄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솔솔 풍겨 나오는 것이지 한편의 겉바른 성명발표에 있지 않다. 날카로운 비평에서도 사랑을 감지할수 있다. 반대로 민족사랑을 표방한 이른 바의 일부 거창한 비평서에서는 사랑보다는 민족에 대한 멸시의 감정이 처처에서 로출되여 읽는 사람을 자극한다. 환자의 썩고 있는 환부에 예리한 메스를 들이 대는것과 스스로 시술에 능하다고 자처하면서 제멋대로 행하는 란도질은 성격과 개념이 하늘과 땅만큼 동이 닿지 않는다. 유효처방이 전무한 란도질은 병의 치유에 도움이 별로 안될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부정적 측면으로부터 좋은 처방을 유발해낼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
원래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칭찬도 안 하지만 욕도 안 하는 법이다. 비판을 한다는 것은 애정과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을 받게 되면 울컥할 게 아니라 감사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설혹 오해에서 비롯된 비평일지라도.

 

* 비평을 받고도 고맙게 생각되고, 비평자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비평에 내재한 관심이 따뜻이 안겨오는 원인 외 주로 그 비평에 감복이 되고 그 비평을 통해 자신을 제고 할 수 있는 영양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몰랐던 자기의 부족점을 깨치여 한 시기, 지어 평생 혜택을 볼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비평을 두리뭉실하게 하는 일이 현재 조금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는 비평에 꿀을 발라 읽는 사람은 그것이 비평인지 칭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문제가 곪아 터질 정도로 쌓이는 것은 이런 온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이 아닐가? 비판의 내용과 방향은 항상 분명해야 한다. 때로는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로 매몰차게 비판해야 서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있다. 비평의 필봉은 늘 문제의 변두리에서 어물거리지 말고 문제의 요해처, 급소와 핵심을 건드려야 할것이다.


*
 싸움끝에 정이 든다는 말이 있다. 칼날과 칼날이 마주치면 불꽃이 튕기기 마련이다. 아주 정상적이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쳤는데도 불꽃이 튕기지 않으면 자연 그 칼이 진짜 칼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지게 된다. 잘 단조된 칼과 그렇지 못한 칼은 암만 마주쳐도 불꽃이 튕기지 않을수 있다. 아무튼 공방전을 펼치면서 싸우다 보면 서로 대방을 알게 되고 대방의 "공격"을 통해 자기의 허점도 알게 된다.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던 허점을 알도록 해준 "적수"에 고마운 마음이 생기면, "적수"가 친구로, 그것도 절친한 친구로 되는 건 시간 문제다. 물론 그것이 고맙지 않으면 친구 운운은 비교적 어려울것이다. 그러니까 싸움끝에 반드시 정이 드는건 결코 아닐것이다.

*
칼을 들자마자 아무곳에나 대고 마구 찌르고 쑤시고 하여 상처만 가득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건설적이지 못하다. 기실 그것은 자기에게 상처를 내는 무모한 짓이나 다름없다. 겉보기엔 남을 찌른 것 같지만 기실은 자기를 찌른 것이다.

*
비평의 유머. 로신선생의 비평이 사무치게 그립다.

 

* 지금 문단에 주문비평(혹은 주문평론)이라는것이 있다는데, 그중의 일부 평론은 작품의 내재적 가치평가를 통한 문학창작활동의 진보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작가의 얼굴에 분칠, 혹은 먹칠을 하기 위한데 있다고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예비평이 되는지에 대해 깊이, 적어도 두번 쯤은 생각해 볼바 아닐가 생각된다.

 

* 비평을 정확한 동기에서 했지만 틀리는 경우도 있다. 의사가 사람을 구하려는 동기에서 시술을 했지만 실수로 환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쳤을 때와 비슷하다. 그 비평이 잘못임이 드러났거나 지적됐을 경우 용감히 허심히 접수하고 사과하고 시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물론 사과의 글을 장황히 늘여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고 분명히 보여주기만 하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만 가지면 나머지는 문제가 아니고, 언제나 문단에 떳떳이 나설수 있겠다는 것이다.

 

* 문화혁명 전에 모택동이 팽덕회를 중대사안과 관련해서 호된 비평을 한 적이 있었다 한다(그런 비평이 실지로 있었는지는 필자로서는 고증할 바 없고, 혹은 그 비평이 옳았는지는 이 글에서 관계할 바가 아니다. 여기서는 단지 그 뜻만 취할 뿐이다). 팽덕회가 검토서를 썼는데, 32절지에 절반도 안 되는 분량으로 써 바쳤다 한다. 아마  “분명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다 정도로 자기 검사를 했을 것이다. 모택동의 비준지시는 뭔가?  비교호(比較好, 자기검토가 비교적 잘 됐소) 세 글자였다고 한다. 잘못을 안 게 중요하니 그럼 다 된거 아니야? 이런 뜻이 아닌가 생각한다. 팽덕회와 같은 호걸남아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시인하면 인정해 줘야 하는 것이다. 네가 시인한다면 나한테 진거다, 모택동이 이처럼 졸장부나 소인배들처럼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다. 우리 생각이 가까워 졌으니 앞으로 단결해서 나라 일을 잘 볼수 있겠다, 정말 잘 생각했다. 고맙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자기비평과 자기비평에 대한 평어를 오늘 다시 가설해 본다면--

--어제 밤 생각해 보니 형님의 말에 일리가 있소.

--형의 말을 리해해 주니 무척 고맙네, 아우.

 

* 암만 비평과 반비평에서 졌다 (기실 결과적으로 다 승자여야 마땅하다)고 해도 승복했다는 자체를 승리로 봐야 할것이다. 이것을 로신선생이 지적한 아큐정신, 말하자면 이른바 중국인의 정신승리법과 혼동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신승리법은 승산이나 대안이 없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의 자아도취법 혹은 자기위안법이지만 승복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의 부족점을 극복할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됐는데 이것이 승리가 아닌가? 내심으로는 승복하면서도 쪽바가지만한 얼굴 때문에 이러저러한 변명으로 얼렁뚱땅 굼때려든다면 량자(비평을 하는 자와 비평을 받는 자)가 다 개운치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 만다. 말하자면 통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잘못할 때는 있게 마련이다. 잘못을 용감히 시인하고 고치려는 노력만 있다면 그 어느 때든 떳떳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이 가게 되고 존중스러워지는것이다.

 

*  동기불명의 비평, 목표(과녁)불명의 비평같은것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비평을 화풀이나 공격무기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비평이 아니라 비난이다. 비난은 미운 감정의 발산이거나 상대방을 깔아뭉개기 위해 하는 것인만큼 사실 듣는 사람의 립장에서는 얼른 감을 잡는다. 하기에 비판의 탈을 쓰고 비난을 퍼붓게 되면 설사 일리가 있는 얘기라도 서로의 사이는 더욱 벌어질 뿐이다. 설령 비평의 대상이 원쑤라 하더라도 사실을 밝히고 도리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다.

 

* 한 작품에 대한 비평이 공개적인 간행물에서나 회의석상에서 행해질 때는 문우에 대해 당면에서, 사석에서 하는 비평과 경우에 따라서는 구별이 돼야 한다. 사석에서, 혹은 내부적으로 얼마든지 해결할수 있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해결하려 들면 오히려 문제가 해결이 되기는 고사하고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가 있다.

 

* 영화에서 일본 사람들이 중국의 무덕을 가진 무인에 탄복하고 승복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아 왔다. 사실 여하를 떠나 덕으로 뭔가를 해내는 이런 풍토는 이뤄져야 한다. 비평에도 덕성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을 뭐라 하는가? 평덕이라 해야 하나 뭐라 해야 하나? 그리고 비평을 받음에도 덕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다. 비평을 받는것은 기실 따지고 보면 아주 감사한 일이다. 진심으로 하는 예리한 비평이 좋은 것은 말 말고 보복으로 오는, 혹은 무지막지한 비평도 받아들일수 있는 자세를 갖춰야 할것이다. 물론 영양가가 없는 비평은 침묵이 제일 좋은 답복일 것이고, 無中生有로 없는 죄를 들씌우고 하는 비평(실은 비난, 혹음 무함)에 대해서는 적당히 사실을 규명하는 반비평도 필요할 것이다. 비난자를 일깨워 줄 책임도 있으니까. 어떤 무함은 극히 악렬한 영향을 일으킬수도 있으며 무함당한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필요에 따라 법정놀음도 불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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