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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문화상 대상 수상작품 <연변 사람, 안쪽 사람>
2020년 11월 12일 09시 21분  조회:640  추천:0  작성자: 청년생활
 
연변 사람, 안쪽 사람
 
리순화
 
 
 
안쪽에서 먼 친척이 다녀간 후, 엄마와 아버지는 대판 싸웠다. 태여나서 처음으로 목격한 부모님의 리얼한 싸움이였다. 엄마는 죽어도 여기서는 안 산다고 악청을 높였고 아버지는 이사를 해도 친척들이 모여사는 연변내에서 선택하면 안되느냐고 조곤조곤 타협하려 했다. 유순하기만 했던 엄마가 왜  히스테리하게 나올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안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순간, 아버지가 던진 베개가 구들목에 앉아있던 엄마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문가로 날아갔고 마침 란리난 줄 알고 뛰여들어오던 아래집 영순이 엄마의 몸에 맞아 떨어지면서 싸움은 질적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무서워 밖으로 내뺀 우리가 불빛 환한 집안의 동정에 기웃거리며 언 발을 동동 구른 걸 생각하면 시간이 꽤 흘렀던가 보다.
 
싸움이 있은 후 며칠 동안 집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우리는 엄마, 아버지의 눈치만 힐끔힐끔 살필 뿐 숨이 한죽은해서 지냈다. 가끔 큰오빠, 둘째오빠가 옹노로 토끼랑 꿩을 잡아와 신난 수렵이야기로 집안의 침침한 공기를 깨뜨렸다. 큰 가마솥에 푹 끓인 꿩고기가 숟가락을 타고 아버지의 국사발에서 큰오빠, 둘째오빠 국그릇을 넘고 넘어 맨나중에 무우 몇조각만 멀겋게 들여다 보이는 엄마의 국그릇에 담기면서 집안엔 또다시 잔잔한 평화가 깃드는 듯 했다.
 
그런데 집안의 분위기가 원상복구되나 싶은 착각도 잠간, 이상하게도 문턱이 닳도록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친척도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동네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평시와 달랐다. 이젠 배고픈 고생을 안 해서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기색이 력력한 얼굴도 있었고 이제 가면 언제 또 만나겠느냐며 애석해하는 얼굴도 있었다. 말없이 엄마의 손만 부여잡고 흔드는 영금이 엄마의 두 눈엔 눈물이 갈쌍갈쌍 고여있었다.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에서 이사를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안쪽으로 이사를 간단다. 안쪽이 어딘지는 몰라도 천리가 넘는 아주 먼곳이라고 했다. 천리, 그 때의 나에겐 하늘끝 같이 멀리 느껴지는 천문학적 거리였다. 신난다고 해야 할가, 설레인다고 해야 할가 그냥 둥둥 뜬 기분이였다. 시집 간 큰언니도 두살 된 조카를 데리고 왔다. 엄마를 도와 이불 빨래도 하고 손으로 한뜸한뜸 우리 동생들의 옷도 지어주었다. 엄마의 까만 비로도치마를 뜯어 옷깃과 팔소매를 단 꽃부리 솜옷은 내 몸에 꼭 맞았고 예뻤다.
 
며칠간 북적북적하더니 이사 날이 다가왔다. 큰 물건이라야 고작 장농 한짝과 이불 둬채를 먼저 화물로 부치고 허접하기 그지없는 홰보로 싼 옷보따리랑 필수품만이 사촌오빠가 고삐를 잡은 소수레에 실려졌다. 두 다리가 노끈으로 묶인 채 헌 포대기에 덮여서 머리만 내놓인 광주리 안의 닭 네마리는 어디로 실려가는 줄도 모르고 처음 타보는 수레에서 이게 웬 호강이냐는듯 “꼬끼요! 꼬끼요!” 하고 목청만 높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멀리 외나무다리 있는 곳까지 마을사람들이 따라 나섰다. 우리 집 7형제들의 딱친구들도 끼리끼리 나오다 보니 온 동네가 다 동원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하지만 눈물범벅에 울음바다로 된 리별의 광경 속엔 뒤집에 살던 큰아버지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다. 큰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앞뒤집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던 동생네가 고향을 떠난다는 소식에 노엽고 슬퍼서인지 아예 모습도 드러내지 않더니 팔을 젓는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바라본 마을 앞 우물가엔 큰아버지의 흰 두루마기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큰아버지는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다.
 
그렇게 고향마을을 떠난 우리 집 일행이 먼저 도착한 곳은 팔도 사진관이였다.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고 이어 조양천 친척집에 가서 하루밤을 묵었다. 이튿날 이른아침 조양천을 떠나 도문과 목단강에서 환승하며 1박2일이 걸린 이사길은 그야말로 고달픈 려정이였다. 소수레에서도 멀미를 하는 엄마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기차를 타서인지 우리 형제들은 길고 긴 완행렬차 려정에서 멀미를 하다 못해 반주검이 되는듯 싶었다.
 
그 때가 바로 1972년 2월, 내가 여덟살 되는 해였다. 개학이 되여 학교에 가서야 나는 그 곳이 흑룡강성 계동현 계림향 전진대대라는 것을 알았고 그 때로부터 우리 집은 ‘연변 집’, 우리 식구들은 ‘연변 사람’으로 불리웠다.
 
준비가 다되여있으니 오기만 하면 된다던 먼 친척의 말은 한낱 바람을 불어넣은 ‘고무풍선’ 격이였다.
 
며칠간 친척집에 얹혀 살면서 대충 손질해서 이사한 집은 마을에서 동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량쪽에 부엌이 있고 그 부엌에 방들이 딸려있는 한족식 구조였다. 동쪽 켠 큰방에는 왕씨 성을 가진 한족이 아들 셋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모래구멍에 동뚝 터진다고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던 우리 방엔 바람이 무랍없이 드나들었다. 추위는 연변보다 훨씬 혹독했고 맵짰다. 밤이면 천정 복판에 달려있는 희미한 전등알이 북풍에 시계추처럼 흔들거렸고 아침에 깨여나보면 아버지의 담배연기와도 같은 입김이 나의 입에서도 몰몰 피여올랐다. 워낙 방이 작다보니 여덟 식솔이 촘촘히 누우면 코와 코가 맞대일 지경이였다. 어른들끼리 말씀이 통하더니 큰오빠와 둘째오빠는 밤이 되면 이부자리를 들고 동쪽 한족집에 더부살이로 자러 갔다. 헌데 혈기왕성한 청년들에게 차례진 것은 발편잠이 아니라 한낱 미물들의 세례였다. 벼룩이랑 이가 제대로 신고식을 치러주었던 것이다. 너무 긁어 굴뱀이 죽죽 간 팔을 내보이며 하는 오빠들의 볼 부은 소리에 엄마는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며 찍소리도 내지 못하게 당부했다. 아버지는 동네에 나가 하얀 분필 같은 이를 잡는 약을 사왔다. 옷 혼솔기를 따라 죽죽 그어서는 밤이면 밖에 내놓았다. 령하 30여도를 감도는 혹한과 화학물질 반응의 힘은 컸다. 며칠씩은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때 우리는 저녁식사가 끝나면 초저녁부터 자성의 마력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조금이라도 온기가 있는 부엌 쪽으로 몰려들었다. 어느 날 저녁, 떠들썩하는 소동소리에 엄마의 무릎을 베고 살풋이 들었던 잠이 깨였다.
 
“연변치가 왔다는데 어디 한번 좀 보자!”
 
웅성웅성한 말소리 속에서 들려온 웨침이였다. 마치 전쟁포고와도 같았다.
 
동쪽 칸에서 오빠들이 뛰쳐나와 부엌에서 부삽이랑 부지깽이를 찾아들었다.
 
아버지는 그러는 오빠들을 제지시키고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아버지를 따라 줄레줄레 들어온 불청객들은 눈이 다 풀리고 혀도 꼬부라든 장정들이였다. 보러 와줘서 고맙다는 아버지의 태도가 예상외로 부드럽고 성근해서인지 아니면 쟁기를 들고 서있는 오빠들한테 주눅이 들어서인지 불청객들은 쭈빗거리며 인사를 왔노라 말했다. 그러면서 흘끔흘끔 우리 식솔들을 훑어보더니 봤으니 인젠 돌아가겠다면서 서둘러 문밖을 나가버렸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마을에는 우리 먼저 연변에서 이사 온 집들이 몇호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논물관리원으로 초빙되였다면 그 집들을 받은 리유들도 따로 있었다. 헌데 내세웠던 특장들이 한낱 이사 오기 위해 만들어진 허풍으로 들통나면서 연변 사람들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신뢰나 믿음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마음에 내키면 ‘연변 집’, ‘연변 사람’이라 불렀고 조금만 기분이 잡치면 ‘연변치’, ‘연변 깍쟁이’라고 수군거렸다.
 
날씨가 조금 풀리자 생산대에서는 탁아소 겸 창고로 쓰던 곳을 정리해서 내놓았다. 우리는 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는 제2대에 속했으므로 마을사람들은 우리를 ‘2대 창고집’이라 불렀다.
 
이런 사정을 친척으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을 앉혀놓고 행실에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웃쪽 항렬의 오빠들과 언니들은 이미 철이 든 나이였기에 별탈 없이 잘 적응했다. 문제는 발개돌이로 소문난 셋째오빠였다. 그런 오빠였기에 ‘연변치’라는 호기심과 배타심에 푹 젖은 주위의 도발에 굴복할 리 없었다. 반항했고 이기려 했다. 한번은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타박타박 돌아온 셋째오빠의 행색이 말이 아니였다. 애간장을 끓이던 엄마가 와락 끌어안고 만져보니 셋째오빠의 온몸은 성한 데 없었고 머리는 속 썩은 호박마냥 물렁물렁하게 물러있었다. 엄마의 지꿎은 추궁에 셋째오빠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날도 머리 하나는 더 큰 동네형들과 시비가 생겼는데 먼저 한매 치고 달렸단다. 열살을 금방 넘긴 애가 쫓기워서 10여리 논밭을 달렸고 결국 붙잡혀서 이 꼴이 되였단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별 하나 없는 캄캄한 창 밖만 응시할 뿐이였다.
 
셈이 들지 못했던 나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이사를 와서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지 리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싫었던 무우밥, 밥이라 하기엔 무우가 너무 많은, 아무리 헤집어도 쌀 몇알 건질 수 없는 무우밥을 먹지 않아 좋긴 했었지만 피난민으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하는 진짜 리유를 몰랐다.
 
하루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와 대판 싸우면서까지 견결했던 엄마의 선택에 회의와 실망을 느꼈고 앞날에 대한 묘망함마저 느꼈다.
 
그래도 서러움과 불편함만 있은 것은 아니였다. 생산대에서는 우리의 사정을 헤아려 움에 저장했던 무우며 배추며 감자 같은 것을 내주어 바쁜 고비를 넘게 해주었고 맘씨 고운 박아바이는 금방 이사해서 식량이 없는 우리 사정을 헤아려 목릉강을 건너 멀리 동해란 한족 곳에 가서 밀가루 한포대를 메다 주었다. 이웃들도 그릇에 움 안의 김치랑 함께 선량함과 푸근한 인심을 베풀었다.
 
계림향은 소분지모양의 소기후성 제2적산온도대에 위치하고 또 흑토여서 벼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지리적 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벼재배에 합리한 조건 때문에 청정부의 봉금령 해제로 로씨야로부터 흥개호, 백포하, 료하 등지에 살고 있던 조선족들과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연변, 심양 등지에 정착했던 조선족들이 입소문을 타고 모여들었다. 1956년에 조선족향으로 성립되였지만 우리가 이사를 갈 때까지도 벼모내기는 아직 보급되지 않고 있었다. 무연히 펼쳐진 논밭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봄이면 쎄레질한 논밭에 직접 벼종자를 쥐여뿌리는 산종이였다. 가을이면 또 낫날만 해도 한메터는 될 것 같고 삽자루보다 더 긴 자루의 낫을 잡고 서서 휘휘 휘두르며 벼를 벴다. 쏘련에서 새를 벨 때 쓰는 낫이라고 했다. 벼는 베는 즉시 묶었는데 벼단이 어찌나 큰지 우리는 한단 들기도 버거웠다.
 
새 고장에 이사 간 아버지는 더는 고향에 계실 때처럼 시름시름 앓던 분이 아니였다. 논밭을 갈고 물이 들어오는 때부터 시작하여 매일 푸름한 새벽에 한번, 오후에 한번, 하루에 두번씩 꼭꼭 논밭을 둘러보며 논물을 조절하고 논고를 바로잡았다. 마을사람들은 아버지에게 존경심을 품기 시작했고 소대간부들도 농사일에 관해 자주 아버지를 찾아왔다.
 
작년 봄에 큰오빠가 뇌경색으로 한국 일터에서 쓰러졌다. 여름방학을 타 큰오빠를 보러 갔다가 한국에서 일하던 둘째오빠와 회포를 나눈 적이 있다. 둘째오빠는 암만 생각해도 아버지가 논물관리원 일을 너무나 잘하신 것이 궁금하단다.
 
사실 젊어서 무장부에 출근했던 아버지는 실농군이 아니였다. 몸이 허약해 전역하면서 철로, 은행, 림업 등 좋은 직장도 마다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마을사람들의 추천으로 촌장, 지부서기로 지냈지만 시름시름 앓음자랑만 하다보니 밭일은 별로 하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께서 마을사람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고 주변 한족마을에까지 초빙되여 가서 논물관리법을 보급했으니 둘째오빠의 궁금증을 유발하기엔 충족했다.
 
나는 한 마을을 거느렸던 촌장, 지부서기로서의 책임감과 연변에서 이사를 갈 때 소중히 품고 갔던 늘 창턱에 놓여있던 보풀진 벼재배에 관한 책 그리고 논두렁에 찍힌 아버지의 장화발자국만이 그 답을 알고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땅이 좋고 관리를 잘한 덕분인지 전진마을에는 흉년이 별로 없었다.
 
얼마 안되여 산종은 직파재배로 바뀌였고 모내기로 이어졌다.
 
아버지와 싸워 이겨서 기어이 고향을 멀리 등진 엄마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사는 것 같았다. 울안에는 늘 닭, 오리, 게사니들이 치마폭에 감기며 목청을 비겼고 돼지굴에는 피둥피둥 살찐 돼지가 뒤뚱거리며 저들만의 하모니를 만들어갔다. 덕분에 엄마의 손은 봄부터 비술나무잎과 꽃을 훑고 능쟁이, 고들빼기, 쇠비름 같은 돼지풀을 뜯느라 거무죽죽하게 갈라터졌다. 주름진 얼굴과 목덜미에도 늘 먼지가 고랑을 이루며 까맣게 뒤덮여있었고 땀에 짓무른 두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여있었다. 혹여 학교 뒤길로 자기 몸체보다 더 큰 돼지풀마대를 지고 꼬부장하게 몸을 말고 지나갈 때면 우리 눈에 뜨일세라 머리수건을 푹 눌러쓰고 걸음을 재우치군 했다.
 
안쪽에 쌀이 많다고 해도 생산대에 공량을 바치고 난 후 정량제로 쌀을 분배하다보니 보리고개 때면 식량이 모자라는 집들이 많았다. 우리 집은 남자들이 많다보니 사정이 심각했다. 하지만 연변과 다르다면 쌀독이 빌 쯤이면 밀을 재배하는 한족 곳에서 밀가루를 먼저 가져다 먹고 가을에 입쌀로 환산해주었기에 진짜로 배를 굶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햇쌀이 나올 때까지 이어지는 밀가루 음식에 인츰 싫증이 났다. 연변에서 밀가루음식을 별반 먹어본 적 없었는데 엄마의 음식메뉴는 다양했다. 찐빵이며 기름을 발라가며 밀어서 만든 기름떡이며 양배추소 만두, 애호박 칼국수, 수제비 등등 다양한 메뉴는 밀가루에 대한 싫증이나 거부감을 대폭 줄여주었다. 특히 엄마가 만든 찐빵은 이웃에 소문날 정도로 폭신폭신하고 달콤했다. 겨울이면 또 싸래기로 만든 엿과 쌀을 튀겨 만든 과줄이 창고에서 설 간식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숟가락에 주먹 만큼씩 돌돌 감아먹는 엿과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과줄은 간식이 별로 없던 세월에 심심했던 우리의 입을 달래주고 동년의 추억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공대는 유난했다. 허약한 몸으로 논밭을 둘러보는 여름이면 볶은 찹쌀 미시가루와 게사니엿은 아버지의 원기보충제였다. 가득 달여서 큰 독에 넣어 뒤울안에 놓은 옥수수감주는 찌물쿠는 한낮에 논밭을 둘러보고 온 아버지의 갈증을 시원히 해소시켜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발목도 잡았다. 면목도 잘 모르는 점잖은 중학교 선생님들마저도 머리를 긁적거리며 소문을 듣고 왔노라며 능청스럽게 한사발씩 얻어마시고 갔으니 말이다.
 
엄마의 감주를 마셔본 사람들은 연신 “연변 감주 맛 참 좋다!”라며 엄지를 척 내밀군 했다.
 
하지만 집안팎이 북적북적하다가도 정적이 흐를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릴 때였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누워서 부르는 아버지의 노래소리가 들려오면 티격태격하던 나와 셋째오빠도 어느새 조용해졌다. 〈눈물 젖은 두만강〉, 〈물방아 도는 내력〉, 〈홍도야 울지 말라〉 등 노래들은 우리가 떠들기에는 너무나도 구슬펐고 돌아앉아 눈굽을 찍는 엄마를 본 후부터는 엄마가 바락바락 우겨서 이사한 진정한 리유도 아렴풋이 알게 되였다.
 
내가 네살 무렵, 그 야속하기만 했던 시대에 아버지는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하루밤새에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죄인’으로 되였다. 위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분이 남의 집 뒤고방에 갇혔고 세상과 격리되였다. 입당지원서를 쓰기 직전의 중점발전대상이였던 큰언니도, 마을에서 출납으로 있던 둘째언니도 련루되였다. 사람들은 온역을 피하듯 우리 집을 멀리했고 촌장, 지부서기라며 하루가 멀다 하게 드나들던 사람들도 아버지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집에까지 찾아와서 란동을 부렸다. 엄마를 잃어 앵앵 울기만 하는 갓난 자식에게 자신의 한쪽 젖을 선뜻 물린 우리 엄마를 은인이라며 드나들던 집주인마저도 차디찬 위를 달래줄 따뜻한 물 한모금 요구한 아버지의 간절한 청을 가차없이 외면해 버렸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무죄로 풀려나고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땐 엄마는 이미 정들었던 고향과 카멜레온마냥 빠르게도 변하는 인간의 야박한 인심에 환멸을 느낀 뒤였다.
 
항일전쟁시기, 병풍산일대를 누비며 항일운동을 했던 하나밖에 없는 친정오빠를 일본놈들 총에 잃고 착하고 선량하게만 살았던 우리 엄마에게 문만 나서면 마주쳐야 할 그런 야박한 사람들의 행위는 넘지 못할 산이였고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의 벽이였다.
 
마침 먼저 안쪽으로 이사 갔던 먼 친척이 놀러 왔다가 거기로 가면 배고픈 고생도 없이 살기 좋다고 입바람을 불어넣자 서두에서 그린 부부싸움이 재현되였던 것이다.
소학교와 초중을 전진촌에서 마친 나는 학기마다 ‘3호학생’의 영예를 안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이였다. 그 덕에 아버지는 졸업식 때마다 학부모대표로 강당에 올라 연설을 했고 나는 가문의 자랑으로 여겨졌다.
 
그러던 내가 계림에 있는 고중에 입학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초중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영화를 방영할 때면 엄마, 아버지의 중간에 앉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하학하면 책가방을 팽개치기 바쁘게 엄마를 찾아나서던 나였다. 그런 응석둥이가 계동현의 인재들이 군림한 계림조선족중학교에서 기숙사생활을 했으니 주눅이 들고 적응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였다. 그 땐 엄마가 아무리 돼지를 열심히 키워도 대집체시기에 식솔이 많다보니 2주에 2원씩 차례지는 돈도 아름찬 금액이였다. 생활비를 가지러 왔다가 빈손으로 학교에 돌아갈 때도 있었다. 짝꿍이랑 5전짜리 국 한그릇을 나눠서 고추장이랑 짠지로 끼니를 에우다보니 워낙 심했던 빈혈로 하여 나는 늘 두통과 치통에 시달렸고 성적은 수직하강했다. 더우기 린근에 소문 나게 뽈을 잘 찼던 셋째오빠까지 체육특장생으로 복학하게 되면서 집안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으로 나의 령혼심처에 심어졌던 꿈나무는 뿌리가 흔들리고 가지가 메마르며 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초중에 돌아와 사범시험을 치른다는 어느 동년배를 만나면서 내 인생 최초의 선택을 하게 되였다. 탈출이였다. 난 인츰 연변 개산툰림장에 출근하는 큰언니한테 연변에 가서 사범시험을 치고 싶다는 편지를 띄웠다. 봄아지랑이를 타고 꽃편지가 인츰 날아왔다. 이불짐을 싸들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말없이 침묵하던 아버지는 “꼭 가야 되겠냐?”며 물었다. 메말라가는 가슴에 용케도 푸른 꿈을 다시 지핀 나는 전선에 나가는 녀전사마냥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몸이 허약한 나는 무조건 공부로 성공해야 된다며 선뜻 동의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꼭 십년 만에 또다시 연변으로 오게 되였다.
 
도문역 플래트홈에서 허둥거리다가 발을 빗디뎌 기차에서 허망 뚝 떨어진 나를 두 팔로 꼭 안아준 큰언니의 품에 안긴 그 때로부터 나는 또 ‘안쪽에서 온 애’라고 불리웠다. 그 때는 연변을 제외한 길림지구, 흑룡강성, 료녕성에 사는 조선족들을 다 ‘안쪽 사람’이라고 불렀다. 애들은 우호적으로 나왔고  선생님들도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아니면 내가 태여난 고향이라는 감회나 확신과 긍지로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연변의 고향은 푸근했고 정다웠다.
 
운명의 안배였을가, 그 해 시험을 코앞에 두고 개산툰진 광개중학교의 사범학교명액이 취소되였다. 인젠 진짜 공부를 포기할 때가 왔나 보다고 혼자 죄여드는 가슴을 집어뜯고 있을 때, 림장의 운전사였던 큰형부가 어느 날 해방표 자동차에 새 비둘기표 자전거 한대를 싣고 왔다.
 
“네 거다. 아직은 나이도 어리니 계속 공부해라!”
 
계속 공부해라는 큰형부의 말씀이 나의 심장을 울렸고 그후의 나의 인생을 새롭게 그려주었다. 또한 자신이 6형제 맏이고 큰언니가 7형제 맏이로 우로는 량가 부모님들, 아래로는 올망졸망한 동생들, 어린 조카도 한창 공부할 때였음에도 매달 35원 월급에서 빨락빨락한 5원짜리 지페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 용돈 덕분에 나의 어깨에는 은근히 힘이 실려있었고 극성스런 큰언니의 살뜰한 보살핌으로 건강도 학습성적도 제자리를 찾았다. 뜻 대로 나와 가족의 로망이였던 대학꿈도 이루었고 공무원생활 10년에 일본류학도 가게 되였다.
 
또한 심층 무의식에 깔린 “계속 공부해라!”는 그 말씀이 편달로 되여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에 시작한 소시적 문학꿈을 현실에서 그리며 오늘도 책과 씨름하고 있다.
 
헤아려보니 루계로 46년 세월을 연변에서 산 나는 명실공히 ‘연변 사람’이다. 또한 인생의 가장 보귀한 10년을 흑룡강성 계림의 산천초목과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사춘기의 곤혹과 방황과 불안마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나는 어쩌면 ‘안쪽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안산병원에서 병간호로 지친 큰올케를 대신해 큰오빠를 며칠 간호하면서 많은 간병인들을 만났다. 대부분이 중국에서 간 조선족들이였다. 24시간 동안 환자침대 아래 낮은 장의자에서 먹고 자면서 피곤과 서러움과 싸우고 있는 그들은 그 누군가의 엄마이고 할머니들이였다. 보기만 해도 공포를 자아내는 모니터를 단 첨단기계와 련결된 선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찌르륵찌르륵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섹션소리, 기저귀를 갈 때면 카텐 사이로 새여나오는 병원 특유의 소독냄새에 섞인 퀴퀴한 냄새가 시각과 청각과 후각을 마구 자극하며 온몸을 오그라들게 했지만 그런 것에는 마비된듯 모든 것을 척척 해내는 그 분들은 육체는 가냘픈 억척 녀인들이였다.
 
큰올케와 면목 있는 흑룡강사람이라며 누군지 모를 분이 밥 한공기를 가져다 창턱에 놓았다. 또 처음 본 얼굴임에도 중국에서 왔다니 탕비실에서 휴식날 집에 가서 만들어왔다는 된장국을 덜어주는 인자한 아주머니도 계셨다. 간병인 밥이 따로 나오지 않는 형편에서 자기 것을 덜어 베풀어주는 특유의 배려였고 감정표출이였다. 타국에서 느끼는 온정이였다. 그 곳에서 나는 연변 사람이고 안쪽 사람이기 전에 우리는 먼저 다 같은 하나의 민족임을 실감했고 집을 떠나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애환을 느꼈다. 고국이라고, 같은 백의민족의 후예라는 남다른 동포애를 안고 한국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조금은 초라하고 조금은 가난하고 또 조금은 억양이 투박하다는 리유로 외면과 편견을 받으며 ‘오리엔탈리즘’의 과녁으로 되여 자기 민족의 정체성 혼란에 빠진 사람들, 3D업종의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터에서도 꿋꿋이 자아를 완성하며 조선족의 자존심을 굳건히 지켜가는 우리 오빠, 언니 같은 사람들, 그들은 정녕 모두 된장과 김치를 좋아하고 흰옷을 즐겨 입는 조선족들이였다.
 
안쪽에서 산 세월이 연변에서 산 세월보다 더 긴 오빠, 언니네는 자신을 완전히 흑룡강사람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면서 그 지역의 인품이나 뚝심을 극찬하기도 한다. 북방사람들이 호방하고 남방사람들이 섬세하다는 중국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평판과 별반 다름이 없다. 나는 ‘쌀에 티’ 격으로 산재지역에 모여 살면서 같은 혈통이라는, 같은 전통과 같은 정서를 지켜간다는 민족적 자부심으로 생긴, 더우기는 그 당시 조금은 쌀이 넉넉한 고장에서 생긴 인품이, 집단 무의식이 그 지역 문화나 습관, 사람을 만들지 않았을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세상엔 아름다운 리별이란 없다. 또한 처음부터 떠나고 싶은 고향도 없다. 일제의 망국노가 되지 않기 위하여, 굶어가는 자식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쪽박 차고 두루마기 휘날리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이 땅을 개척했듯이 우리 엄마가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내가 가슴 속에 키웠던 꿈을 그리며 정든 고향과 부모님을 떠났듯이 떠남에는 모두다 리유가 있다. 자식과 가족의 좀더 나은 삶을 위하여, 자신의 푸른 꿈의 실현을 위하여 리별과 떠남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세계는 하나로 되고 시야는 글로벌적으로 넓어져있는 오늘, 우리의 발자취는 지금 세계 방방곡곡에 소금처럼 스며들어있다. 또한 리별과 떠남은 인젠 우리 조선족들만의 특허가 아닌 글로벌 전체의 이동으로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진대 우리 후세들에게 고향이라는 이미지는 더는 연변이나 안쪽에 국한되여있지 않다. 다만 그 뿌리가 이곳에 내렸기에, 선조의 뿌리가 이곳에 내렸기에 아무리 멀리 날아갔다가도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자신의 뿌리가 묻힌 곳을 동경하고 또 날아온다.
 
연변에서 살 때, 50세를 넘기지 못한다는 예언을 받았다는 아버지는 안쪽물이 좋아서일가 연변 사람, 안쪽 사람으로 혼연일체를 이루며 마을 제1회 독보조 회장을 력임하였고 73세를 일기로 막내 외손주까지 보고 돌아갔다. 이방인이라는 편견 속에서 자식들을 거느리고 치렬하게 살았던 엄마도 그 편견이 없어지는 세상으로 마음의 안식을 찾았다. 오빠, 언니들 중 셋도 그 하기 힘들다는 한동네 혼사로 연변 사람, 안쪽 사람 대통합을 이루었다. 인연의 아이로니함이랄가 밤중에 들이닥친 불청객 중 주모자 분이 그 날 참한 둘째언니를 곁눈질해보고 선손을 써서 자기의 처남을 소개하여 성사시켰고 10여리 논밭을 달려 셋째오빠를 혼내줬던 동네오빠가 셋째오빠의 처남이 되였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으로 고향을 멀리 떠났지만 병풍산기슭에 뼈를 묻은 친정오빠의 원혼을 기리며, 큰아버지를 옆에서 돌보아드리지 못한 미안함, 그리움과 함께 엄마는 로년에 고향산천과 고향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도 했다. 세월이라는 령단묘약 앞에 넘지 못할 산이며 마음의 벽은 구름이 되고 비로 되여 넘어갔고 허물어졌던 것이다. 하물며 그 사람들도 한낱 어지러웠던 그 시대의 희생양이였음에랴!
 
유감스럽게도 멀미가 심했던 엄마는 고향을 떠난 후 다시는 연변땅을 디뎌보지 못해 우리 자식들의 영원한 한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손들이 번창하고 가정이 소문 나게 화기애애했으니 그 때의 엄마의 소박한 소망은 실현되였고 엄마의 그 선택이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청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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