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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향긋함…
-주향숙의 시와 수필
우상렬
주향숙은 우리 문단의 재녀다.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다재다능하다. 이번에 시 11수에 수필 4편을 선보여 눈이 즐겁다. 눈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향긋함 속에 잠긴다.
주향숙의 시를 보자.
그녀의 이번 시는 일단 농촌 관련 시들이 돋보인다.
농촌 부모님을 노래한 시들을 보자.
<당신>은 바로 ‘당신’으로 대변되는 부모님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모님은 너무도 초라하다.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다. “세상은 당신의 얼굴을 모르”지 않은가, 는 한평생 “자꾸만 낮게 엎드려” 땅만 바라보고 농사만 지어온 풀뿌리인생들이다. 그들은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며 “순하디 순하”게 살아온 인생들이다.
<꽃>도 부모님의 초라한 농부 일생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 한번 / 화려한 꽃들을 바라본다거나 /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꽃처럼 향기로운 세상 앞”에 “언제나 부끄러웠고 편안하지 못한” 비참한 일생이다. 이에 시적 자아는 자식된 도리로 더없는 안스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꽃들의 향기가 / 서서히 부서져가는 시간 속에 진동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평생 농사짓다가 세상을 뜬 부모님에 대한 다함없는 애도와 추모의 표현이리라!
<발자국>에서도 부모님들은 농사일을 운명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벽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었다. 농사일은 “지친 시간의 무게”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헛일처럼 슬프고 / 존재하지 않는듯 허무하다”. 별로 남은 것이 없고 허무맹랑하기만 하다. 농부 일생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여라!
주향숙의 이런 농부시들은 물론 자기의 부모님들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부모님들의 노래가 되지 않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부모님들은 바로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그녀의 다른 농촌 관련 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소나기>에 나오는 엄마가 우리 엄마가 아니고 우리 농가집 생활이 아니란 말인가. 이 시는 지난 세월 땡전 한잎 없이 빠듯한 우리네 농가집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얼음과자 하나 살 돈조차도 없어 우리 엄마들이 ‘쌀을 퍼담고 나가’ 바꿔먹던 시절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얼음과자를 바꾸자 소나기가 쏟아져 허무맹랑할 때도 있었다. 자연도 가난한 농가집 살림을 놀리는듯하다.
주향숙은 신사숙녀의 숙녀에 도시녀의 깔끔함과 인테리의 지적인 멋이 풍기지만 그녀는 뛸 데 없는 농부의 딸이다. 그녀의 마음이 농촌에 가있고 농민의 희로애락과 같이 뛰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가을’이 그녀를 속상하게 했다면 ‘가을’은 또한 그녀를 얼마나 기쁘게 했던가. <어떤 가을>, 어떤 가을의 비극이 연출된다. 그것은 주책할 수 없는 무정한 자연재해가 “희미한 희망조차 뭉텅뭉텅 베여내”고 있다. 그래서 헛되이 땀방울만 흘린 것이다. 따라서 쌀 한톨에 목숨 건 농부인생에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비굴하”고 가련하지만. 자연의 조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농사군의 비애가 흘러나온다. <가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즐거운 만풍년의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이삭 패는 / 소리가 유정하”고 “넉넉하게 넘실대는 / 금빛 들판이 향기롭”거늘 만풍년! 여기에 “당신의 이마를 만지는 / 밝은 해살이 눈부시다”. 천인합일의 경지! “한켠에서 풀을 뜯던 소가 / 아무도 모르게 씩 웃는다”. 미물도 유정타-“그 어데라 없이” “뭉클”한 이 가을이 정답다.
다음 주향숙의 시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시를 보자.
<어떤 아침에>, 사랑하는 님과의 리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기억들을 핥으며 눈물에 젖”고 “가슴 저리”는 비극적인 기나긴 그리움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입 맞출 수 있을가”, “저 바다에서 껴안을 수 있을가”로 상상을 날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다. “내 생은 몽유병 환자처럼 / 먼 기다림의 그늘 속으로 홀로 걸어들어가”지 않던가.
<은밀히>,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 은밀히 그리워하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함께 밥을 먹었던 아름다운 기억이 그리움의 모멘트가 된다. 이 공식共食은 하나됨의 원형적 상징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너는 오늘 무엇을 먹을가”, “이제 다시 마주보며 / 밥을 먹을 수 있을가”로 은밀히 추측하고 기원해본다. 그런데 가망이 없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식욕마저 없어진다. “내가 밥을 먹는 것이 / 기적이라 불리여져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결론적으로 ‘나’는 “밥을 날마다 먹을”지라도 “은밀히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우의 두 사랑시가 리별이나 잃어버린 사랑의 비애를 읊었다면 <꽃으로 피고 싶다>는 좀 이색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꽃으로 피고 싶다>, 바로 사랑하는 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려는 마조히즘적인 녀심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시적 자아는 어쩐지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을 사랑하는 님에게 “스며들”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아픔들이 / 내 가슴 깊이로 뿌리를 내리”게 한다. “그리고 깊은 슬픔은 / 짐짓 모르는 척” “너의 앞에서 / 나는 꽃으로 활짝 피여났으면 좋겠다”고 기원한다. 결국 “알록달록한 꽃잎으로 물들”어 “네게 즐거움이 되고 싶”으며 “너의 곁에서 / 너랑 더불어 웃고 싶”은 것이다. 전형적인 마조히즘적인 사랑. 그것은 어쩌면 사랑의 최고경지!
주향숙의 시에는 트라우마-상처의 문제도 등장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입은 그 어떤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다. 인간은 살다 보면 이런 상처에 로출되기가 쉽다. <푸르른 기억>은 지꿎은 상처-슬픈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기억은 “돌이 되”고 “부서져버려”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 꼼짝하지도 않”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억이 터지고 / 푸르게 푸르게 번지는 슬픔”을 주책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오랜 기억은 스스로 불타 / 그 푸른 연기로 시간을 덮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처의 뒤죽박죽이고 원래 “몸속에 그토록 뜨거운 것이 / 고여있은 줄 이제 알았다”. 이것은 무의식적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에서 제목 <푸르른 기억>은 “푸르게 푸르게 번지는 슬픔”, “그 푸른 연기”와 련결이 되면서 하나의 력설이 된다. 이 시는 정신분석학적 원리를 기저에 깔고 있다. 인간은 심한 상처를 입어 어쩔 수 없게 되면 심리방어기제를 동원하여 그 상처를 무의식 속에 깊숙이 박아두며 잊어버린다. 그런데 그 상처는 자기도 모르게 수시로 튀여나와 당사자를 괴롭힌다. 인간은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럴진대 상처에 대한 평상심도 가질 만한 법.
<오랜 시간 속에>도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입게 되는 상처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상처는 “맨살 / 맨가슴 / 맨정신”, “다시 자라”가 상징하듯이 심하고 억울하며 덧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아프더라도 참고 견디노라면 그것은 결국 축복으로 돌아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어 기껍다. 그래 “피냄새 나는 꽃들”이라도 평화의 꽃이 아니더냐.
전반적으로 볼 때 주향숙의 시는 밝다기보다 어두운 쪽이 더 짙은 편이다. 그렇다 하여 비관실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성숙된 녀인의 아련한 농촌 노스텔지어이고 은밀한 사랑의 멜로디이며 아픈 상처의 치유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문학의 영원한 주제들이다. 그래서 그 향긋함도 영원한 것이다.
그녀의 시는 순연한 사실주의로 흘렀다. 상징으로 대변되는 현대시와는 다르다. 그녀의 시는 아무리 사실주의적이라 하지만 아직 그리 여물지 못한 작품들이 있다. 너무 직설적이고 빤한 게 문제다. 따라서 <은밀히>의 경우 은밀히 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시의 내재적 론리나 맥락도 긴밀하지 못하거나 어색한 작품들이 있다. <소나기>의 경우 얼음과자 부분과 소나기 부분의 련결은 그 한 본보기가 되겠다.
주향숙의 수필을 보자.
그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고. <나는 너의 밖에서>는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겉모양을 보면 “내가 알고 있고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어진다”. “내가 속한 단체방만 해도 40여개가 된다는 게 좀은 놀라울” 정도로 요란하다. 그런데 “곁에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다”. 혼자인 느낌만 갈마든다는 것이다. 왜서? “사람마다 장사군이 되여있다”. 그래서 리해에 따른 리합집산의 존재들이다. “몇십명이 모인 그룹에서 일여덟명이 다시 그룹을 만들고 그 속의 서너명이 다시 그룹을 만들기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내가 어딘가에 간신히 속해있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다시 또 배제되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감상에 젖기도 했고 야릇한 배신감에 가슴이 긁히기도 했다”.
사실 인간은 진정을 추구하고 지기를 구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녀인은 자기를 예뻐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한다士为知己者而死,女为悦己者而容”는 말이 생기고 “이 한 생에 지기 하나만 얻으면 만족이여라人生一世得一知己者足也” 하는 말도 생긴 줄로 안다. 이 수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누군가의 시구처럼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그래서 자꾸 새로이 ‘우리’를 만들어가지만 갈증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인간은 “늘 혼자로 남을 수 밖에 없었고 그 허전함을 견디려고 또 그룹을 만들 수 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 속에는 은밀한 관계들이 배타적인 성격을 띠며 존재해있다. 서로를 배제하는 일이 우리의 존재의 일부가 되여버렸다”. “그러나 한편 내가 배제한 인간에 대한 혹은 나를 배제한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앓는다는 것은 슬픔이면서 다행한 일이다. 서로의 언저리에 가닿기 위해 안깐힘을 쓰며 시간을 더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모순적인 존재이면서 결국 “배제하고 배제당하여 자신 하나로 졸아든 세상 속에서 나는 나에게 문자를 보내”는 마스트베이션적인 가련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 수필은 어쩌면 유럽 현대철학을 개척한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고슴도치이야기를 풀이하고 있는듯도 하다.
이를테면 추운 겨울 두마리 고슴도치가 있었는데 서로 추우니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가게 되였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서로의 가시에 찔리우게 되였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서로 떨어지게 되였다. 그런데 또 춥다. 그래서 또 가까이 간다. 그런데 또 찔리운다. 그래서 또 떨어진다… 우리 현대인간들의 비극을 이렇게 형상적으로 풀이한 글이 또 있단 말인가.
<나는 너의 밖에서>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비극을 수필적으로 풀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수필은 우리 현대인간들의 비극적 실존을 풀이하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고 하모니의 희극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마지막에 “한 육체는 다른 한 육체로 체온이 흘러야 한다. 한 가슴은 다른 한 가슴에로 사랑이 흘러야 한다. 한 령혼은 다른 한 령혼에로 갈망이 흘러야 한다. 그렇게 지닌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로 흘러서 외로움을 끝내야 한다. 그 흐름이 멈추지 말아야 우리는 결국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이다.”로 결국 우리 인간 사이 가장 바람직하면서도 중요한 소통과 화합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있다. 좀 공허하기는 하지만.
이 수필은 제목에서 뿐만 아니라 “나는 지금 혼자다.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온듯이 혼자가 되였다.”에서 보다 싶이 직접 주제로 돌입하는 방식开门见山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외로’운 비극적인 반反주제를 종횡무진으로 풀어가 강한 충격파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 반反주제에 반해 우리 인간 사이 소통과 화합의 긍정적인 정正주제를 토로하고 있어 강한 인상을 주며 설복력을 기하고 있다.
<하루를 덥히며>는 우리 인간 사이 진정한 사랑의 교감을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을 주는 존재이고 사랑받는 존재로서 진정어린 사랑이 흘러넘치는 세상을 만들자는 데 있다. ‘나’의 깨달음을 보자. “사랑은 가슴을 열게 하고 가슴은 사랑을 향해 열리는 것이였다.” 그런데 “사랑을 향해 가슴을 여는 일도 또 누군가를 향해 사랑을 주는 일도 그것이 서로 빗나가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져서 온전히 나누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서로 성실하게 주고받아들이면 되는 일”로서 그것은 간단하기도 하다. 한마디로 그것은 사랑주의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고 “사랑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으며 결국 살아가는 일 자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하루를 덥힐”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고 복되게 하는 감로수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늘 상대를 향해 가슴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다가서는 누군가를 노려보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심각하게 사고한다. 그리고 어떤 선입견을 내세우며 딱딱한 벽 뒤로 몸을 피하거나 멀찌감치 도망을 간다. 가끔은 망설이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의심하고 배척하기도 한다. 사랑을 받아들일 줄 모르며 그런 준비가 되여있지 않다. 불의와 불신임의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상대를 탓하고 미워하기 전에 우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로 우리 스스로의 반성의 자세를 촉구한다. 이를테면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웠는지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였는지 차겁지 않고 따뜻하였는지 불안하지 않고 확고하였는지 거짓되지 않고 진실되였는지…” 하고. 이렇게 할 때 우리 살아가는 세상은 사랑이 충만한 현실적인 인간의 락원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이름 모를 풀꽃’과 ‘나’ 사이 사랑의 인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인간과 인간 사이 사랑의 하모니를 풀이해내고 있다. 이 수필은 “사랑을 향해 가슴을 열 줄 알고 고맙게 받아주고 사랑받는다는 행복에 몰입할 줄 아는 령혼을 가진 풀꽃”, “늘 그 자리에서 온힘을 다해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서는 태양” 등 자연과 교감하며 거기서 한수 배우는 경지를 창출하고 있다.
<서로를 위한 약속>은 약속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여기에는 본인에 얽힌 약속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약속론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상생활적인 약속, 세속적인 약속, 영원한 약속, 일시적인 약속, 리기적인 약속, 리타적인 약속, 거창한 약속, 시시한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약과 독을 비롯하여 속속들이 론의된다.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장 바람직한 ‘약속’ 하나를 건져낸다. “언제 어디서든 잘 있는다고 약속할게”. 그래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서로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지 않겠는가.
이 수필은 역시 开门见山식으로 첫 시작에 약속에 관한 10개의 물음을 라렬하며 분위기를 조성하고 독자들을 몰입시킨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약속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아기자기, 조곤조곤 풀어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맺게 되는 약속들을 기저로 하고 있어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다.
<밥을 먹으며>는 뭐니뭐니 해도 쌀이 막대民以食为天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밥을 먹어야 하는 이 세속성”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고 “그 본능은 누가 뭐래도 위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자 거룩한 일이다. 삶의 가치 만큼”이라고 력설한다. 따라서 아무리 힘든 때라도 “밥을 먹고 있으면 서서히 마음이 편안해진다”. “밥을 먹고 나면 다 이겨낸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처럼 또 다른 정신적인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다. “꿈이나 사랑이나 행복과 같은 것들이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것들도 모두 밥을 먹고 존재해왔”던 것이다. 물질 제1, 정신 제2의 유물변증법에 가닿고 있다. 그리고 이 수필은 밥 먹는 행위의 문화적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 그것은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끼리 나누는 일”인 것에 다름 아니다.
<밥을 먹으며>는 제목도 소박하다 못해 그저 그렇고 쌀이 막대라는 론의거리도 식상해지기 쉬운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적인 론의와 몸에 와닿는 진정성으로 승부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주향숙의 수필은 영국 베이컨의 ‘지식은 곧 힘이다’식의 고전적 중重수필에 가깝다. 그러니 그것은 신변잡사를 취급한 수기식 수필이거나 진한 감정을 토로한 서정수필이 아니다. 따라서 그녀의 수필은 일단 제재 선택이 무겁다. 이를테면 현대인간들의 비극적 인간관계(<나는 너의 밖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주의(<하루를 덥히며>), 인간에게 있어서 약속의 의미(<서로를 위한 약속>), 인간에서 있어서 먹는 것의 중요함(<밥을 먹으며>)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이런 것을 비켜갈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 삶과 더불어 같이 가는 영원한 과제인 것이다. 우리 인간의 실존문제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그녀의 수필은 깊은 삶의 도리와 철리를 깨우치며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녀의 수필은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 자연히 의론적이고 사변적으로 흐른다. 수필의 내적인 론리가 돋보인다. 이런 중수필은 지식량이나 자기 나름 대로의 독특한 관점 및 론리적 전개력 등이 없으면 쓰기 바쁜 문체이다. 그러나 그녀의 수필은 이 모든 것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 이런 수필들을 감상하면서 변신을 위한 주향숙의 모지름이 잘 안겨왔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녀성적인 섬세함과 잔정이 넘치는 서정수필을 많이 구사한 줄로 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성적인 거창함과 의론, 사변 및 론리를 장기로 하는 중수필을 구사하고 있다. 그녀의 다재다능함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하튼 변신을 추구하는 녀인은 멋있다. 아니, 작가는 멋있다. 그녀의 화려한 변신은 계속될 줄로 안다. 물론 주향숙의 수필에는 <밥을 먹으며> 같은 새로운 발견이 부족하고 <서로를 위한 약속>에서처럼 좀 자질구레한 감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중수필로서의 격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작이 절반이라고 이미 좋은 시작을 하고 있음에라 지극히 희망적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앞날은 창대하리라!
주향숙의 시와 수필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잠입가경으로 시와 수필의 꽃봉오리를 피우리라. 시와 수필 쓰다 보면 언감생심 다른 장르, 아예 내친 김에 소설까지다. 앞날을 기대해봄직하다. 그대는 젊었거늘! 그대는 붉은 정열로 향긋하고 성숙되였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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