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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평]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손톱>
2019년 07월 15일 09시 04분  조회:1070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손톱〉

우상렬

 

学而优则仕-공부 잘하면 출세한다는 말이 우리 머리속에 꽉 박혀있다. 그래서 지금도 너도나도 공부, 공부다. 내가 1980년대 초 대학교에 붙고 다닌 동기도 전적으로 이런 출세에 있었다. 그럼 그 출세란 무엇이냐? 쉽게 말하면 3대 차별, 모택동이 그래도 없애자 했던 3대 차별 즉 도시와 농촌 차별, 정신로동과 육체로동의 차별, 공업과 농업 차별에서 적어도 도시에서 정신로동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지식인이 전형적이겠지. 그래서 아무리 구린내 나는 지식분자라 해도 냠냠 지식분자가 되고 싶은 게다. 그런데 사실 지식분자라는 게 별 게 아니다. 도시인에 정신로동자라 해도 별 볼일 없는 존재다. 대개 한자리 출세는 고사하고 남 밑에서 치닥거리나 하는 소시민에 불과하니 말이다. 한영남의 초단편소설 <손톱>은 이것을 말해준다. 

소설의 주인공 ‘그’는 안해, 아이 단란한 핵가족에 차를 끌고 출근하는 출근족에 그럴듯해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는 지극히 별 볼일 없는 존재다.

‘그는 늘 그랬’지 않은가. ‘누구의 말이든 듣게 되면 다 일리가 있어보이고 세상사람들의 말은 거의 절대진리처럼 느껴지군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였는지 모르지만 왠지 자기는 정말 굉장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아주 굉장히 새롭고 굉장히 단단한 어떤 리론(그것을 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이랍시고 척 꺼내놓는데 다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그만 그 견고한 리론들이 다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그는 번마다 패배자로 되여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남의 말에도 척척 멋진 말들을 리론처럼 막 쏟아내지 않는가. 그들의 말들은 그대로 진리 같아 보였고 자기는 형편없이 초라한 존재로만 느껴졌다. 사상을 복제하지 못한다는 성양의 말은 얼마나 믿음직하고 론리적이고 진리 같아 보이는가.’ 실로 스스로 자인하는 ‘번마다 패배자’이고 ‘형편없이 초라한 존재로만 느껴진’다. 그는 동료들 사이 쓰잘데 없는 잡담 가지고도 ‘내심 자책하며 약간 쑥스러워진 이 장면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궁리하고 있’는 신경과민에 마조히즘적인 소시민적 존재다. 그렇다 하여 그에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직원들 휴식은 아무렇게나 잘라먹어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토요일에도 출근이다.’, ‘그래, 그럼 당신이 그 2천원 가지고 주말마다 토요일 꼬박꼬박 출근하시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가 잘도 먹혀들어가는 게 이 회사의 생리이다.’ 그에게는 불만이 많다. ‘사전 편찬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이런 일은 출판사에서나 할 일이지 연구원에서 할 일이 절대 아니다. 그런 걸 존경하는 원장님께서 퇴직 전에 국가2급이라도 되여볼 양으로 직원들 전체가 반대하고 상급 부문에서도 반대하는 것을 부득부득 우겨서 국가프로젝트를 따내왔다.’, ‘결국 직원들이 개고생해서 사전을 만들어낸다고 치자. 그러면 그야말로 토씨 하나 건드리지 않은 원장은 총기획자에 주필에 편집위원회 주임에 등등 생색낼 수 있는 곳에 전부 자기 이름자를 척척 박아넣을 것이고 누워서 떡 먹기로 국가2급 혹은 잘되면 국가1급까지 될 것이다. 직원들이야 고작 몇푼 안되는 돈 주며 콩알사탕으로 어린애 달래듯하면 될 터이고 상급자들은 그 덕에 자기네 성적도 올라갈 것이므로 칭찬마저 해줄 것인즉 이래저래 좋은 일만 쭈욱 기다리는 판이다. 원장은 원장이길래 그리고 프로젝트를 따내와서 국가지원금을 가져온 공신이길래 닥달질만 하면 되였다. 속도를 내라 그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일 마무리하냐, 다른 곳에서는 일 바로 하지 않아서 국가지원금 다시 되가져갔단다, 갖은 위협과 공갈이 섞인 채찍질을 해댄다. / 그러고 보니 그는 회사에 출근해서도 은근히 원장으로부터 부원장으로부터 서기로부터 주임으로부터 부주임으로부터 자주 옆구리 찔리워왔었다.’ 그는 똑똑하다. 알 것은 다 안다. 세속의 더러운 생리를 환히 꿰뚫고 있다. 그는 구경 지적인 지식인이니깐. ‘그는 어느 날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마치 본의 아니게 왕의 당나귀 귀의 비밀을 알아버린 리발사마냥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그래도 그렇달 뿐이다. 그야말로 회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말단의 말단인 그가 뭐라고 한대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의 현실적 리성이 이것을 일깨워준다. 그러니 그는 힘든 대로 현실에 안주할 수 밖에 없다. 그저 빨리 퇴근하여 집에 돌아가 아이나 어르고 마누라 해주는 밥에 반주술이 그리울 뿐이다. 热炕头老婆孩子-‘아늑한 보금자리’ ‘따뜻한 구들’에 ‘내 마누라’, 내 새끼 끼고 천륜지락을 누리는 모범남편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도 언감생심 ‘어디를 봐도 이쁘기만 한 성양’에게 ‘유난스레 포즈를 한껏 취하’기도 하는 색기도 없지 않아있다. 전형적인 농경문화로부터 변형된 현대 도시 소시민적인 꼬락서니이기도 하다. 요새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는 小资情结-나만의 아늑한 세계에 도취하려는 소시민적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그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 불편함이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생리화되여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그는 19세기 로씨야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의 전형적 인물의 하나인 ‘쓸모 없는 사람’과 꼭 닮아있다. 현실의 부정과 비리를 꿰뚫어보고 거기에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어쩌지 못하고 하는 일 없이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는 그런 못난이 말이다. 물론 그에게는 현실의 부정과 비리에 맞서는 용기도 있다. ‘자기만이 무엇이든 납득이 잘되지 않는 모양’이 아니더냐. 그는 퇴근길에 ‘울퉁불퉁’ 무지막지한 아낙이 사달이 된 교통체증에 자기도 모르게 끼여들어 바른 소리 한마디를 한다. 그런데 아낙의 기세찬 역공습에 그만 후회막급이 되고 만다. ‘이 더러운 습관을. 이 미친 습관을. 왜 나서기를 나서냐 자꾸. 그렇다고 해결을 시원하게 보기나 하는가. 사람이 그만큼 끼여들었다가 망신 당하고 옆구리 찔리고 했으면 좀 정신을 차려야지. 반팔십 나이나 어린가.’ 그에게도 언젠가는 정의감이 넘치고 평지돌출의 용감성이 있은 줄로 안다. ‘사람이 그만큼 끼여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다들 그렇고 그렇게 쉽게 넘어가주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자꾸 ‘망신당하고 옆구리 찔리고 하’다 보면 현실과 조률하게 되고 타협하게 된다. 이것을 모난 돌의 모가 다 마모되여 매끌매끌하게 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났던 돌이 정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비극이다. 인간에게 있어야 할 정의감과 용감성이 다 마모되고 아래우, 좌우 눈치나 보면서 원리원칙 없이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얼렁뚱땅 매끌매끌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전형적인 닳아빠진 소시민적 근성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에 또한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40 불혹의 나이건만 말이다. 그는 ‘아니, 근데 어디서 저런 아낙이야? 그리고 그 비쩍 마른 사내는 또. 내가 더러워서 못산다. 내가.’로 자기도 모르게 우뚝우뚝 치받는 밸을 못 삭인다. 그래서 그는 술로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당장 그 욕쟁이 아낙과 비쩍 마른 사내에 대한 불미스런 기억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뿐이다’. 술은 림시방편적인 하나의 탈출구일 뿐이다. 그러나 취중진담에 심각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왜 잘못된 걸 분명히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건가?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술 마신 김에, 화김에 음주운전도 서슴지 않는다. 보다 싶이 그는 항상 모순 속에서 헤매인다. 지식인의 지적인 당위성에 기초한 정의감과 용감성 대 소시민의 현실적인 나약함과 전전긍긍 사이에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도시 소지식인들의 회색적인 심리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손톱〉의 그는 지식인이다. 3천페지나 되는 사전을 만드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그는 소시민적인 小资情结에 놀아나는 소지식인에 불과하다. 后天下之乐而乐,先天下之忧而忧-즐거움은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불행은 내가 먼저 떠안으며 杀身取义-의를 위해서 몸을 서슴없이 바치는 전통적인 위대한 선비도 아니고 인간 실존과 전반 세계나 사회적인 문제 같은 거창한 담론에 흥분하고 놀아나는 대지식분자도 아니다. 그는 바로 눈앞의 리해득실에 놀아나고 조금 정의감과 용감성에 놀아날가 하다가도 꽥 소리치면 머리를 움츠리고 마는 그리고 속으로는 꼼지락거리는 王八-자라 같은 초라한 존재다. 도시문화에 의해 산생된 신종 ‘잡종’에 불과하다. 그래 이것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도 도시 지식인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 말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그’는 수시로 능청스러운 자조적인 심사를 드러낸다. ‘그래도 여기 꾸욱 박혀서 이 지긋지긋한 작업을 꾸준히 하는 까닭은 어쩌면 딱히 다른 일도 할 줄 모른다는 리유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어쩌면 지식분자들은 ‘딱히 다른 일도 할 줄 모른다.’ ‘그래, 당신들 다 정확하고 정확하고 정확하고 정확하다구. 나 같은 바보들만 오류덩이다. 이제 됐나?’ 스스로 물앉고 마는 형국이다. ‘남자의 손톱답지 않게 갸름걀죽하게 생긴 녀석’, 스스로 남자답지 않다는 말이 되겠다. ‘정직하고 원칙성 강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서기님도 당장 래일부터 로임을 주지 않는다고 해보라. 출근이고 뭐고 바로 할 것인가.’ 이것은 아이러니를 동원한 하나의 풍자가 되겠다. 그의 이름은 강철웅, 별명은 쇠때곰-꿋꿋함이 넘치는 사나이 이름이고 별명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못하다. 이것 또한 겉모양과 내실의 통일을 기하지 못한 자아풍자가 되겠다. 한영남 시나 소설에서 이런 능청스러운 자조나 풍자는 자주 등장한다. 우리 도시의 회색적 지식인들은 바로 이런 자조나 풍자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손톱>의 ‘그’의 전형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손톱>은 별로 극적 충돌도 없고 극적 사건도 없다. 그만큼 지리멸렬하고 재미가 없는 초단편소설이다. ‘그’의 출근과 퇴근 사이 그렇고 그런 늘 반복되는 하루 생활을 자연주의적으로 가감없이 원색적으로 주절대는 것 같다. 1990년대부터 우리 중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전형적인 신사실주의新写实主义 창작방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까딱 잘못하면 재미도 재미겠지만 별 의미도 없게 된다. 고기도 잃고 구럭도 잃는 꼴이 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작자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작자는 상징적인 장치를 효과적으로 리용하고 있다. 

우선 소설의 제목 <손톱>을 보자. 소설에서 손톱은 서두와 결말의 조응관계를 형성하며 전반 소설을 아래우로 감싸는 독특한 ‘액자’형 모양새를 낸다. 손톱은 오른손 새끼손톱으로서 별 볼일 없는 주인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서두에서 손톱은 ‘별스레 고분고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주인공의 무의식적인 반발 내지 반항의식을 나타낸다. 결말에서 손톱은 ‘가쯘하게 잘라져있었고 매끈하게 다듬어져까지 있었다.’ 이것은 주인공의 고분고분 순화된 의식을 나타낸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주인공의 반발 내지 반항의식도 좋고 고분고분 순화된 의식도 좋고 그것은 모두 손톱에 집중되면서 손톱은 이 소설을 리해하는 중요한 상징적 키워드로 된다. 여기에 중간 부분에 간간이 거론되는 ‘손톱’-‘갑자기 잊고 있었던 새끼손톱이 쿡 약지 옆구리를 찔러댔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자라났을가.’, ‘갑자기 그동안 잊혀졌던 새끼손톱이 또 약지 옆구리를 쿡 찔러댄다. 이번에는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오늘 저녁에는 이 녀석을 손 좀 봐야지. 암 봐야 하구 말구.’, ‘그는 갑자기 이상해진 새끼손톱을 어떻게 조리할가 유심히 살피며’ 등은 서두와 결말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심리를 수시로 튕겨주고 있다. 이로부터 ‘손톱’을 제목으로 잡은 것은 적재적소다.

소설에서 거론된 아프리카 하이에나나 독수리도 하나의 상징코드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짐승들이다. 왜서? 그것은 ‘늘 다른 짐승들이 힘겹게 잡아놓은 사냥물을 끼여들어 가로채기’ 때문이다. 보다 싶이 하이에나나 독수리는 남의 로동성과를 독차지하여 명리를 노리는 원장 같은 기생충적 인간들을 상징한다.

소설에는 한국 왁스의 노래 <부탁해요>가 출퇴근할 때 두번 나온다. 이 노래도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는 이 노래를 좋아한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강철웅 자신을 쓴 노래 가사가 아닐가 싶을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이 들어맞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실 강철웅 그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남성들에게도 들어맞는 노래인 것이다. 그것은 남성들이 거세당한듯 초절이 배추잎처럼 후줄근해진, 우리 현실 남자들의 자기 위안적인 갈구를 드러낸 백일몽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그’가 퇴근길에 등장한 ‘비쩍 말라보이는 차주인’도 하나의 상징적 코드다. 그것은 현단계 음성양쇠를 드러내면서도 무지막지한 악에 추호도 어쩌지 못하고 퇴각령, 줄행랑을 놓기 바쁜 초라한 우리네 남성들의 모습이다. 여기에 어쩌다 정의롭게 끼여들었다가 역시 퇴각령, 줄행랑을 놓기 바쁜 ‘그’의 모습과 클로즈업되면서 현대 도시 소지식인들의 희극적인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이상 소설은 많은 상징적 장치나 코드를 적재적소에 효과적으로 리용함으로써 인물, 주제의 내연과 외연을 확충하고 있다. 따라서 <손톱>은 어떤 의미에서 초단편소설적인 단순한 인물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전달하는 사회적 메시지는 대단히 풍부하다. 로신의 <공을기>처럼 말이다.

이외에 <손톱>은 서술인칭이나 시각에서 독특하다.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볼 때 전지적인 제3인칭 서술로 된듯하다. 그런데 작자는 구체적인 서술을 진행함에 있어서 제한적인 제1인칭 서술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우에 례문들은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객관적인 제3인칭과 주관적인 제1인칭이 유기적으로 녹아든 감을 준다. 해석학에서 말하는 시계视界융합, 즉 작가와 ‘그’의 시계융합을 가져오면서 독자들도 그 시계융합에 빠지게 하며 진실성을 획득한다. 또한 많은 부분에서 ‘그’의 감각, 느낌, 생각 등을 나타내게 되면서 심리색채가 진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심리세계에 빠지게 한다. 결론적으로 전반 소설이 심리소설인 감을 준다. 

<손톱>은 현단계 중국 주류문단이나 한국문단에서 많이 보게 되는 전형적인 도시 서사로서 소지식인의 난감하고 힘든 회색적인 도시생활을 반영한 훌륭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우리 조선족문학의 제재 령역을 확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출처:<장백산>2018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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