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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회귀본능
소설가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을 평함
⊙우상렬
인간에게는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나서 자란 고향이 바로 우리의 ‘자궁’의 하나. 인간은 어디에 가든 이 ‘자궁’을 잊을 수 없어 항상 그리워한다. 그래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것을 외우게 된다.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두만강’ 문학상 수상작)은 바로 우리의 ‘자궁’회귀본능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 시작에 주인공은 페촌이 된 고향마을을 찾아간다. 그것은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찾는 것이였다. 어쩌면 주인공은 고향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고향이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주동적으로 떠났으니 말이다. 이것이 의식세계의 직실한 보기이리라. 그런데 “간밤에 고향으로 간다는 흥분에 꺼둘려 충전을 깜박”한다. 고향은 무의식적인 ‘자궁’회귀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분된 것이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타향에서 고생을 하면 더 발동되는 법이다. 주인공을 보자. 그는 랭동창고에서 악덕업주를 만나 육체적 고달픔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모욕까지 받으며 ‘시까름’을 당한다. 그래서 경남의 오지 한우농장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안해의 위장결혼이 ‘진짜’결혼까지 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안해와의 해후는 비극의 생생 보기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고향은 “한때는 제법 풍요와 번성을 자랑했던 마을이였다.” 바로 이 마을에서 주인공은 마을문화관의 책상물림―화이트칼라로 일을 했는데 비교적 잘 나가는 축이였다. 그래서 수상도 하고 사랑도 싹트고 마을에서 가장 고운 련꽃같은 안해를 얻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꼭 빼닮은 아들도 보게 된다. 한마디로 여기는 꿈이 피여나고 행복이 무르녹던 곳이다. 현실과 과거의 이런 대비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피여나는 것이 ‘자궁’회귀본능이다. 이는 일종 향수이기도 하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객관적인 계기나 자극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마을의 련못이 자연히 “마을 앞 커다란 자연못에 련꽃이 무성해 련화촌으로 불리던 고향마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시도 때도 없이 련못에 나와 ‘자궁’회귀본능 즉 향수를 달랜다.“그 감흥에 옮아들어” “우리 연변에도 련이 난답니다. 두만강 홍련이라고”는 직접적인 주석으로 된다. 여기에 농장주의 “그럴테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고향의 제것이 더 아름다울 걸세”는 정곡을 찌르며 가슴에 와닿는다. 여기에 농장주는 한술 더 떠 “이보게 옌벤 나그네, 이제 제것을 완상(玩赏)하러 가시게. 꽃잎이 싹 다 지기전에 말일세.”는 직접적인 추동으로 된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삶의 도리나 리치를 터득하게 되면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된다. “련꽃을 마음에 들이면 욕심을 씻고 평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선친은 늘 말씀하셨네. 무욕의 평정한 마음은 안락과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데 선친께서 가르치셨던 그 간단한 리치를 난 여태 실천해 오지 못했지.” 농장주의 이 말은 바로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래서 주인공이 “나도 여태 완상할 줄 모르고 살아왔슴다. 그 꽃 말임다.”라고 되뇌인 것도 자연스럽다. 이제 주인공은 진정으로 ‘완상’하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자궁’회귀본능이 작동되여 귀향의 길에 오를 것이다.
‘자궁’회귀본능—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장 아늑한 ‘자궁’같은 고향을 그린다. 이것은 어쩌면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아름다운 못을 버리고 뿔뿔이 헤여져 떠났던 것인가?”라고 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집단무의식을 의식적으로 끌어올려 음미하며 완상하게 될 때 고향은 이제 추물이 아니라 더 아름답게 안겨온다. “고향의 련못은 스스로 꽃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식물, 동물 등 생명의 하모니. 그것은 유구한 자연의 원생태. 한국 한우농장의 인공적인 것보다 더 진실하고 확실하다. 자연은 그대론데 사람은 가고 없구나(物是人非). 그래서 결국 겨우 필림 한 장으로 달래보는‘자궁’회귀본능. 현실은 이외에 별도리가 없단다.
작품은 “빨리, 또렷이 인화되라고 사진을 따뜻이 손아귀에 품어 가슴에 대였다. 내 가슴에서 련꽃 한점이 바야흐로 피여오르고 있었다.”로 마감한다. 여기서 련꽃은 ‘자궁’회귀본능을 달래는 하나의 상징코드이다.
한마디로 〈련꽃밥〉은 식상하기 쉬운 한국제재를 정신분석학적인 ‘자궁’회궁본능이란 집단무의식으로 풀이하여 새롭다. 이것은 재한 조선족들에게 하나의 귀향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동시에 조선족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창출하여 긍정할 만하다.
(작자는 연변대학 교수)[길신론평]‘자궁’회귀본능
—소설가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을 평함
⊙우상렬
인간에게는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나서 자란 고향이 바로 우리의 ‘자궁’의 하나. 인간은 어디에 가든 이 ‘자궁’을 잊을 수 없어 항상 그리워한다. 그래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것을 외우게 된다.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두만강’ 문학상 수상작)은 바로 우리의 ‘자궁’회귀본능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 시작에 주인공은 페촌이 된 고향마을을 찾아간다. 그것은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찾는 것이였다. 어쩌면 주인공은 고향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고향이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주동적으로 떠났으니 말이다. 이것이 의식세계의 직실한 보기이리라. 그런데 “간밤에 고향으로 간다는 흥분에 꺼둘려 충전을 깜박”한다. 고향은 무의식적인 ‘자궁’회귀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분된 것이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타향에서 고생을 하면 더 발동되는 법이다. 주인공을 보자. 그는 랭동창고에서 악덕업주를 만나 육체적 고달픔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모욕까지 받으며 ‘시까름’을 당한다. 그래서 경남의 오지 한우농장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안해의 위장결혼이 ‘진짜’결혼까지 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안해와의 해후는 비극의 생생 보기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고향은 “한때는 제법 풍요와 번성을 자랑했던 마을이였다.” 바로 이 마을에서 주인공은 마을문화관의 책상물림―화이트칼라로 일을 했는데 비교적 잘 나가는 축이였다. 그래서 수상도 하고 사랑도 싹트고 마을에서 가장 고운 련꽃같은 안해를 얻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꼭 빼닮은 아들도 보게 된다. 한마디로 여기는 꿈이 피여나고 행복이 무르녹던 곳이다. 현실과 과거의 이런 대비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피여나는 것이 ‘자궁’회귀본능이다. 이는 일종 향수이기도 하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객관적인 계기나 자극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마을의 련못이 자연히 “마을 앞 커다란 자연못에 련꽃이 무성해 련화촌으로 불리던 고향마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시도 때도 없이 련못에 나와 ‘자궁’회귀본능 즉 향수를 달랜다.“그 감흥에 옮아들어” “우리 연변에도 련이 난답니다. 두만강 홍련이라고”는 직접적인 주석으로 된다. 여기에 농장주의 “그럴테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고향의 제것이 더 아름다울 걸세”는 정곡을 찌르며 가슴에 와닿는다. 여기에 농장주는 한술 더 떠 “이보게 옌벤 나그네, 이제 제것을 완상(玩赏)하러 가시게. 꽃잎이 싹 다 지기전에 말일세.”는 직접적인 추동으로 된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삶의 도리나 리치를 터득하게 되면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된다. “련꽃을 마음에 들이면 욕심을 씻고 평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선친은 늘 말씀하셨네. 무욕의 평정한 마음은 안락과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데 선친께서 가르치셨던 그 간단한 리치를 난 여태 실천해 오지 못했지.” 농장주의 이 말은 바로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래서 주인공이 “나도 여태 완상할 줄 모르고 살아왔슴다. 그 꽃 말임다.”라고 되뇌인 것도 자연스럽다. 이제 주인공은 진정으로 ‘완상’하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자궁’회귀본능이 작동되여 귀향의 길에 오를 것이다.
‘자궁’회귀본능—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장 아늑한 ‘자궁’같은 고향을 그린다. 이것은 어쩌면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아름다운 못을 버리고 뿔뿔이 헤여져 떠났던 것인가?”라고 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집단무의식을 의식적으로 끌어올려 음미하며 완상하게 될 때 고향은 이제 추물이 아니라 더 아름답게 안겨온다. “고향의 련못은 스스로 꽃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식물, 동물 등 생명의 하모니. 그것은 유구한 자연의 원생태. 한국 한우농장의 인공적인 것보다 더 진실하고 확실하다. 자연은 그대론데 사람은 가고 없구나(物是人非). 그래서 결국 겨우 필림 한 장으로 달래보는‘자궁’회귀본능. 현실은 이외에 별도리가 없단다.
작품은 “빨리, 또렷이 인화되라고 사진을 따뜻이 손아귀에 품어 가슴에 대였다. 내 가슴에서 련꽃 한점이 바야흐로 피여오르고 있었다.”로 마감한다. 여기서 련꽃은 ‘자궁’회귀본능을 달래는 하나의 상징코드이다.
한마디로 〈련꽃밥〉은 식상하기 쉬운 한국제재를 정신분석학적인 ‘자궁’회궁본능이란 집단무의식으로 풀이하여 새롭다. 이것은 재한 조선족들에게 하나의 귀향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동시에 조선족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창출하여 긍정할 만하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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