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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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 지연, 학연
2005년 03월 31일 00시 00분  조회:4465  추천:71  작성자: 관리자
혈연, 지연, 학연

우상렬

한국 사람들의 끼리끼리 똘똘 뭉치는 情實주의를 나타내는 키워드는 뛸 데 없이 혈연, 지연, 학연이다. 그것은 이 혈연, 지연, 학연이 인간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편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혈연, 지연, 학연에 울고 웃는다. 한국 사람들은 이 혈연, 지연, 학연으로부터 종친회니 동문회요 하는 삶의 보금자리를 틀기도 한다. 사실 한국재벌기업이라는 것도 놓고 보면 이런 혈연으로 똘똘 뭉친 가족체에 다름 아니다. 아버지가 기업을 창업하고 그 다음 아들이 이어받고 그 다음 손자가 이어받는 식. 그러면서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나가는 혈연의 장강. 몇 년 전 부턴가 한국은 민주화가 속속들이 퍼지면서 지역자치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은 모종 의미에서 전통적인 지연을 더 확고히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혈연, 지연, 학연의 얘기는 한국만의 얘기만 아니고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親戚, 老鄕, 同學가 전형적인 그 보기가 되겠다. 그런데 중국은 군이 중시되는 세월에는 戰友도 여기에 가세한다. 중국에서도 이런 親戚, 老鄕, 同學 관계를 이용하면 살아가는데 훨씬 편하게 작용한 것으로 안다. 그 넓은 땅덩어리에 많은 인구들이 부대끼며 사는 중국에서 오히려 이런 관계가 더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생판 모르는 외딴 곳에 떨어졌는데 老鄕을 만났다고 하자. 그 어디 안 반갑겠는가? 중국 사람들도 親戚, 老鄕, 同學를 통해 자기의 귀속감을 확인하고 삶의 둥지를 틀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혈연, 지연, 학연은 불교의 무슨 緣 소리를 떠나서 우리 삶의 동심원으로서 그 누구도 이것을 떠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에 혈연을 가지게 되며 고향 땅에서 살다보면 지연이 이루어지고 학교에 다니다 보면 학연이 맺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연들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인간관계로서 현대 인간들의 많은 동호인 관계와는 다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항상 귀속감을 느껴야 마음이 편해지는 지라 이런 연들을 기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특히 현대 인간들은 따로따로 노는 외로움을 이런 모임에서 삶의 귀속감을 만끽하면서 달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연들의 외연은 신축성이 있는 것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그것은 우리에게 달리 안겨온다. 예컨대 우리가 연길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경우 연길은 우리의 혈연, 지연, 학연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연길을 떠나 중국 남방에 가서 사업하게 될 때 우리의 혈연, 지연, 학연은 확장을 가져와 적어도 연변, 길림성, 동북, 북방이 될 것이다. 우리가 남방에서 조선족이나 연변, 길림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동북사람이나 북방사람만 만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령 또 우리가 누구도 모르는 외국에 갔다 하자. 여기에서 같은 중국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중국 사람은 혈연, 지연, 학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정다운 존재가 된다. 여기에 만약 그 중국 사람이 조선족이라 할 때 그것은 더 진한 정다운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그 어떤 緣을 따지며 情實主義에 많이 매이고 官尊民卑의 관료주의로 많이 흘러온 우리 동양에서는 이런 혈연, 지연, 학연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신라향가 <安民歌>와 같은데서 보게 되는

군은 어버이여
신은 어머니여
백성은 그 자식이요...’

하는 전근대사회의 얘기는 그만두고라도 현대에 들어와서도 나라를 세운 건국주들을 모두 어버이로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 國父 이승만,
조선에서 어버이 수령님 김일성,
중국에서 중화민국의 國父 孫文,
대만의 國父 蔣介石...

여기에 이들의 부인을 國母로 인지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조선에서 1960년대부터 잘 불러진

'하늘은 푸르고 내 마음 즐겁다
손풍금 소리 울려라
사람들 화목하게 사는
내 조국 한없이 좋네
우리의 아버지 김일성원수님
우리의 집은 당의 품
우리는 모두다 친형제
세상에 부럼없어라'

라는 <세상에 부럼 없으라>(집체작)는 혈연, 지연, 학연을 모두 아우르는 情實主義에 다름 아니다. 상대적으로 놓고 볼 때 서양은 보다 많이 개개인 중심의 개인주의와 情實主義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살아왔기에 이런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것들이 음성적으로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보다시피 인간은 혈연, 지연, 학연의 존재다. 우리가 구정 같은 명절이 되면 기를 쓰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필사의 탈출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끊을 수 없는 緣 때문이다. 외딴 곳에서 부모친척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고 동창들이 그리워나는 것은 바로 이런 緣 때문이다. 인간은 바로 이런 緣 때문에 항상 정감이 촉촉이 솟아나고 젖어들며 행복감에 잠긴다.

한국의 종친회조직 같은데서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가문의 자제들을 공부시킨다거나 동문회 같은데서 자기네 출신학교 발전을 위하여 기금을 마련한다든가 하는 것은 정말 보기에 좋고 멋지다.

그렇다 하여 우리는 이런 緣을 아무 때나 마구 드러내서는 안 된다. 진승이 왕좌에 앉았을 때 고향 친구 하나가 무모하게 뛰어들다가 화를 입은 것은 그 보기의 하나가 되겠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여 얄팍한 삶의 한 편법으로 삶을 때 그 달콤한 緣의 맛은 싹 가시고 만다.

예컨대 한국에서 봉건시기 관료들이 四色黨爭에 빠지거나 현대 이런 緣 때문에 기업지성을 말아먹든가, 緣을 통해 지역주의를 조장하거나 선거 때 표 하나를 더 낚으려고 광분하는 것은 씁쓸해난다. 그리고 이것이 전근대적인 붕당냄새가 풍기는 종법주의, 지역주의 같은 극단적인 파벌로 나아갈 때 이것은 심히 경계해야 될 인간 삶의 독버섯으로 된다.

모택동이 중국혁명을 영도함에 있어서 가장 경계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현재 중국에서 이런 緣을 통해 기승을 부리는 走后門은 세상의 정의와 공정함을 싹 말아먹으며 정말 사람들 열 받게 한다. 세상만사 독과 약 같이 가는 법이라 우리는 이 緣을 약이 되도록 잘 써먹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적어도 때와 장소에 맞게 도에 어긋나지 않게 써먹을 때 그것은 생의 감로수가 될 것이다.

2005.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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