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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와 후배
2005년 04월 04일 00시 00분  조회:4323  추천:59  작성자: 관리자
선배와 후배

우상렬


혈연, 지연, 학연은 한국 인간관계의 끈끈한 정들이다. 선배와 후배는 학연의 확실한 위계질서로서 그 끈끈한 정의 한 보기에 다름 아니다.

선배 온다. 차렷!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음, 너희들도 잘 있니? 한국대학에서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고 후배한테 베풀며 후배가 선배를 깍듯이 모시는 것, 한국 대학의 진풍경의 하나.

선배는 후배보다 대학입학을 먼저 했다. 그러니 나이에 상관없이 선배다. 선배는 선배고 후배는 후배,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을 선배라고 모시는 韓민족 전통적인 의식하고는 좀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일제 식민지시기 군국주의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대학위계질서의 유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좀 껄꺼름하다. 그러나 현재 그것이 분명 한국식으로 새롭게 그 내연이 채워졌음에라 한국대학문화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신입생입학, 대학생활에는 아직 숙맥인 신입생. 어리뻥뻥. 이럴 때 선배가 나선다는 것이다. 얘들아, 모여. 내가 한턱 쏠께! 대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여차여차... 알았니? 그러면 한잔 해. 그리고 어떤 ‘세심’한 선배들은 학과 교수님들의 성미, 습관, 수준 등에 대해 일일이 거론하며 수강신청에 학점 따는 요령에 이르기까지 에헴, 에헴 해가며 ‘훈계’한다. 정말 대학생활 기본원리부터 구체적인 방법, 요령에 이르기까지 ‘가르침’받게 되니 후배들 도정신하여 들으며 고마워할 수밖에. 그것도 선배들 술 얻어먹으며 말이다. 고마울시고, 선배님이여! 이때는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나.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전통적으로 아랫사람이 위 사람을 모시는 것과는 좀 달리 일반적으로 나이 더 먹은 선배가 나이 적은 후배한테 밥이나 술을 사주는 식으로 잘 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배니까 돈도 우리보다 많겠지 하는 식의 합리주의가 작동해서인지, 아니면 삼촌, 삼촌 하면서 짐 하나 더 지워주는 식인지... 여하튼 후배들은 선배들꺼 냠냠 잘 받아먹으면서 선배님, 예예, 알았습니다하며 말 잘 듣고 거저 잘 모시거나 혹은 흉내만 내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배들은 담배를 피우다가도 선배들이 오면 당황해 하며 혹은 당황해하는 척 하며 담배를 비벼 끄거나 담배를 등 뒤로 가져간다. 어려운 존재로서의 선배에 대한 예의의 표시다. 이럴 때 선배들은 대개 어깨가 으쓱 올라가며 선배로서의 존재가치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대개 기분이 붕 떠서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괜찮아, 괜찮아 피워! 한다. 그러면 후배들은 못이기는 척하고 피운다. 멋진 광경이다. 禮尙往來의 한 경지!

선배와 후배, 아니, 우리 쪽에서는 아래위 학년 사이 막 치고 박는 ‘아수라장’하고는 좀 다른 데가 있다. 물론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또 고향선배, 고향후배 하는 식으로 지연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개개인 사이에 더 끈끈한 정을 쌓아간다. 그리고 이들 사이 후배들은 평시에 무슨 고민거리가 있을 때도 선배들을 찾아가 털어놓으며 조언을 받기도 한다.

한국 대학에는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고 혹은 선배와 후배 사이 관계를 돈돈히 하는 모임이 학기 초에 학과일정에 공식적으로 잡혀 있다. 오리엔테인, MT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모임은 신성한 것으로 대개 학교를 벗어난 어떤 뜻 깊은 장소를 택한다. 그래서 대개 학과교수들도 참가한다.

오리엔테인, 신입생환영회가 되겠다. 오리엔테인, 선배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가르침을 받으며 신입생들 사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면목을 익히는 모임이 되겠다.

MT-Member ship of Training, 단체성원들의 훈련 및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모임이라 해야 되겠다. 이것은 매 학기 시작 때마다 가진다. 나는 이번에 내가 교환교수로 와 있는 배재대학교 국문과의 학생들과 MT를 갔다. 나한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선후배 및 교수가 한잔 하며 허심탄회하게 속말을 터놓고 노래에 춤사위에 하나로 어울리는 것도 좋았지만 초봄의 냉기가 냉냉하게 감도는 식전 아침에 벌어졌던 광경은 더구나 인상적이다. 선배들이 앞에 서고 후배들이 뒤에 선 상태로 학생들이 줄을 짓더니 바지가랭이를 올리붙이고 하나하나 둘, 하나하나 둘 하며 그대로 해변가로 달려가 바다로 뛰어들기! 그리고는 우리는 해냈다는 듯이 허허로운 바다지평선을 향해 야호!를 웨친다. 찬 바닷물에서 한참 물장난을 치던 학생들은 선후배 할 것 없이 물참봉이 되고 말았다. 뭍으로 나왔을 때는 모두 낯이 새파래지고 입술을 들들 뜬다. 그러나 그들은 즐거운 기분에 들떠 희희작작 거리며 숙소로 향했다.

그들은 선후배가 하나가 되어 해냈다는 기분에 들떳다. 선배들은 투정 하나 부리지 않고 잘 따라준 후배들이 고마웠다. 후배들은 그 살을 에이는 찬물 속을 앞장서 뛰어든 선배들이 대견스러워 보였다. 선배와 후배, 서로서로 고마운 존재가 된다. 이들은 이렇게 ‘통과의례’를 잘 치러냈다. 이로부터 그들은 하나가 된 새 출발을 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교수들의 마음은 흐뭇하고 얼굴마다에는 미소가 어린다.

한국대학의 선배후배문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국유학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다. 우리 과의 한국 친구 하나 나를 초청. 우선생, 오늘 저녁 한잔 합세. 귀맛이 당겼다. 안 그래도 궁굼하던 차. 여기에 선생이라고까지 불러주니 기분이 더 붕 떳다. 그래서 저녁이 되어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밥도 먹지 않고. 식사시간 퍼그나 지났는데도 이 ‘자식’ 감감 무소식. 나는 밸이 상투밑까지 치밀었지만 이 새끼 보자고 벼르며 꾸르륵 하는 배는 달래느라고 열심히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리고는 방법 없이 애매한 책하고만 씨름하기.

그런데 밤 한 11시가 되었을가 하는데 그 ‘자식’ 문을 뚝뚝 노크 하더니 얼굴을 삐끔히 들이밀고 우선생, 한잔 하세 그래, 한잔 하세 그래,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어 붙인 ‘손술잔’을 주둥이로 가져가며 술 마시자는 내색을 냈다. 임마, 알았어. 나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속으로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며 걸상에서 기신기신 일어났다. 얻어먹는 놈 방법 있나, 나는 그 자식 따라 수걱수걱 기숙사문을 나섰다. 어디 밖의 식당으로 가는가부다 생각을 했는데 이 자식 학교운동장으로 나를 끌고 가는게 아닌가. 그때 이제 금방 가을에 접어들었는지라 학교운동장에는 잔디가 아직 파릇파릇 돋아 있다. 이상한 낌새가 드는 판에 그 자식말로 우선생, 내 막걸리 한 통 받아 왔네, 오늘 달 밝고 날씨 좋으니 여기서 막걸리나 마시며 밤이나 세우세. 나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졌다.

‘자식’, 정말 막걸리 한통에 마른 오징어오리들에 당콩알들이며 그럴싸하게 신문지 위에 벌려 놓았다. 그런데 그 막걸리라는 것을 보니깐 기숙사에서 손빨래할 때 쓰는 물통-바께쯔에 담은 것이였다. 우리 기숙사에도 그런 바께쯔가 있으니 뛸 데 없다. 나는 좀 꺼림직해났다. 그런데 이것은 약과였다. 술잔이 없어 어떻게 하지 했는데 자식 자기가 싣고 있던 흰 고무신, 아니 너무 오래 신어서 그런지 아니면 오래 동안 안 씻어서 그런지 이제는 좀 누르께레한 한 짝을 척 벗더니 거기에다 대고 막걸리를 들이 붇는다. 그리고는 자, 우선생 먼저 한잔 하게, 아주 정중하게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아이, 이 사람아, 어찌 그런데다 술을 마신다 말이요? 나는 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지, 아무래도 선배! 가 솔선수범을 하는 법이니깐. 그러면서 그는 고무신에 담김 막걸리를 쯥 소리를 내며 다 들이킨다. 그리고는 카, 술맛 좋네 하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손등으로 입 가장자리를 쓱 닦는다. 그리고는 흰 이를 드러내며 사람 좋게 히죽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그 고무신에 막걸리를 붇는다. 그리고는 나한테 내민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어망결에 받았다. 우선생, 달리 생각 말게. 막걸리는 이런 데에 마셔야 맛있소. 나는 고려대학교 출신인데 우리는 다 막걸리패요. 내가 학부생 입학을 하니 선배들이 이런 고무신에 척 막거리를 따라 주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지, 지금 생각만 해도 꿈같애, 꿈같애.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제날의 아름다운 꿈을 되새겨 보기 위해서 오늘 이 장소를 마련한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찍 감고 단순에 쩍 들이켰다. 그는 확실히 한국식으로 나의 선배가 되기에 족했다. 그는 벌써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집필중이였다. 그리고 그는 나이도 나보다 한두 살 위였다. 나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 그리고 그의 고마운 마음에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쩍 들이켰다. 그리고는 카, 술맛 좋네 하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손등으로 입 가장자리를 쓱 닦았다. 그리고는 흰 이를 드러내 며 사람 좋게 히죽 웃었다. 다음 다시 그 고무신에 막걸리를 부었다. 그는 기분 좋게 얼굴에 웃음을 환히 피우며 그 고무신을 받는다. 또 쩍 내기. 그 다음은 내 차례.

나는 두 번째 고무신잔을 받으면서 말했다. 김선생, 우리 중국말에 好事成雙이라고 이것만 마시고 그만 두기오, 내 네일 수업있다 말이요. 아, 그래, 그래. 그는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인다. 그런데 두 번째 고무신잔을 비우고 난 다음에도 세 번째, 네 번째 잔... 계속 이어졌다.

우선생, 아니 이번에는 친구다. 야, 싸나이대장부라면 이만한 술은 다 마시야지. 둘이서 요만이 술이 다 무엇이냐 말이다, 아무것도 아니지, 친구, 그렇지 않나 말이다. 나는 정말 선배의 들뜬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끝내 그 한 바께쯔 막거리를 꽝냈다. 물론 이튼 날 수업은 아침 잠으로 말아먹고. 그 후 내가 이 일을 한국 친구들한테 재미거리로 얘기했더니 선배 따라 울며 겨자 먹기가 어디 그뿐입니까 하더라. 그렇겠지. 나는 알았네.

한국대학의 선배와 후배 관계에서 울며 겨자 먹기 식은 정말 약과다. 진짜 울며 ‘독약’ 먹기는 신참침례식의 기죽이기다. 이른바 선배의 억지 강권 내지 명령이나마 신참후배는 찍 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한 강술 한 사발씩 부어놓고 단모금에 마시기. 이 정도 되면 멋진 상징적 의미의 신참침례가 아니고 이것은 정말 ‘독약’ 먹기에 다름 아니다. 정말 언젠가 한국에서 이런 신참참례에 신입생후배가 죽어나갔지 않았던가? 그래도 선배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의 권위를 확보하련단다. 웃어울시고. 이런 식은 후배들 겉으로 되는 ‘존경’은 살지 몰라도 속으로는 반감만 살뿐. 이것은 上行下傚라 선배에게 당했던 후배들이 그 다음 후배들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기죽이는 노릇을 되풀이하며 ‘분풀이를 하’는 악성순환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한국대학에서의 선배와 후배 관계는 정말 우리 중국 유학생들이 농담 삼아 얘기하는 前肚后背 즉 앞 배와 뒤 등의 관계 다름 아니다. 前肚가 가는데 后背가 따라가기 마련. 선배가 어떤 정치선거유세에 나선다고 하자. 그럼 후배는 무조건 선배 찍기. 선배가 당선되면 선배는 또 자기후배부터 챙기주기. 선배와 후배는 서로 싸고 감돌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노릇하기. 사회 정의니 정도니 하는 것은 다 팽개친체. 중국식으로 走後門의 전형적인 한 보기.

선배니 후배니 하는 한국대학문화가 어느새 우리 대학가에도 불어 닥쳤다. 위에서 말한 선배와 후배 사이 합리적이고 멋진 情적인 주고받음,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사실 대학교라는 것이 아래위학년의 관계를 못 떠나는지라 선후배 관계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럴진대 선배후배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을 따름이지 우리에게도 이런 문화는 있다. 예컨대 신입생환영모임이나 재학생들과 신입생좌담회조직 등등.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국에 없는 멋진 선후배문화가 있다. 위 학년 학생들이 신입생 마중가기, 정말 멋지다. 나는 지금도 내가 1981년 9월 연길역에 내렸을 때 나의 이불짐 보따리를 받아 안은 그 위 학년 선배님을 잊지 못한다. 그때 그 선배님의 열정적인 마중에 초라한 연길역이나마 나한테는 그렇게 멋지게 안겨왔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그 따분한 대학생활에 위 학년 선배들이 우리 반에 와서 사교무를 배워준다고 땀을 뻘뻘 흐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그리고 ‘안쪽’에서 온 나에게 조선춤을 배워주던 그 복성스럽게 생긴 선배처녀동지도 그렇고.

그런데 요새 우리의 이런 멋진 대학 선후배문화가 좀 일그러져 가는 것 같아 안타갑다. 선후배문화에서도 좋은 것 보다는 나쁜 것을 따라가기에 바빠하는 우리의 대학생들이 더욱 안쓰럽다. 우리 대학생들 속에서도 한국대학교 신참침례식 기죽이기가 기승을 부린다 한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는 우리 대학생 선배 둘이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야밤삼경에 후배들 기숙사에 뛰어들어 후배들 차렷시켜 놓고는 ‘체조’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손찌검을 해가며 선배의 권위와 지엄함을 내보이려 했다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것은 일종 범죄다. 남의 사생활침범, 인명상해죄 나아가서는 사회질서교란죄... 무서울시고. 다 이 선생된 자의 잘 못으로 칠 수밖에.

우리 친구들 남의 것 흉내 내도 무엇 좀 알고 흉내 내야 하지 않겠는가? 신참침례식 기죽이기, 말만 들어도 끔찍하지 않은가? 전통적으로 우리 韓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민족들에게도 이런 풍속이 있었다. 기독교에서 목사나 신부가 신참자 머리나 몸에 물을 뿌리거나 그 머리를 맑은 물에 살짝 담그었다 꺼내는 침례식도 그 한 보기다. 그런데 이런 의식은 신참자의 몸을 진짜 상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재미나는 멋진 상징적인 과정으로 거뜻이 끝나고 만다. 위에서 나타난 한국대학교 신참침례식은 도가 지나친 무지막지함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신참침례를 총장훈시, 학과장훈시, 담임선생훈시 층층이 훈시하는 멋대가리 없는 식으로 대체해왔다. 그러니 우리 학생들이 한국식을 배울 수밖에. 신참침례식, 합리적이며 멋진데가 있다. 그러니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나름대로 상징적으로 승화시킨 합리적이고 멋진 모습이여야 한다. 사실 한국대학교 MT는 따져보면 선배들이 주동이 되고 앞장에 서서 후배들을 이끌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간다는 신참침례를 포함한 단체결속의 멋진 데가 있다. 그러니 이런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따라 배워도 좋다고 생각된다.

2005.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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