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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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착증
2005년 04월 07일 00시 00분  조회:4671  추천:59  작성자: ysl
성도착증


우리는 이 세상에 남자나 여자로 온다. 우리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러니 부모들의 낳아준 ‘은공’에는 그리 감지득지할 필요가 없다. 그네들이 자기네 좋아서 어쩌구려 하다가 우리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달갑지 않은 우리가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실존적 고민이 생겨나기도 한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은데 왜 여자가 되었지? 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데 왜 남자가 되었지? 남자가 되고 싶고 여자가 되고 싶은 엇갈린 인생멜로드라마. 한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자기 뜻대로의 남자나 여자가 되어 살았으면 원이 없겠쟈! 나는 정말 여자가 되고파. 너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

그럼 우리 한번 되어 보는 거야. 가장 손쉽게는 나는 여자 옷 입고 너는 남자 옷 입는 거야. 짱~ 내가 치마 입으니 그럴 듯 하지? 음, 그런데 수염, 그 꺼칠한 수염... 맞아, 수염 깔끔히 밀고 한술 더 떠 연지꼰지 립스틱 바르고 퍼마머리에 그로테스크하게 여색만들기. 이만하면 록왕 마이크젝슨 뺨칠 정도 되지 않냐?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아예 정형외과에 가서 거세해버리자. 그리면 한국의 하리순지 허리순지 뺨치지 않으리! 너도...

지금 참 세월 좋다. 인간실존에 대한 존중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 모든 것을 정상, 적어도 이상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으니 말이다.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중국의 경우 봉건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개혁개방전만 놓고 보아도 남자가 여자의 옷 혹은 여자가 남자의 옷만 입어도 이상한 눈길은 약과고 性倒錯症이라 하여 병적으로 취급했다. 우리 엄마의 경우는 그 어려운 세월에 남편 모실내기에 6형제 키우느라고 내내 우리 남자들 옷만 주어 입다보니 별명도 어느새 ‘남자’로 되고 말았다. 사실 우리 엄마는 너무나도 여성스러운 여린 마음가짐의 여잔데 이런 ‘왕청’ 같은 별명이 척 씌워지니 마음고생 오죽 했겠습니까! 그때 정말 바지만 놓고 봐도 남자의 것은 앞으로 타졌고 여자의 것은 옆으로 타졌지. 그리고 井水不犯河水라 男女바지受授不親했지.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자 여자들 바지 어느새 앞이 타진 남자바지로 둔갑하고 말았지. 진 청바지 하나만 놓고 보시오. 거기에 무슨 남자바지 여자바지 따로 있는가? 거저 입으면 다지. 사실 바지만의 얘기가 아니다. 머리모양새만 보아도 남자가 장발을 하든가 여자가 단발을 하든가 하는 것이 이제는 희한한 일이 아니고 요새는 젊은 애들 남여 공히 알락달락 염색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화장도 여성점유물인가 했더니 어느새 남자화장품세트들도 출품하면서 남녀 공히 깔끔하고 화사한 화장발을 추구한다. 그리고 남자애들도 귀걸이, 목걸이에 요란하다. 이 모든 것 性倒錯症? 단마디로 결론짓는 것은 무모.
현대는 탈중심에 획일적인 것이 무너지고 흑백논리보다는 다원가치가 존중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성적이고 편리일변도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로부터 남여 성구분에 있어 옷이나 화장 같은 전통적인 형식적 구분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형식적 구분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현대정형외과의술을 통한 진짜 남자 혹은 여자가 되는 방도를 취한다. 멀리 얘기는 그만두고 한국의 하리수, 우리 연변의 모모양... 이들의 요술 같은 여성변신 그리고 당당하고 화려한 노래춤판, 현대과학과 개성적 삶 추구의 개가에 다름 아니다.

나는 언젠가 태국에 갔다가 게이들의 쇼구경을 보게 되었다. 게이, 남자들이 여자로 변한거. 중국말로는 人妖라 한다. 좀 섬뜩했다. 그런데 직접 그녀들을 접하는 순간 나는 그만 입을 짝 벌리고 말았다. 그녀들은 하나 같이 미끈하게 잘 빠지고 쭝쭝쫑쫑 여성적 性徵도 뛸 데 없는 비너스. 人妖가 아니라 진짜 귀신이라도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들이 관광객들의 돈을 노려 폼 잡고 서 있거나 쇼를 하고 지어 몸까지 판다고 하니 좀 서글퍼났고 씁쓸해났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들 가운데는 돈을 떠나서 정말 여자가 좋아서, 여자로 사는 것이 부러워서 게이로 된 순정의 여자가 있다는데 대해 나는 눈을 새롭게 크게 떴다. 그럼 그렇겠지. 나는 보아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우고 당당하고 멋지게 포즈를 취한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 나는 그녀들과 사진을 빵, 빵, 빵 찍었다. 이런 게이들은 수명이 짧다고 한다. 30~40대가 인생막판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또 서글퍼났다. 좀 안타까워났다. 그 꽃 같은 여자들... 그러나 또 다음 순간 好死不如懶活보다는 ‘하루를 살아도’ 살고 싶은 삶을 추구한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코마루가 찡해나며 몸에 와닿는 데가 있었다. 우리는 다 好死不如懶活라 두더지 같은 삶을 살진데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사람 사는 것이 참 안 쉽다.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눈 하나 찍 감고 대개 過一天算一天 되는대로 살아간다. 세상 만화경에 요지경이라 어떤 사람은 딱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데 혹은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만 여자 혹은 남자로 태어나 버렸다. 우리 주변에 천성적으로 남자같이 생긴 여자 혹은 여자같이 생긴 남자 그리고 목소리에 몸가짐 자체도 그 식이 정식인 여자 혹은 남자가 없지 않아 있다. 한국에 탤런트 이정섭씨 키꼴은 장대하되 전형적인 이 케이스. 그는 오히려 이 케이스를 십분 활용하여 크게 뜨는 것 같다. 내 짜개바지 친구놈 하나는 장가를 들기만 하면 한발에 차인다. 생김생김도 그렇고 노는 것도 그렇고 여하튼 남자 맛이 하나도 없다고.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그 모양새다. 그래서 그 자식 살맛이 죽을 지경이라면서 내내 인상 쓰고 다닌다. 나는 그 자식 보기가 하도 딱해서 야, 니 그 하리수처럼 카 해버리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 자식 처음에는 어, 놀라운 표정을 짓더니 다음 순간에는 정말 그럴까 하며 환한 표정을 짓더라. 사람들 살아가다보면 남자로 태어난 것이 힘들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힘들 때가 있다. 그래서 자연히 남자가 되고 싶고 여자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임을 생각할 때 이것이 비극적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가능성 차원에서 비극을 희극으로 전환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의 하리수, 우리 연변의 모모양, 태국의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 모두들 무난히 이런 삶의 지혜를 잘 구사한 모델들이다.

인생은 선택이고 창조이며 이것이 값있는 것이라 할 때 삶의 지혜를 구사하는 性倒錯적인 삶의 추구도 멋진 인생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성을 바꿔 입는다는 性倒着이라 부르고 싶다. 그럴진대 이것은 남자가 여자 브래지어를 끼거나 란제리를 입는 것 같은 그런 해프닝을 피우는 症적인 性倒錯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사실 현대 한국이나 미국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인 나라에서는 性倒錯症을 錯을 着으로 바꾸고 症을 거세해버린 性倒着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의 경우는 지난 세기 90년대에 이미 性倒着적인 논의가 매스컴에까지 오르면서 무엇 이상할 것 없는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동성애자들의 천국. 동생애자들의 근본 심리기초의 하나가 바로 性倒着에 있다. 생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심리도 진짜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는 동성애가 성립되지 않는다. 동성애가 성립되자면 동성애 사이 적어도 한 사람이 이성의 심리적 경향을 가져야 한다. 동성애는 이성애의 갈등 및 불화, 불편을 커버해줄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인류의 이성애에 못지 않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비근한 예로 고대 희랍, 로마는 넘쳐나는 인구조절을 위해 의식적으로 동성애를 조장했기에 현대 미국보다 더한 동성애천국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동성애는 지난 세기 50~60년대까지만 해도 불법적인 변태적 존재이고 사람들의 눈에 나는 이상한 존재였으며 동성애자 자체도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아니라 어딘가 주눅 들고 꾀죄죄한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70년대부터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너그러워지고 포용력이 커지면서 그리고 동성애자 자체가 당당하고 떳떳이 사회에 진출하여 자기네들의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현재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해 정상으로 보게 되는 시각교정을 했고 일부 州에서는 동성애를 합법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것이 점점 미국식 인권의 한 내용을 이루는 추세로 뻗어가고 있다.

고대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 임금의 ‘3천궁녀’들 사이 그리고 궁의 太監이나 內侍들 사이에 특정한 환경 하에서 ‘꿩 대신 닭’이라는 식으로 동성애의 ‘향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말에 ‘가시나’라는 말도 고려 공민왕 때 왕궁에서 곱게 생긴 남자애들을 男扮女妝시켜 동성애 파트너로 삼은 ‘假戱男’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동성애는 일개인의 향락에 부수적으로 어쩔 수 없이 생긴 비극적 색채가 농후하다. 사실 중국고전이나 한국고전에 동성애를 취급한 내용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국 <적벽가>에서 조조 군사들의 낭패상 서술장면은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인간은 분명 이상애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도 있는 듯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실존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자세, 그러면서 중국식으로 理解萬歲의 풍조가 일어나면서 동성애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보편적인 시각교정을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문화의 시원 및 주류를 이룬 중국에서조차 몇 년 전 동성애를 다룬 <覇王別姬>라는 영화가 히트 칠 정도니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개방, 이해 내지는 포용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성애를 포함한 성도착증이 무의식적인 性倒錯症이 아니고 의식적인 性倒着일 때 그것은 적극적인 바람직한 인생자세로 보아 무방하다. 고대 희랍에 재미나는 신화 하나가 있다. 우리 인간은 원래 남녀동일체였다 한다. 그래서 그때 총명과 힘이 넘쳐났다 한다. 그러니 신의 왕 제우스가 위기감을 느껴 칼로 우리 인간을 내려쳤다고 한다. 이로부터 인간은 남녀가 각기 반쪽으로 떨어져 나갔는데 우리가 이성을 그리워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은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으로의 회귀라는 것이다. 性倒着, 어쩌면 이런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입는 것이다.

유명한 심층심리학자 칼 • 융의 관점에 의하면 남자의 무의식속에는 아니마라는 여성적인 요소가 있고 여자의 무의식속에는 아니무스라는 남성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사나이대장부가 남이 안보는 데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로 무의식속의 아니마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다시피 우리의 무의식세계의 남성 혹은 여성은 의식세계와 다른 성적 경향을 추구한다. 심층심리학 차원에서 무의식적인 性倒錯症은 바로 여기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의식적인 차원에서 컨트롤하고 승화시킬 때 性倒着적인 추구가 될 줄로 안다.

性倒着, 말이 쉽지 현실사회에서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통념은 생리적 특징에 바탕하여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의 역할분담을 강요받아 왔다. 여기에서 벗어날 때 그 사람은 이상한 존재로 지목되어 왔다. 이로부터 정신적 압력 내지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과학적인 의학기술도 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그런 단계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놓고 볼 때 남성이 여성에로의 형식적인 생리적 전환은 쉽지만 여성이 남성에로의 그것은 어렵다. 이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하여 준다. 그리고 그것은 태국의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처럼 생명감소의 후유증 같은 것도 감수해야 하는 희생도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의식 차원의 性倒錯症을 의식차원의 性倒着으로 대체, 승화시키는 만큼 간단하거나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性倒着, 정말 자유자재로 성을 선택하고 소신껏, 마음껏 살아보는 삶은 살 수 없는지? 나는 불교, 아니 내 나름대로의 윤회설을 믿고 싶어졌다. 이 세상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저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났으면 저 세상에서 남자로 태어나는 윤회설 말이다. 이로부터 나 자신의 ‘반쪽’ 성을 다 살아보는 멋지고 완미한 인생이 되었으면 한다.

200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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