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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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히즘과 마조히즘
2005년 04월 08일 00시 00분  조회:4671  추천:73  작성자: admin
사디히즘과 마조히즘

인간의 심층심리에는 주동적으로 공격하고 정복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만족하는 사디히즘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만족하는 마조히즘 경향이 있다 한다. 이것이 표층심리적 경향으로 표출될 때 외향적이요, 내향적이요 하는 것이 되겠다.

성별적으로 볼 때 대개 남자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여자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거시기 자체가 그렇게 되어 먹었다 한다. 남자는 노출형이고 고사포식인데 반해 여자는 숨긴형이고 벌린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남자가 주동이 되고 여자가 수동이 되면서 남자는 삽입의 배설로 만족을 보고 여자는 받아들이는 포만감의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개인성향에 있어 일반적으로 리더심이 강한 사람은 사디히즘적이고 일반 愚衆은 마조히즘적이다.한국정치의 거물들이였던 박정희, 깡마른 체구에 냉랭한 냉기, 전두환, 독기 서린 눈에 꼭 다문 입, 이들 독재자들은 실로 카리스마적인 사디히즘자들이다. 이에 반해 일반 愚衆들은 개인숭배에 눈이 먼 마조히즘자들이다. 이런 마조히즘자들은 카리스마적인 사디이즘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인종적으로 볼 때 대개 서양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동양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 서양의 동양에 대한 무자비한 피비린내 나는 식민지, 반식민지 침략 및 奴化는 거창한 정치, 경제적인 요인이 주된 원인이 되겠지만 그들의 사디히즘적인 호전성도 무시못할 요소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반해 거듭되는 실패에 동양의 자기기만적인 아Q식 정신승리법 대응양상은 변태적인 마조히즘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문학작품만 놓고 보아도 서양 사람들이 높게 사는 인물들은 고대 희랍 [오디세이]의 오디세이, 중세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현대 [노인과 바다]의 샨타야고... 이들 모두 뛸 데 없는 사디히즘적 영웅들이다. 오디세이, 10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10년간 갖은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는 자기 마누라에게 집적거리는 불한당들을 일거에 무찌른다. 파우스트,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탐구하고 추구하고 정복하는 거인, 하늘이 감동하여 천사들이 그를 모셔간다. 샨타야고, 어깨는 처지고 허리는 굽고 한물 간 노인인 듯하다. 그런데 그는 늙음에 不服輸하는 젊음의 기백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젊음을 증명하려는 듯 허술한 쪽배에 작살 하나 달랑 들고 파도가 사품 치는 허허 바다로 상어를 잡으려 나간다. 끝내 잡고야 만다. 그래서 뼈만 남은 다 뜯기운 상어만 달고 돌아왔어도 그는 한량없이 기쁘기만 하다. 우리 문학작품을 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고대 [단군신화]의 곰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자신와의 힘든 극기 싸움을 한다. 그래서 그는 끝내 성공하여 韓민족의 始祖母가 된다. 중세 고려가요, 모래에 심은 닦은 밤이 싹이 나고 철소가 풀을 다 뜯을 때 유정하신 임과 갈라지겠다는 불가능한 상황설정의 애절함, 일연의 ‘戀君之詞’로 대변되는 임노래, 현대 한용운의 ‘임의 침묵’, ‘임은 갔습니다./.../그러나 내가 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운운, 윤동주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우리는 문학의 主調는 마조히즘적이다. 정말 우리는 [애국가]라는 國歌에서조차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상징인 동해물과 백두산을 마르고 닿는 축소지향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로 거론하는 거지? 몸에 배인 뛸 데 없는 너무나도 마조히즘적인 발상.

문화유형 상에서 생계수단 차원에서 볼 때 유목문화, 상업문화, 해양문화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농경문화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유목문화, 수초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동물살상을 기본으로 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호전성, 공격성, 정복성이 몸에 배인다. 멀리꺼는 그만두고라도 우리와 가까운 칭키스칸 몽고 鐵蹄의 동서양 종횡무진, 그리고 동북산간벽지에서 일어난 누르하치 만주족이 일거에 중원지구를 휩쓸며 대원, 대청제국을 세운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상업문화, 일정한 코스에 따라 나다니며 장사를 생계의 기본수단으로 하는 상업문화는 ‘장사군 제 아비도 속히’는 매정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사가 잘 안 될 때는 날강도로 변하는 무지막지함이 있다. 중국 실크로드의 길이 평화의 길만이 아니고 근대에 서양 사람들이 장사, 무역의 기치를 내걸고 결국 전쟁의 불꽃을 튕긴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해양문화, 바다의 생물에 대한 살상을 기본으로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면에서는 유목문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럴진대 이들도 호전적이고 공격적이고 정복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유명한 중세 북유럽의 亦貿亦盜, 아니 실은 貿의 간판을 걸고 盜의 행각을 벌인 바이킹은 말 그대로 海盜, 해양문화의 사디히즘적 성향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된다. 농경문화는 유목문화, 상업문화, 해양문화와는 다르다. 농경문화, 日出而作日落而息, 순응적이다. 그리고 春耕夏耘秋收冬藏, 한 자리에서 맴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연의 흐름에 맡기며 때를 기다려 행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은 수동적이고 받아들이는 생활양식에 안주할 수밖에.

문화유형 상에서 지정학적 차원에서 볼 때 섬문화 쪽이 사디히즘 성향이 강하고 대륙문화은 마조히즘 성향이 강하며 반도문화는 그 중간으로 보면 된다. 섬문화, 고립된 외로움 그 자체. 밖의 세계는 항상 호기심을 유발하는 유혹의 존재. 그리고 단절된 세계는 항상 무엇이 모자라고 부족한 듯한 허전함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유혹의 세계로, 모자람이 없는 풍성한 세계로 짓궂은 진출을 시도한다. 중세 한반도와 중국에 대한 倭寇들의 소란, ‘도자기전쟁’이라고도 일컫는 조선조의 임진왜란, 그리고 현대사에 있어서 조선조병탄, 나아가서 중국대륙침략, 그리고 동남아, 더 나아가 태평양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침략의 마수를 뻗친 일본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대륙문화, 地大物博 모자라고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 부러울 것도 없다. 여기에 知足者常樂의 생활철학이 가미되니 더 이를 데 있는가. 그러니 눈을 밖으로 돌려 신경을 쓰며 남을 공격하고 정복하고 할 필요가 없다. 이로부터 마조히즘적인 평화주의가 싹튼다. 중국이 전형적인 보기. 중화주의, 내가 세계의 중심. 大海는 百川을 받아들이는 법이라, 오너라 내게로 스타일이다. 大智若愚식 배포유한 큰 스케일의 마조히즘. 그래서 동서남북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라고 얕잡아 보면서도 굳이 무력으로 공격하고 정복하자고는 안는다. 물론 공격하고 정복하더라도 그것은 諸葛亮식 ‘七擒七縱孟獲(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주어 진심으로부터의 감복을 얻어내는데 있다. 오히려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 시끄럽게 자꾸 집적거릴 때는 만리장성을 쌓아 못 들어오게 막아버린다. 그러다가 일단 들어오면 마조히즘적인 醬독문화로 흔적도 없이 녹아낸다. 만족에게 당하면서 오히려 만족을 녹여낸 漢族이 아닌가. 반도문화, 대륙문화와 섬문화 사이. 섬문화적인 막힌 데가 있다. 그러나 대륙과 연결되어 숨통이 틔워있다. 한반도가 전형적임. 韓민족은 외래 침략세력에 대해 가만히 앉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의병, 의렬단, 독립군, 의용군, 광복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말 그대로 사디히즘적인 줄기찬 항전이다. 여기서 잠간 인도민족과 대비해보도록 하자. 근대에 들어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런데 인도는 사디히즘적인 폭력이 아니라 마조히즘적인 비폭력 즉 깐디 식의 무저항주의로 저항했다. 여기서 폭력에 대한 韓민족과 인도민족의 부동한 대응양상을 극명하게 볼 수 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국의 틈서리에서 부대껴왔다. 이로부터 마조히즘적인 사대주의라는 것이 싹트기도 했다. 조선조시기 중국을 대중화라 하고 스스로 소중화라고 자처한 것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된다.

사회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볼 때 정치, 도덕, 종교는 묘한 사디히즘이나 마조히즘 양상을 드러낸다. 정치라는 것은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이끌고 있으며 그것은 노선, 정책, 방침으로 현실성을 확보한다. 여기에 군대, 경찰, 법 등 강경한 조치들이 밑받침되어 있다. 그러니 정치라는 것은 사디히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종교라는 것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카리스마 앞에서 마조히즘적 심성을 키우는 것이다. 독실한 종교신자들이 수시로 기도하고 설교를 들으며 주기적으로 절대신과 교감하는 것은 이러한 심성을 키우는 구체적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청해의 라마교도들이 몇 천리를 몇 보 안팤에 절을 해가며 티벳에 가서 달래라마 발등에 입술을 맞추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는 것, 천주교에서 고해성소를 하는 것, 이슬람교에서 천신만고 종교성지-메카를 순례하는 것은 그 심성의 가장 구체적이고도 집중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도덕이라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중간양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다 갖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도덕, 사람의 기본 징표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도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도덕은 다분히 사디히즘적이다. 그런데 이 도덕이라는 것이 일단 한 사람에게 있어서 완전히 생리화되어 내재적인 도덕률로 화할 때 그것은 마조히즘적이다. 톨스토이의 도덕적 자아완성이나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그 전형적인 보기로 된다.

사디히즘이나 마조히즘이 위와 같이 직설적인 도경을 통해서도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승화된 대리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쟁, 전형적인 인간의 사디히즘의 집단적 발로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더 노골적이고 무자비한 발로를 보게 된다. 포로 학살 내지는 노예화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된다. 포로문제에서 문명해졌다고 하지만 1차,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현대전쟁이라는 것도 인간의 광적인, 비이성적인 사디히즘의 발로임에는 틀림없다. 어찌 보면 그것은 대량살상 무기가 동원되기에 더 참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도 전쟁의 암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특히 냉전이 종식된 현 단계에 있어서 교류, 이해, 평화가 시대의 주요흐름으로 돋보이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인 전쟁은 점점 뒤안길로 사라지고 스포츠게임 같은 것이 부상되면서 새로운 사디히즘 발산통로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스포츠게임이 전쟁을 통해 발산하던 사디히즘을 발산하는 합리적인 대체통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문명이라는 것이다. 올림픽, 월드컵은 ‘세계전쟁’에 다름 아니다. 그 출전선수는 ‘전사’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런 ‘전사’들을 통해 싸움을 하고 있다. 여하튼 이기는 것이 장땅. 1등, 슛... 우리 ‘전사’들 장하다. 나도 이긴 기분. 그러면 ‘전승’축제. 온 나라가 들끓는다. 현대 인간들은 바로 이런 게임을 통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 아닌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대단함, 자부심을 느껴보려 하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스포츠, 축구팬, 광들을 양산하는 소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시기 우리 연변의 ‘오동’축구팀도 마찬가지다. 조그마한 촌구석에서 출범하여 전국 갑급 레벨에서 맹활약하고 1, 2강을 육박하며 맹위를 떨칠 때 우리 얼마나 속시원했던가? 천년 묵은 스트레스가 사디히즘적인 발산을 통해 하루아침에 깡그리 싹 풀린 개운함 그 자체다. 우리 연변 어렵고 스트레스 많이 쌓이는 곳인데 우리 연변축구팀 한 번 더 떨쳐보지. 요새 안 그래도 좋은 소식 들리던데...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이 스포츠게임을 통해 발산될 때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구잡이나 自虐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병적인 극단적인 표현이다. 히틀러, 게르만종족 우월론에 빠져 나치스로 나가 마구잡이식 사람 잡이는 사디히즘의 전형적인 병적인 표현이다. 현재 담배의 해독을 번연히 알면서도 自虐적으로 계속 피우는 것은 마조히즘의 전형적인 병적인 표현이다.

사실 인간은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을 같이 갖고 있다. 그것은 때와 장소에 따른 차이 및 많고 적게, 강하고 약하게, 주도적으로 부차적으로, 노골적으로 우회적으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치라는 것이 사디히즘적으로 많이 흘러왔다고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민주화의 물결이 일면서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때에 따른 부동한 표현양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적인 영웅도 돌아서서는 외로운 눈물을 흘릴 때가 있고 정에는 약한 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의 경우만 놓고 보아도 전반적으로 그들이 사디히즘적이라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마조히즘적 성향이 대단히 강하다. 기독교문화가 바로 그렇다. 왼쪽 뺨을 맞았으면 오른쪽 뺨을 더 때리라고 내밀라는 교리, 따지고 보면 마조히즘적인 깐디 식 비폭력무저항주의. 사실 이 기독교 자체도 사디히즘적인 데가 있다. 중세기 몸서리치는 마녀사냥, 종교재판소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전반 역사를 보더라도 서양 사람들은 분명 채찍과 당근 즉 사디히즘적인 武와 마조히즘적인 文의 논리로 행세해 왔다. 중세기 기사와 신부, 그리고 11~12세기 3차례에 걸쳐 아랍세계에 대한 기독교 십자군원정, 그리고 근대 한 손에 총, 다른 한 손에 성경을 들고 우리 동양에 대해 행한 침략은 그 전형적인 보기들이다. 일본사람의 경우도 보면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세 직접 사람머리를 베여보는 것으로 칼날을 실험해본다는 일본 사무라이, 그리고 하라기리(할복자살), 현대 ‘가미가제’자폭기, 남경대학살, 수많은 만인갱... 히틀러 못지 않는 광적인 사디히즘 발산. 일본사람 정말 무섭다. 그런데 일본인 개개인을 만나보라. 정말 순하디 순한 양 같다. 무얼 드시겠어요 하면 무엇이나 좋다고 하는 일본사람. 무의지적이다. 여기서 한국 사람과 갈림길이 생긴다. 한국사람 의지적이다. 무얼 드시겠어요 하면 이것, 저것 자기 의사를 분명히 나타낸다. 일본 사람 ‘곤니찌와’ 동시에 90도 허리 굽힙, 그리고 ‘이락샤이마세’ 입에 안 떨어진다. 일본 사람 분명히 마조히즘적인 데가 있다. 일본사람 겉과 속이 다른 이중얼굴이라는 말도 들을만 하다.

서양 사람도 좋고 일본 사람도 좋고 이들에게 있어서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극단으로 달리며 물과 기름처럼 조화되지 못하고 따로 따로 노는 인격분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좀 안스럽다. 사실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이라는 것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같이 놀아날 때 멋있다. 우리 민족의 고전적 민요 [이라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임은 ‘나’를 뿌리치고 무정히 떠난다. 잡아둘 수 없는 임. 소박맞는 ‘내’ 신세. 한 없이 서럽다. 그래도 원망 하나 없이 임을 보내는 듯한 애잔한 마조히즘적인 [아리랑]. 그런데 서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 발병이 난다’고 저주한다. 여자의 저주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단데... 이것은 사디히즘적인 사랑의 역설적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다. 김소월은 우리 전통 민요풍의 현대시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시가 운율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실 정서면에서 우리와 더 닿아 있다. [진달래], ‘나 보기가/역겨워 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역시 소박당한 여인의 비애를 읊는 듯하다. 그런데 그녀는 비애에만 잠긴게 아니고 가장 아름답다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꼿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며 가시는 걸음걸음 사분히 즈려밟고 가시라 하며 축복을 하는 듯하다. ‘즈려밟고’의 마지막 육체적 사랑갈구 운운을 떠나서도 전형적인 마조히즘적인 사랑이미지다. 사랑에 있어서 한 없이 착하기만 하고 무의지적으로 거저 따르기만 하는 마조히즘. 그런데 여기서 사랑의 매서운 빛발은 번뜩이고-‘나 보기가/역겨워 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첫 구와의 조응 대조 속에서 툭 쏜다. 갈 테면 가라, 미련도 두지 않겠다, 그러니 눈물도 없다 하는 식이다. 사랑의 사디히즘. 순하기만 순한 그런 숙맹에 가깝고 눈먼 사랑은 아니다. [아리랑], [진달래]-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의 動靜이 어울리는 멋진 여인상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사실 이런 멋진 여인상은 우리의 고전적 여인상-춘향에게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당겼다 놓았다 사랑의 고삐를 요리조리 요량하며 이몽룡과 사랑의 스토리를 엮어가는 춘향, 사랑의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을 너무나도 잘 갈무리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마디로 外柔內剛의 향긋한 춘향이라 한다. 사실 우리의 여자들은 다 이런 外柔內剛의 멋진 데가 있다. 행주치마, 외적이 침입할 때는 행주치마까지 동원하여 떨쳐나서는 우리네 여인들. 그러나 독수공방하며 그렇게 그리던 임이 오는 순간에는 버선발로 달려 나가다가도 어마, 옷고름만 쫑긋 물며 돌아서는 여인들. 사랑 안할 수 없다. 드센 기에 뻔뻔하기만 한 대국여자들, ‘하이하이’ 하며 한 없이 굽실거리기만 하는 섬나라 여자들에 비기랴!

200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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