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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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콤플렉스
2005년 04월 29일 00시 00분  조회:4067  추천:81  작성자: 우상렬
카사노바콤플렉스

카사노바, 전설화된 유럽의 희대의 바람둥이. 바람둥이임에 도덕적 질타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카사노바는 심심찮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뿐만 아니라 은근히 부러움의 대상으로까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사노바는 워낙 우리의 무의식심층에 있는 생명의식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식이 의식 차원으로 표출된 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바람기이다. 바로 이 주책할 수 없는 바람기를 일명 카사노바콤플렉스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다 죽는다. 相反相生, 이것이 우리의 생명의식을 기껏 고양시킨다. 남자사형수들이 죽음을 받는 순간에 생명의 씨앗을 뿌린다는 보고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초탈을 의미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추구, 우리의 가장 진실한 모습이다. 신선, 열반, 천당이 바로 이런 경지다. 종교라는 것이 다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선, 열반, 천당이라는 것이 실제로 가닿기 힘들고 몸에 와 닿지 않은 지라 우리는 가장 쉽게 본능적으로 와 닿는 ‘제2의 나’만들기에 몰입하게 된다.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긴단데 나는 무엇을 남기지? 내 새끼, 바로 그것이야! 그게 바로 ‘제2의 나’야.

그럼 이제부터 ‘제2의 나’만들기 출발. 아버지, 엄마, 오빠, 누나, 동생... 마구잡이로 싸잡아 하기. 난혼, 인류역사의 한 폐지. 고대 그리스신화는 전형적인 한 보기. 그런데 난혼은 근친상간에 의한 기형적인 악과로 우리의 생명의식을 좌절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시도를 해본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그럴듯하다. 특히 男少女多, 女少男多, 이런 특정적인 상황 하에서는 그럴듯하다. 우리 한민족이 전통적으로 알게 모르게 묵인해온 축첩제도, 그리고 현대 중동 아랍권에서의 이런 혼인방식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그런데 이런 혼인방식은 남자만의 혹은 여자만의 일방적인 생명의식의 고양밖에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 도덕률에 저촉되어 통로가 막힌다.

사실 인간의 생명의식과 현대적 도덕률 내지는 법은 상충일로를 걸어왔다. 이로부터 우리의 팔팔한 원초적인 생명의식은 많이 위축되고 고갈되어 왔다. 현대적 도덕률 내지는 법으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은 우리를 문명한 현대인간으로 만들면서 무맥한 퇴물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현대문명의 약과 독이다. 물론 인간은 현대문명에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본능적인 필사적 반항이 이어진다. 중국이나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不孝無后爲大, 남아선호사상에 기인한 애낳기 내지 씨받이, 그리고 현재 중국 계획생육 무색할 정도로 줄줄히 낳아대기는 그 보기. 여기서 不孝無后爲大, 남아선호사상은 우리 조상들의 끈질긴 생명의식에 다름 아니다. 子孫滿堂을 보아야 흐뭇하게 눈 감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조상들이 아닌가. 그리고 많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법적으로는 매음을 허용하지 않지만 사창가를 비롯한 음성적인 매음을 허용하는 것도 이런 생명의식의 발산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런 생명의식에 의한 강간이라는 악의 발생을 원천봉쇄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식은 한 민족의 독특한 풍속도나 시대상을 이루기도 한다. 세계를 휩쓴 거인-칭키스칸을 배출한 몽고종, 옛날 남자들 씨종자가 별로였다 한다. 그래서 타민족 건장한 남자가 손님으로 오게 되면 술과 안주의 향연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저녁 잠자리에 집주인의 아내나 딸을 동침시킨다는 것이다. 씨를 받기 위해서란다. 종족 보존을 위한 피의 논리를 떠난 안쓰러운 고육지책의 풍속도에 다름 아니다. 남의 얘기는 그만두고 우리 민족의 얘기를 좀 해보자. 6•25전쟁이 끝나 조선에서는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어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한다. 性比의 불균형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남아도는 여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깔끔하고 근엄한 사회주의도덕률에도 불구하고 성적으로 얼마간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현대도덕이나 법이라는 것은 운운할 여지도 못 된다.

미국의 권위성적인 혼인리셔얼츠의 앙케이트 조사에 의하면 인간의 이혼주기는 현대로 오면 올수록 짧아지는데 현재는 3년 좌우로 잡혀 있다 한다. 그러면서 이혼의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사랑의 권태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결혼은 황금으로 만든 집이야. 안의 사람은 나오고 싶어서 발광이고 밖의 사람은 들어가고 싶어서 발광이다 말이야’고 무심코 하는 농담은 바로 이것에 대한 좋은 주석으로 된다. 이것이 이른바 喜新厭舊에 다름 아니다. 우리말로 하면 바람기, 여기서 말하는 카사노바콤플렉스가 되겠다. 그럼 사람들은 왜 일부일처제의 사랑에 권태감을 느끼고 카사노바콤플렉스에 빠지는가? 역시 발랄한 생명의식의 充溢으로 풀이할 수밖에. 인간은 자기 밭, 자기 씨종자를 발광적으로 찾아다니다가 이것이다 하는 순간 자기 밭, 자기 씨종자에 꾸벅꾸벅 열심이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아침에 이거 별거 아닌데 하며 자기도 모르게 남의 것에 눈이 가게 된다. 인간은 항상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 이것을 사랑의 역학으로 풀이해보면 남자들은 항상 남의 밭이 좋아 보이고 여자들은 항상 남의 씨종자가 좋아 보인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 한다는 ‘여보당신’을 만났을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새로운 ‘여보당신’을 만나 또 한참 열심히 씨 뿌리고 받고 하다가 식상하고 멋쩍은 감이 들면 또 새로운 ‘여보당신’을 찾아 나선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것이 잘 안 된다. 얽히고 섥힌 ‘여보당신’ 관계에 새끼들이 중간에 쇄기처럼 떡 박혀 새로운 ‘여보당신’한테로는 寸步難行인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고 해야 옳겠다. 봉건시대의 3천궁녀를 거느린 황제나 현대의 사담후세인같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잡은 자들만이 실제로 이 꽃 저 꽃의 탐화봉접이 되어 자유자재로 날아보는 것이다. 요새는 돈의 시대라 돈 많은 사람들도 살판 만났다고 납 뜬다. 돈 많은 老板에 착착 붙는 ‘여비서’들, 고 얼굴 밑천으로 깜짝 한번 출연에 몇 만원, 몇 억원 버는 탤런트들, 오늘 만났다가 내일 갈라지는 것이 요즘 세태가 아닌가. 대개 별 볼일 없는 일반사람들보다는 황제요, 수령이요, 老板이요, 탤런트요 하는 지금 말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카사노바콤플렉스가 많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고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카사노바콤플렉스가 잘 발동된다는 말이 되겠다. 내 이 좋은 종자, 많이 만들어야지 하는 식으로... 사실 이 좋은 종자들이 흘레 할려는 개들처럼 서로 찾아 헤매다보면 바지치마 벗겨지는 줄 모르고 자기네들끼리 쉽게 의기투합이 이루어진다.

그럼 일반 사람들은 침 질질 흘리며 바라만 보고 있겠는가? 천만에. 이들은 문학예술을 통한 대리발산의 통로를 찾는다.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카사노바콤플렉스를 발산한 문학예술은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 왔다. 이른바 ‘프로노’는 그것의 노골적인 적나라한 보기가 되겠다. 사실 전반적으로 볼 때 서민의 노래인 민요라는 것은 성적인 요소를 떠나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카사노바콤플렉스의 문학적 전개를 좀 구체적으로 보면 서양에 있어서 카사노바 자체가 문학적 형상으로 승화되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중세기 가혹한 마녀사냥이 횡행한 마당에도 성모•마리아에 대한 사랑으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위장발산을 꾀했고 단떼의 경우에는 자기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짝사랑으로 ‘신곡’을 읊어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 자산계급 고전주의,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는 몰리에르의 <돈쥬앙>, 로렌스의 <챠탈린부인의 사랑>으로 성의 해방, 성의 아름다움을 고취했고 20세기 초 로댕의 ‘키스’조각은 영원한 사랑의 금자탑을 빚어놓았다. 중국이나 한민족의 경우를 보더라도 男女七歲不同席의 엄혹한 세상이건만 2☓8=16 청춘들의 一見鐘情의 사랑을 엮은 염정소설들이 그렇게 유행을 본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사랑의 백팔반기술, 기교를 전시한 <금병매>, ‘남자는 흙으로 빚고 여자는 물로 만들었으니 여자가 좋다’고 하며 내내 여자들 속에서 놀아난 가보옥을 부각한 <홍루몽> 같은 중국의 세정소설, 그리고 양소유의 팔선녀-여성편력을 기껏 펼친 <구운몽>, 조선판 <금병매>-<변강쇠전> 같은 조선의 세정소설은 당시 사람들의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전형적인 발산이다. 사실 이런 소설들뿐만 아니라 조선조말기 화가 김홍도의 世俗圖를 비롯한 春畵의 유행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전문 프로노 소설이나 그림이나 영화, 특히 요즘 세상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인터넷 사이트상의 색정이요 하는 것이 근절되지 않고 유행되는 것도 그 심층적인 무의식 차원에서 바로 카사노바콤플렉스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현대는 인간의 생명의식이 많이 존중되면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발산 기회나 장치도 많다. 세월이야 참 좋은 세월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카사노바콤플렉스에 한번 잘 못 놀아나 ‘狗破鞋’라는 누명을 쓰고 신세조지는 선남선녀들을 생각하면 참 불쌍도 하지. 이혼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 참 어렵다. 당사자끼리 이혼하겠다는데 무슨 시시콜콜 시비가 그렇게 많은지. 同床異夢, 貌合神離보다 낫지 않으리. 그리고 가령 이혼했을 경우에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존재로 취급받아 왕따를 당하거나 사회적 출로가 막힌다. 오늘날 젊은이들 보면 이혼을 식은 죽 먹기로 하는 듯하다. 미국의 경우는 5쌍에 3쌍이 하는 꼴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연길만 보아도 이혼율이 5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 개망태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보면 同床異夢, 貌合神離보다는 속궁합이 맞는 진실한 인생을 추구하는 현대 인간들의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이 합리적으로 가미될 때 오히려 그것은 생기발랄한 바람직한 삶이 될 것이다.

사실 현대 인간들에게 있어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이 그리 묵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것이다. 씨종자를 뿌렸으니 꼭 열매를 맺고 거두어 들이야 하는 법은 없다. 현대는 사이버 세계라 카사노바콤플렉스도 사이버 세계를 통해 기껏 발산할 수 있음은 물론 실제로 둘이 만나 맛있는 밥 한 끼 먹듯이 해제끼는 獵色雜技에 좋았어, 어, 좋았어 하며 홀가분하게 갈라지는 요즘 N풍경. 그들은 굳이 사랑의 결과물로서 쏟아져 나오는 그 새끼들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을 확인하려는 전통적인 발상에서 자유롭다. 그들은 오히려 의식적으로 그 새끼들의 출현을 막는다. 사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사실 그들은 단지 씨종자의 배설과 받아들이는 과정만으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을 발산하고 있다. 목적, 결과보다는 과정, 기술이 더 중요한 시대, 이로부터 현대의 사랑은 일종 즐거움의 추구 그 자체다. 물론 이 즐거움에는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도사리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獵色雜技, 현대의 사랑, 즐겁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부럽다. 마음껏 사랑을 하며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을 발산할 수 있으니. 그런데 무엇이나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긴다. 中庸之道는 영원한 진리! 에이즈, 다름 아닌 무절제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의 발산을 절대절명의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일종 징벌이다, 경고다. 그러니 아무리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의 발산이라도 진, 선, 미의 합법칙성,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절대 자유라는 것이 없으니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의 발산도 문학예술을 통한 대리만족을 받는 것도 현명한 처사가 아닌가 한다.

2005.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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