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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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의식과 예술
2005년 05월 08일 00시 00분  조회:5204  추천:63  작성자: 우상렬
인간의 생명의식과 예술

인간은 의, 식, 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제2차원의 가상세계인 예술을 추구한다. 이것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럼 인간은 왜서 예술을 추구하냐 하는 원초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예술,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생명의식의 담지자다.

인간의 생명의식은 무한하고 유상하고 실속 있게 살고 싶다. 그런데 현실적 삶은 생, 노, 병, 사에 우리에게 유한하고 무상하고 허무만 안겨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죽는다. 그래서 유한하고 무상하고 허무한 것, 그리고 죽는 것의 안티테제로 인간의 생명의식이 싹트고 고양된다.

차라리 죽어 바위가 될가...

옛날 끔찍하게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한다. 그런데 남녀칠세부동석에 사람들의 눈이 무서웠고 총각은 병역에, 부역에 끌려 다니다 보니 그들은 도저히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겨우 한번 만났다. 자기도 모르게 서로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는 자기네들이 부둥켜 안은 그 모습을 바위에 새겼다. 그 다음 둘이 동시에 그 바위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두 사람의 피는 그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볼 때 그들 사랑의 얘기를 외웠다. 이로부터 그 바위는 그들 사랑의 징표로 되고 그들 사랑의 얘기는 구구전승 되었다. 그들 짧았던 사랑은 영원한 예술적 사랑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한국트로트 <천년바위>도 인간의 이런 절규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인간의 유한을 무한으로, 인간의 무상을 유상으로, 인간의 허무를 실속으로 갈무리했다.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긴단데 나는 무엇을 남기지? 제2의 나-나의 씨종자, 나의 후예를 남기기. 이로부터 카사노바바람기는 발동되고 계획생육은 무색해진다. 인간의 고상한 사랑이라는 것도 원초적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을 하자면 무드가 무르익어야 한다. 그래서 손발을 놀리게 되고 엉치를 흔들게 된다. 이른바 춤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많은 예술 가운데 춤은 인간의 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많은 춤 및 그 사위는 직접 성적인 유혹이나 즐거움을 나타내는 데서 기원하고 있다. 一進一退하고 덮치면 눕는 탱고, 그리고 둔부 비비꼬고 흔들기가 키포인트인 룬바, 삼바는 뛸 데 없는 성희적인 춤. 그리고 중동이나 애급, 인도의 肚皮舞, 하와이민속춤인 草裙舞는 남자들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한 여자들의 비애 어린 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남자들의 성적 즐거움 및 생명의식을 고양시키는 춤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인간은 일회성적이고 한시적으로 끝나는 이런 춤만으로 성차지 않는다. 인간은 나 자신을 직접 새기고 그리고 찍어낸다. 조각, 미술, 사진, 촬영은 이로부터 생겨난다. 고대 애급 법왕들의 조각상, 그리스 올림픽 챔피언들의 조각상, 중국 진시왕릉의 병마용 등은 법왕이나 챔피언, 시황제로서의 영원함을 꿈꾼 소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유럽 중세의 교황이나 군주들의 그림, 그리고 우리 동양의 왕후제상이나 명인들의 영정들도 마찬가지다. 현재도 우리는 새기고 그린다. 여기, 여기 무엇을 새기거나 그리서는 안된다는 경고표지판이 버젓이 세워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승지나 유적지에 가보면 곳곳에 ‘갑돌이와 갑순이 모모일에 여기에 왔다갔음’하는 것들을 새기고 그린 ‘낙서’들, 그들은 명승지나 유적지의 영원함에 편승하여 영원함을 같이 누리려 한다. 그래서 ‘낙서’라 하기에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의식을 무시하는 것 같아 좀 안쓰럽다. 어떤 괴짜들은 사람의 손이 가 닿기 힘든 벼랑턱이나 아짜아짜한 곳에다 새기거나 그린다. 영원한 자기의 생명흔적을 남기려는 짓궂은 생명의식에 머리가 숙여진다. 사실 권력자나 명인들은 자기의 권력을 턱대거나 이름에 기대어 공권력으로 명승지나 유적지에 새기고 그리고 하지 않는가? 태산, 묘향산... 그게 그것이 아닌가 말이다. 현대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사진이나 촬영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사진을 찍거나 촬영을 하기 좋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생명의식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 자기 모습을 많이 남기는 것이 마치 이 세상에 자기의 생명연장이나 되기나 하는 듯한 착각 속에 우리는 산다. 결혼 사진, 번쩍번쩍, 촬영 쭉~ 그래서 렌즈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얼굴을 내밀고 싶다. 특히 한 자리하는 사람들은 사진이나 촬영에 더 집착이다. 사진을 찍으면 항상 모심을 받으며 앞줄 가장 중간자리에 앉게 된다. 촬영을 할 경우라도 클로즈업되는 가장 멋진 모습을 찍어주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맨모습보다도 더 멋진 모습을 사진이나 촬영에 담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진을 찍거나 촬영을 할 때 우리는 각도를 잡거나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화장을 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우리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예술화된다. 그러니 자연히 사진이 본 사람보다 낫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요새는 컴퓨터디지털이 알아서 예술처리를 해주니 정말 미운 사람 없더라. 고운, 멋진 모습만 남기게 되니 우리의 생명의식은 배가로 고양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 그러니 영원한 예술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본능인가봐. 굴원, 현실의 美政이상이 좌절되고 인생에 남은 것은 비탄뿐. 그래서 그는 죽음을 택한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자기 한생을 총화하는 장편서정서사시 <離騷>를 남긴다. 주관의 대상화를 가장 직실히 실현하는 시인만큼 온전한 굴원 자체를 이 세상에 남긴 셈이다. 그래서 사마천의 말처럼 굴원은 갔으나 <離騷>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뿌리고 있다. 사마천, 남자한테는 최대의 치욕인 궁형을 당했다.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도 그렇고 그 치욕을 설할 무엇을 남겨야 했다. 그는 ‘發憤著書’를 택했다. <史記>는 이렇게 산생되었다. 그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멀리 얘기는 그만 두고 우리 조선족문단의 거인 김학철옹을 보도록 하자. 그는 원래 군인이나 정치가나 되려고 한 듯하다. 그런데 불행이도 다리 한 짝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문학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그는 희대의 필회사건에 말려들어 좋은 세월 다 감옥에서 보내고 말았다. 그가 출소했을 때는 인생 60고개도 퍼그나 지난 시기.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무용자출입금지에 그의 문학금자탑 쌓기는 시작되었다. <격정시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리숭하게 사라져 가기만 하는 조선의용군 위용을 그리는 문학적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회적 불의에 도전하는 비수 같이 예리한 잡문들... 그리고 20세기 독재자들한테 안긴 직격탄 -<20세기 신화>. 그의 글들은 그의 인생체험에 가장 근접하고 있는 만큼 그의 생명의식의 직접적 승화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의 이런 글들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그는 우리 조선족의 노신으로 빛을 뿌리고 있다.

예술의 영원성에 대한 추구 내지 숭배는 인간의 생명의식까지도 포기해 가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에 몰입하게도 한다. 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 순수예술은 바로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이로부터 예술가들은 ‘미치광이’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런 예술에 몰입한 예술가들은 현실세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예술 사이를 오락가락하거나 전적으로 예술세계 속에서 사는 경우도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 반•고흐, 예술에 너무 몰입하다보니 마지막에 정신이 오락가락. 자기 귀를 칼로 베어내고도 아픈 줄 몰랐다 한다. 그리고는 귀 한 짝 떨어져 나간 자기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지 자화상을 그렸다. 우리 현대문학사의 김동인도 마찬가지다. <광염소나타>, 딸이 불에 타서 죽는 모습에서 멋있는 예술적 감흥을 느낀다는 아버지, 예술세계에서 망정이지 현실세계에서 이것은 분명 범죄다. 실제로 순수예술가들은 이른바 영원한 예술적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 범죄라는 의식도 없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를테면 실제로 강간을 해보며 일종 원초적인 생명 충동이나 힘을 느끼기, 그리고는 예술세계에 그 충동, 힘, 느낌을 담으며 생명의식을 영원함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이 지경이 되면 그 예술가의 현실적 생명의식은 종식을 고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의식에 위협을 주고 손상을 주기 때문.

현대의 많은 예술들도 생명의식의 고양에 다름 아니다. 현대문명의 인간소외를 다룬 모더니즘, 몸에 올가미가 씌워지도 어쩔 수 없이 웃을 수밖에 없다는 흑색유모아, 황당한 현실은 황당하게 맞설 수밖에 없다는 황당파, 喜皮笑臉의 다다이즘... 이들 예술은 비비꼬인 예술세계로 생명의식의 한 숨통을 찾았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무의식의 진실에까지 파고들면서 의식의 흐름, 자동기술법으로 무의식의 생명의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요새 포스트모더니즘이요 하는 것은 뒤죽박죽이 된 후기공업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생명의식의 고양으로 된다.

예술이 아무리 모더니즘, 한걸음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왔다고 하지만 인간은 제2의 가상세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하는 것 같다. 문신, 보디페인팅-알몸 자체의 예술화. 많은 종족이나 민족에게서 보게 되는 문신, 몸이 예술세계로 영원히 고착되는 한 보기. 문신의 연장선상에서 현대의 보디페인팅, 거추장스러운 옷은 필요 없단다. 몸 자체가 옷이고 예술이란 것이다. 요새는 종족,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세계적인 바람을 몰고 온다. 퍼포먼스, 행위예술, 인간의 포즈가 예술 자체로 승화된다. 인간이 예술 자체로 굳어지고 싶은 몸부림의 현대적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생명의식은 끊임없는 표출을 요구한다. 이래서 예술의 대상화니 발산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난다. 이런 대상화나 발산을 가져올 때 인간의 심신은 건강해진다. 적어도 꽁 해서 오는 암 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예술은 우리 인간의 영원한 제2의 생명체이다. 범은 배가 고프면 짐승을 잡아먹고 배가 부르면 잔다. 인간은 배가 고파도 예술을 하고 배가 불러도 예술을 한다. 인간은 예술적인 삶을 살게 되어 먹었다. 직접 창작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예술을 감상하거나... 물론 배가 부르면 자기가 직접 참여하거나 여유로운 예술세계에서 노닐고 싶어 한다. 수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 인간들이 너도나도 수필의 세계에 한번 쯤 빠져 보는 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우리 연변의 ‘어머니수필회’를 비롯한 수필의 보편적인 대중적 인기도 이것을 잘 말해준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으로서 자기 스스로와의 속삭임이다. 이런 속삭임에 제3자가 공감대를 형성하며 참여할 때 생명의식은 더 없이 고양된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허구다. 소설의 픽션적 특성이 그 전형적인 보기다. 그런데 사실 이런 픽션도 생명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방편임에 다름 아니다. 현실에서 진, 선, 미의 생명의식이 도저히 충족되지 못할 때 인간은 픽션의 이상주의, 낭만주의로 나아간다. 1이면 1, 2면 2식의 사실적인 묘사가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을 때 인간은 이백 식 의 비흥, 상징, 과장, 의인 등등의 수사법이 생겨난다.

인간의 생명의식과 예술은 니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니가 있어 완연히 하나로 녹아들은 경지. 인간의 삶은 이 경지에서 노닐 때 정녕 생명의식은 고양되고 예술은 영원한 것으로 된다.

2005.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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