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맑스주의교육을 받으면서 자란지라 프로레타리아를 가장 고상한 존재로 알았다. 가난하면 가난할 수록 고상하다는 그런 논리를 철칙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소학교에 다닐 때 大公無私한 工人階級이 못되고 自私自利한 農民階級이 된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니꼬운 눈길로 나를 보며 뇌까린다. 자식아, 工人이 좋기는 뭐가 좋다고 그래, 사람은 다 같은기라, 다 배가 불러야 사람노릇 하는기라. 그러나 나의 貧者편에는 드팀이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 바람에 사람들 좀 살만하게 되면서 내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어. 富者의 편으로 간 거야.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나한테 먹혀들어간 거야-진리로. 사람들 니 것 내 것 따지고 쫀쫀하던 데서 통이 커지고 대범해진 것이 나한테 와 닿은 거야. 적어도 손님접대에 각박하지 않고 호쾌해질 수 있는 것이 너무 멋있다 말이야. 나는 富者가 좋았어. 1990년대 초반 한국유학생활은 나의 이런 심지를 더 굳혔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서는 알게 모르게 맑스주의계급론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앉았다. 貧者상놈은 좋은 사람, 富者양반은 나쁜 놈 식. 그런데 내가 유학생활을 하는 한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貧者상놈의 각박함, 富者양반의 너그러움이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내가 다니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한국의 ‘공산주의대학’. 학비무료, 잠자리무료에 식비 거의 무료에 가까운 유로. 그러니 학비부담이 어려운 한국의 貧者상놈자제들이 많이 모여든다. 여기에 우리 중국유학생은 貧者상놈의 상농자제. 그런데 우리 중국 유학생들은 바로 이 한국의 貧者상놈자제들한테 더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른바 없는 놈들끼리 同病相憐이 아니라 서로 시기하고 암투하기,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아르바이트를 좀 하면 공부하러 왔는가 돈벌러 왔는가 하며 용속하게도 자꾸 돈 쪽으로 몰아붙이기. 원래 貧者는 돈에 민감한 법. 그러다가 ‘거러지’ 같은 중국유학생들이 자기네보다 돈 좀 잘 쓰는 거 같으면 배가 아파나기. 그때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중국유학생과 러시아유학생에게 특혜로 한 끼 식대 5백 원도 면제해 주었다. 그러니 돈 잘 벌고 돈 잘 쓰는 저 사람들한테 왜 무료지, 하며 뒤 공론이 숭숭.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일 가지고 대환지 뭔지 하는 것도 둬 서너 번 했지. 이런 와중에 오히려 鶴 立鷄群격으로 가물에 콩나듯 한둘이 와 있는 富者양반자제들이 어른스러웠다. 그들은 우리를 이해했고 아픈 우리의 마음을 많이 위로해주었다. 연구원을 벗어나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접한 한국 사람에 한해 볼 때 대개 貧者타입은 각박하고 富者타입은 너그러운 논리가 그대로 통했다. 꼭 富者라야 인심 쓰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富者의 넉넉한 인심에 많은 감복을 받았다. 富者들은 잘 베푼다. 어떤 富者들은 정말 멋있다. 가난한 중국 유학생의 자존을 건드릴세라 세심한 배려를 해가며 베푼다. 돈을 주어도 무조건 막 주는 것이 아니고 우선생, 이것은 우선생 장학금에 얹어주는 축하금이요 하며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준다.
한번은 내가 서울에 갔다가 버스역에서 연구원 들어가는 공중버스를 기다리느라고 안절부절 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수업 볼 시간이 각일각 닥쳐왔던 것이다. 나의 불안한 정상을 본 귀부인스타일의 부인이 영문을 물어왔다. 여차여차해서 그렇다고 하자 그는 다짜고짜로 고급승용차 한대를 손을 흔들어 세웠다. 그리고는 나의 여차여차한 사정을 말하며 좀 태워주라고 했다. 그러자 신사스타일의 승용차운전수는 흔쾌히 나보고 타라고 했다. 그리고는 죽 강의실까지 태워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운 김에 이름자나 남겨달라고 하자 그 신사남자는 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 걸 가지고... 하며 게면쩍어 하였다. 나는 냉혹한 금전관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活雷鋒’을 만날 수 있어 좀 어안이 벙벙해났다. 그때만 해도 중국의 승용차운전수들은 승용차운전하는 거 차체만으로 기고만장하여 시도 때도 없이 뿡뿡 경적소리 울리고 흙탕물 튕기며 내 보란 듯이 내달릴 때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본 한국사람’해서 어느 잡지에 대서특별해 내었다. 그리고는 방학 간에 집에 와서 이 얘기를 흩뿌리며 다녔다. 그러자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내 친구 하나가 피익 웃으며 한 마디 내깔렸다. 그거, 아무 것도 아니지, 미국에는 공중 교통도구가 없는 산속 같은 외딴 곳에 갔다가 길가에 서서 눈은 외딴 곳으로 팔아도 한 손만 들고 있기만 하면 태워주려는 승용차들이 척 앞에 와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거짓부리, 그 개인주의가 팽배가 미국에서... 하면서 부정은 하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졸부가 아닌 진짜 富者들은 마음이 그만큼 넉넉하다.
인심과 인간의 물질적 생활수준은 같이 가는 법. 쌀독에서 인심 나온다는 말은 영원한 진리. 중국의 고대 지성 맹자도 인간은 배부른 후에 부모를 알고 도덕을 알게 된다고 했다.
세계 제3차 심리학물결을 일으킨 미국의 심리학가 마쓸로는 인간의 심리 층차를 피라미드식으로 상승하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아래 부분이 생리수요인데 이것이 만족을 받을 때 안전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안전수요가 만족을 받을 때 귀속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귀속수요가 만족을 받을 때 존경의 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존경의 수요가 생겨날 때 자아실현의 수요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심리수요의 최고경지는 자아실현의 경지다. 이 경지는 생리수요→안전수요→귀속수요→존경수요로 진행되는 한층한층 높은 차원의 수요를 만족 받을 때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현 단계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그 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너무 고지식하게 기계적으로 본 허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쓸로의 이런 심리층차설로 볼 때 그래도 富者들이 자아실현의 경지로 나아갈 바탕을 갖춘 셈이다. 溫飽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貧者는 애초에 이 바탕이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몸에 배인 富者들의 베푸는 문화, 남한테 주고야 기쁜 마음, 자연재해 든 곳에 이름자 하나 남기지 않고 무조건 주기, 여기에 富者들의 자아실현의 경지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신사라는 것도 이런 베푸는 자아실현의 경지가 몸에 밴 모든 것이 넉넉한 富者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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