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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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流
2006년 06월 11일 00시 00분  조회:4419  추천:62  작성자: 우상렬
朝流

요새 무슨무슨 流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을 지칭하는 언어관습인 것 같다. 한국 바람을 일구고 있는 귀에 익은 韓流가 그 단적인 보기가 되겠다. 그래서 나는 우리 중국의 개혁개방 전에 일었던 조선 바람을 떠올려 본다. 나는 이것을 朝流라 부르기로 했다.

朝流는 뭐니뭐니 해도 영화를 필두로 꼽아야 할 줄 안다. 당시「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조선영화들이 중국으로 대거 들어왔다. 그때 조선영화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당시 조선영화 외에 다른 사회주의나라들의 영화들도 많이 들어왔다. 월남영화「阿福」, 알바니아영화「용감한 사람」, 유고스라바아영화「와얼트가 사라르궈를 보위하다」,「다리」, 소련영화「1918년의 레닌」등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있다. 당시 이런 사회주의권 외국영화들 가운데 단연 조선영화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 당시 우리 ‘안쪽’에서는 이런 외국영화들에 대해 별명을 달았는데 조선영화는 ‘又哭又笑’, 월남영화는 ‘飛機大炮’, 알바니아영화는 ‘勇敢的人’, 유고스라비아영화는 ‘와얼트’하는 식이었다. 우리 중국영화에 대해서도 별명을 달았는데 그것은 ‘新聞簡報’이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예술적으로 조선영화에 대해 가장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셈이다. ‘又哭又笑’니 보는 사람들의 눈물샘 웃음샘을 자극하여 희노애락의 감정을 잘도 유발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본령에 가닿았다는 말이 되겠다. 이에 비해 월남영화는 거저 대고 ‘미국 놈’들과 싸우는 영화로 비행기와 대포가 주메뉴가 되는 만큼 따분하고 중국영화는 정식영화를 돌리기 전에 시사교육을 위해 뉴스형식으로 먼저 돌리는 ‘新聞簡報’만큼이나 재미없다는 식의 비양조가 은근히 깔려있다. 1970년대 초반에 겨우 10살에 턱걸이를 한 나었건만 조선영화 한편 보는 것이 최대의 소원이었다. 그때 우리 ‘안쪽’에서는「꽃파는 처녀」를 시간대로 나누어 24시간 돌렸다. 매 상영시간대마다 당시 중국말 그대로 관객이 ‘暴滿’할 정도였다. 기억컨대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새벽 2시 시간대에 상영하는「꽃파는 처녀」를 보았다. 그때「꽃파는 처녀」를 보면서 관객들이 자기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로 온 영화관이 눈물바다가 되는 것이 참 가관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올 때면 모두들 손수건을 들고 상기된 얼굴에 눈물을 닦느라고 여념이 없다. 한번은 우리 짜개바지 친구 몇이「꽃파는 처녀」를 보았다. 울면 머저리, 하고 누가 울지 않는가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아, 니 울었다, 니 울었다 하면서 서로 놀려주기도 했다. 그때 물론 냉전의 이데올로기대립이 팽팽한 시기라 이런 사회주의권 영화들이 사상교육의 열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극단으로 발효된 것이 강청의 ‘八大樣板戱’ 조작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八大樣板戱’는 정말 재미가 없다. 거저 앵앵~ 하다가 만다. 일단 재미가 없으니 보기가 싫어 사상교육이 잘 될 리가 없다. 그때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조직하여 보았지만 ‘樣板戱’를 볼 때면 잠에 꼴아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조선영화는 일단 참 재미나다. 관객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당시 ‘용감한 사람’이나 ‘와얼트’로 대변되는 사회주의권 외국영화의 딱딱함과 경직성은 더 말할 것도 없고 ‘八大樣板戱’가 통판치는 중국영화도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사과 딸 때」나「꽃피는 마을」같은 조선영화는 희극편으로서 당시 희귀한 웃음을 선사하여 그 억압적인 시대적 분위기속에서나마 웃을 수 있었다. 후에 대학교에 입학하여 안 일이지만「꽃파는 처녀」같은 조선영화는 ‘감정조직’, 이른바 ‘감정의 축적과 폭발’ 등이라는 감정요소에 모멘트를 둔 문예이론에 바탕하여 예술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상교육을 진행하되 예술적 감명 속에 자기도 모르게 사상교육을 받는 진짜 ‘寓敎於樂’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영화처럼 사상내용과 예술형식이 드놀지 않고 잘 조직된 영화도 보기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조선영화「보이지 않는 전선」을 보고 특무들의 파괴활동에 경각성을 높였으며「금희와 은희의 운명」을 보고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느꼈고「피바다」를 보고 왜놈들을 미워하게 되었으며「영원한 전사」를 보고 불굴의 혁명투사가 될 결심을 하였고「압연공들」을 보고 노동자들을 따라 배울 결심을 하였으며「남강마을부녀들」,「세동서」를 보고 조선여성들의 위대함을 느꼈고「무명영웅」을 보고 적후공작의 매력을 느꼈으며「당의 참된 딸」을 보고 당원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다. 나는 그때 영웅이 되고픈 소년의 꿈에 들떠「영원한 전사」를 연속 두 번 보았고「무명영웅」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방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춘기에 들어서서는「꽃파는 처녀」의 꽃파는 처녀-花妮를 내 짝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때 마침 사촌 형님이 영화관입장권을 체크하는 일을 보는 지라 그 ‘後門’ 덕택에 나는 많은 조선영화들을 보고 또 보았던 것이다. 그때 조선의 무슨 공연단이 어디에 와서 공연하오하면 보지도 못하면서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나며 흥분되는 것은 또 어인 일인지? 당시 조선은 내 마음의 동경처였다. 언제 한번 조선에 가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내가 연변대학에 입학한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연변대학이 조선의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변대학에 입학하자 바람으로 두만강변으로 가서 맞은 편의 조선의 산천을 바라보는 것이 최대의 소원으로 되었다. 그래서 어느 방학간엔가는 삼합에서 온 우리 동창 집에 가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산천을 싫도록 보았다. 그리고 그때 삼합에서 텔레비존을 통해 조선 텔레비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는 소리에 마음은 얼마나 설레였으며 정말로 보고 듣는 그 순간은 또한 얼마나 숨가쁜 흥분의 도가니속에 빠져들었던가. 그래서 삼합의 우리 동창생과 몰래 좁은 여울목의 두만강을 건너 조선땅을 밟아보기도 했다. 그때 그 짜릿했던 느낌도 오늘까지 짜릿한대로 남아있다. 나는 이때부터 20년가까이 되는 2000년 새해 벽두에야 마음에 그리던 평양에 가볼 수 있었다. 그것도 1년간이나 분에 넘치는 융성한 대접을 받으며 체류했다. 그때 각종 행사때마다 보게 되는 조선의 예술공연에 감탄을 연발했다. 특히 조선노동당창건 55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연인원수로 10만명이 동원된 10만명 집단체조는 그 스케일이나 일사불란한 움직임 및 고난도 동작, 그리고 다양한 내용과 형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 와서 음악무용대학에 다니는 중국 유학생이나 교환교수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봐도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조선의 예술에 대해서만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며 극찬을 보냈다.

당시 조선영화의 특징으로 또 하나 꼽으라 하면 매 영화마다 주제곡이 꼭 있는 것이다. 어떤 영화는 주제곡뿐만 아니라 여러 노래가 나온다. 당시 조선영화 한편 돌리고 나면 바로 이런 영화주제곡이나 노래들이 유행되는 것이 현재 한국노래 유행되기와 맞잡이다.「꽃파는 처녀」를 돌리고 났을 때 ‘꽃사세요...’ 노래와 ‘천송인가 만송인가...’ 노래가 곧바로 ‘走紅’했는데 내가 그때 漢族 친구들 배워주기에 바빴다. 이외에「피바다」의 ‘우리 엄마 기쁘게...’ 노래,「당의 참된 딸」의 ‘포성이 울부짖는 전선길에서...’ 노래... 당시 히트 친 노래들이 많았다.

사실 朝流는 조선족의 조선으로의 回潮로도 나타났다. 똑 마치 현재 우리가 기를 쓰며 한국에 가려 하듯이. 1957년 반우파투쟁 때 민족주의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억울함을 호소할 때 없는 조선족들이 조선으로 밀입국했다. 그리고 1960년 좌우 중국의 3년 자연재해 때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되자 조선족들이 조선으로 대거 밀입국했다. 이때 우리 큰 형님도 대학 3학년 자퇴에 조선으로 건너갔다. 이로부터 우리 조선족의 ‘이산가족’의 기막힌 사연들도 많았다. 오늘날 韓流 때문에 새로운 ‘이산가족’이 생기듯이. 그때 조선에 가서 이밥에 명태국을 먹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때의 감격을 들먹이고 있다. 1970년대에는 정상적인 수속을 밟아 조선을 왕래하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도 이때 친지방문 즉 큰 형님을 만나보러 조선에 갔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가져온 납숟갈에 스덴리스젖가락이 얼마가 멋지든지, 그리고 나이론 양말은 터덜터덜하나마 얼마나 질기든지 주위의 漢族 친구들과 학교 반 친구들한테 자랑하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朝流의 여운은 적어도 1980년대 초까지 미쳤다. 나는 1981년에 우리 연변대학에 입학하여 와서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현재 愛得백화점 자리에 있던 인민영화관이었다. 조선영화「꽃파는 처녀」를 우리말로 돌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遼寧에서 온 몇 친구들이 우르르 같이 달려갔었다. 우리는 워낙 ‘안쪽’에서 漢語로 돌리는「꽃파는 처녀」를 보았던 것이다. 그날 우리말로 돌리는「꽃파는 처녀」를 본 감동은 아직도 가슴에 아련히 남아있다. 그때 내 입에서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의 하나가 바로 나의 고향인 沈陽의 市歌었다. 沈陽 市歌는 워낙 조선영화「꽃피는 마을」의 주제곡 멜로디에 새로운 가사를 써넣은 것이었다. 그때 우리 沈陽 市歌는 매스컴을 타면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나는 그때 내 고향의 市歌가 조선 노래 멜로디를 띠었다는 그 한가지만으로 알게 모르게 얼마나 가슴이 뿌듯해 났는지 모른다. 朝流는 적어도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바람, 즉 日流에 밀리기 전까지 인기를 얻었다.

朝流, 20여 년 전 내 기억속의 아름다운 회억의 한 풍경이다. 이제 언제면 다시 그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

2006.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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