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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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가 君子라
2008년 05월 11일 21시 39분  조회:4293  추천:14  작성자: 우상렬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가 君子라


연변대 우상렬


나는 남영전 선생이 우리 민족의 토템 운운하며 어줍잖은 이른바 42수의 토템시를 들고 나올 때 그런대로 그렇고 그런 것으로 보아왔다. 일종 가장 종족적이고 민족적인 토템을 운운하니 知之不知를 떠나 그 민족심이야 높게 사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알량한 생각에서.


  그런데 남영전 선생이《도라지》잡지 2005년 3월호에 발표한 ‘논문’《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를 보고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나의 참을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2006년 11월 18일자로 ‘남영전 큰 형님께 좀 여쭤봅시다’라는 편지 한통을 인터넷을 통하여 띄웠다. 그리고 그 편지 끝에 ‘좀 대답을 해 주세요.’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런데 ‘남영전 큰 형님’은 오늘 이때까지 감감무소식이다. 무언이 승낙이라고 나는 남영전 선생이 나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남영전 선생이 상기 ‘논문’을 재탕에 또 몇 탕까지 한다니 실은 무언의 항변을 하고 있는 줄로 안다. 남영전 선생이 조성일 선생과 김관웅 교수가 그렇게 좀 나와줍시사, 우리 같이 시시비비를 논해보자고 하는데도 묵묵부답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무언이나 묵묵부답은 남영전 선생의 일관된 논쟁행태라 해야 하겠나...

  
그런데 이 문제는 무언이나 묵묵부답으로만 넘길 일이 아닌 줄로 안다. 워낙 민족의 뿌리나 민족의 정체성에 관계되는 대시대비의 문제이니깐. 조성일 선생이나 김관웅 교수가 그렇게 발 벗고 나서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는 이 대시대비의 문제 상에서 조성일 선생이나 김관웅 교수와 인식을 많이 같이 한다. 나는 일단 남영전 선생의《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를 논문으로 보기 거부한다. 적어도 인류의 다원기원설에 대해서는 전혀 무시하고 단일기원설만 고집하는 학문적 편향, 종족적 특색 및 유전자감식의 추궁을 당해내지 못하는 인류의 아프리카 공동조상설, ‘단군신화’에 대한 피상적인 풀이, 우리 민족의 갈래나 이동 및 족보 등에 기초한 기원풀이 등은 편파적이고 현상적이며 무단적인 면을 많이 노정하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설픈 心證적인 주장이 되고 말았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우리 禹가도 漢族들 禹임금 禹에서 오고 그 후예라니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는데 어쩐지 좀 찝찝한 데가 있는 데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자꾸 재탕을 하지 말고 상반되는 관점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따져보고 고고학이나 문헌 등 여러 방면의 증거를 더 확보하며 피상적인 논의보다는 보다 내실을 기한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 자꾸 재탕을 할 때 그것은 일종 아집과 만용으로밖에 안겨오지 않는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필자는 ‘남영전 큰 형님께 좀 여쭤봅시다’에서 얼마간 전개한 것으로 사료되니 여기서는 이에 그치도록  한다.


그럼 이제 남는 문제는 이런 ‘남영전현상(남영전 선생 관점이나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있기에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계시’이다. 이런 ‘계시’는 그 ‘현상’이 산생된 근원을 잘 알게 되면 자명해 질줄로 안다.


그럼 남영전 선생이 왜서 이런 사상누각을 만들어 냈겠는가하는 문제부터 알아보자.


顯名주의-이름 드날리기. 현대는 이름 날리기 대단히 좋은 세상이다. 남이 다 동쪽으로 갈 때 외고집으로 서쪽으로만 가도 된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주류 관점과 다른 외관점을 고집하면 이름을 드날릴 수 있다. 남영전 선생의《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는 사학계나 인류학(체질, 문화), 민족학 등 학계의 주류 관점하고는 다른 혹은 정반대의 관점을 피력함으로써 눈을 ‘번쩍’ 띄게 한다. 나는 처음《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라는 ‘논문’제목을 대할 때 토템문화야 말로 가장 종족적이고 민족적인 것이니 우리 현대인간들이 이것으로 거칠은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가자. 여기서 우리 민족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의 독특한 토템문화로 이 세상에 군림하자하는 식의 정상적인 논리로 논의가 전개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정반대다. 공동조상에 같은 토템문화로 인류가 기원하고 흘러왔으니 우리 인간은 다 형제고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무슨 거추장스러운 종족이고 민족이고를 떠나 圓融의 세계를 이루자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우리 민족은 華夏族의 곁가지니 거기에 동화되도 무방하고 어쩌면 당연지사라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인류의 대동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듯하여 그 스케일에 쇼크 받고 신기했다. 그런데 그것이 시적인 낭만을 외치거나 동화적인 세계를 보여준데 불과할 때 그것은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신기루는 현란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에 눈길을 빼앗기고 좇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잠간뿐인 것,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남영전 선생은 이 신기루에 기댄 虛名을 위해서 그 힘에 겨운 거창한 논의를 전개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영전 선생은 워낙 우리 조선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그래서 美名도 많이 나 있는 줄로 안다. 그런 만큼 그런 虛名을 위해 신경 쓸 소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和諧사회-조화로운 사회 만드는데 기여하기. 현재 중국의 국책의 하나는 바로 和諧사회-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있다. 참 멋진 사회이상이다. 매개 중국 사람들은 여기에 동참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남영전 선생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듯하다.《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는 여기에 바쳐진 ‘논문’같다. 이 ‘논문’의 기본 모토가 ‘圓融’이 아닌가? 남영전 선생은 그 어느 시집제목도 이 ‘圓融’으로 했고 결국 이 ‘圓融’이 남영전 선생의 하나의 토템으로 승화되고 있다. ‘圓融’이나 和諧가 많이 닮았지 않은가? 그 동기와 취지는 전적으로 긍정할 만 하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종족이나 민족적인 실존을 떠난 또는 그 실존을 ‘圓融’과 대립되게 보는 근본적인 관점에 있는 줄로 안다. 현 단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和而不同, 同而存異의 사고방식 및 가치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다원가치존중하고는 거리가 있다. 쉽게 말하면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는 변증법증 논리가 통하는 圓融으로 가는 것이 정도다. 이렇게 놓고 볼 때《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를 비롯한 남영전 선생의 관점이나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和諧사회-조화로운 사회 만드는데 정말로 기여하자면 그렇게 성급하게 논리적인 비약을 하거나 현상에 머물고 心證적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그런 만큼 남영전 선생은 근본 반향전환을 하거나 관점수정을 해야 할 것이다.


‘남영전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시각에서 논의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일단  顯名-이름 드날리기와 和諧사회-조화로운 사회 만드는데 기여하기로 나름대로 짚어보았다. 이에 대해 남영전 선생은 전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현재 나로서는 남영전 선생의 無知나 莫知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안 그래도《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에는 이런 無知나 莫知가 많이 눈에 띈다. 민족개념에 대한 풀이 하나만 놓고 보자. 민족학에서  민족에 관한 개념에서 혈연적인 요소는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중요한 요소를 배제하고 문화적인 요소를 강조하며 민족을 문화적인 차원에서 나눈단다. 이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기본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사실 민족을 문화개념으로 이해할 때 민족은 사라지고 만다. 문화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쉽게 그런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종 문화의 함정이기도 하다. 이른바 세계화라는 것도 실은 보편타당성의 기치 하에 모종 문화를 일방 통행시키려는데 문제가 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민족보수주의로 흐르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혈연의 요소와 민족의 다른 요소, 이를테면 경제, 언어, 심리 등을 유기적으로 연계시키고 이런 요소 하나하나에 녹아든 문화를 논할 때 그 문화는 구체성을 띠고 진실로 독특한 민족적인 문화가 되는 줄로 안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의 민족적 논의가 의의 있는 것이지 거저 막연히 추상적인 논의로 흘러서는 하등의 의의가 없다.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아는 것이 가장 총명하다. 공자님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가 君子라 했으리라. 자기 스스로를 알 뿐만 아니라 용감하게 자기의 不知를 승인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知에로의 출발이고 비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영전 선생은 이 점 나보다 더 잘 알 것으로 믿는다. 워낙 중국어나 고문에 나보다 밝으신 분이니깐. 그럴진대 진실로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의 君子行을 하여 결자해지를 하는 것도 대단히 바람직한 줄로 안다,


2008. 4.19


남영전 큰 형님께 좀 여쭤봅시다


우 상 렬



  저는 형님께서 다년간 토템시 창작을 해오며 세계원융을 외쳐온데 대해 충분히 경의를 표합니다. 현실 실현가능성이야 제쳐두고라도 우리 인간이 원융으로 나아가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 인간은 형님이 추구한 세계원융과 비슷한 대동세계를 줄곧 추구해오기도 했습니다. 시는 과학이 아닙니다. 시는 세계원융이나 대동세계에 대한 인간의 아름다운 지향이나 소망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족한 줄로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님은 더 없는 인도주의자고 보편주의자로서 그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세계인의 아들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도라지》잡지 2005년 3월호에 발표한 론문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만은 저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님은 토템문화에 너무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형님은 독일학자 엥스트 ․ 카시르트의 토템관념을 《 <생명일체화>로 본 것을 전제로 하여 자연계에서 <모든 생명형태가 친족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원시인의<생명일체화> 관념은 (…필자 약) 따라서 자연계와의 조화를 이루고 인간 상호간의 형제적관계를 가져왔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융합을 실현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과연 토템이 이런 위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라마지 않은 인류의 영원한 가치인 《조화》, 《형제적관계》, 《세계융합》을 그래 토템이 이룰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엥스트 ․ 카시르트나 형님이 토템에 《생명일체화》를 허구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럼 가장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토템의 진실에 접근해봅시다. 사실 토템은 별 볼일 아닙니다. 토템은 정말 원시인의 ‘무지와 몽매’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지? 인간은 어디서 왔지? 이런 본능적인 뿌리의식에서 토템을 만들어낸 줄로 압니다. 그래서 그 별 볼일 없는 동식물이나 무생물들을 씨족 내지 종족의 시조나 조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원시인들은 다윈의 《종의 기원》같은 것들을 알 수 없었지요. 이렇게 볼 때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이 세상에 금방 온 원시인들의 왕성한 구지욕에서 토템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템은 약자의 논리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 좀 상상해봅시다. 그 황량하고 질서가 잡히지 않은 세상이 금방 열린 만황지초(蠻荒之初)에 인간은 어떤 존재였겠습니까? 인간은 약자입니다. 어디를 보나 두려운 존재뿐이었겠지요. 시커먼 밤의 장막, 윙웡 부는 바람, 꽈르릉 천둥지둥, 여기에 실제적으로 해를 끼치는 범이나 늑대 같은 맹수들의 횡포는 온통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도 잡는 간절한 심정으로 원시종족들이 자기를 지켜준다는 믿음의 허상 속에 일방적인 프로포즈로 토템이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원시인들은 바로 이 토템이 있음으로 하여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가져왔습니다. 이때 그 무슨 ‘배태와 생육의 각도에서 우리는 자연계야말로 모든 생물의 어머니라는것, 바꾸어 말해서 모든 생물이 자연계라는 이 공동의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운운할 여지가 못됩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자연이라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나온 여러 생물들사이에 친연관계’도 운운할 계제가 못됩니다. 그것은 처절한 양육강식, 적자생존의 원색적이고 야생적인 자연 그 자체입니다. 인간씨족 내지 종족들 사이의 관계도 여기서 예외가 아닌 줄로 압니다. 어머니-자연이나 ‘여러 생물들 사이에 친연관계’운운은 인간이 살아남고 배부르고 자연을 향한 인간의 횡포에 대한 리성적인 반성을 하게 된 지금에 와서 운운하게 되는 얘기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토템에 대해 원시인들은 존경스럽고도 두려운 존재 즉 敬畏의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토템은 하나의 기치로 되고 집결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신성시하는 터부문화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저는 형님의 《토템은 하나의 기치이고 일종의 정신이고 거대한 응집력이고 형제와 같은 뜨거운 정이며 전 인류가 함께 안고있는 아름다운 리상이다》고 결론 내린데 대해 동감을 표시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원시인들은 무생물조차 토템으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사실 원시인들은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생명이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른바 이심비심(以心比心), 어기류추(於己類推)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희로애락을 느끼니 주위의 다른 존재도 그렇겠다는 논리.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인간들이 말하는 만물유신론이나 애니미즘 같은 것들이겠지요. 그래서 원시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요. 과학이 창달한 오늘날 대명천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생태평형파괴, 환경오염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오늘, 토템의 현실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도의 타골이나 우리 중국의 곽말약이 자기의 시에서 노래한 범신론(汎神論)적 범애(汎愛)도 바로 이런 것과 맥이 닿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詩聖 자리도 일단은 여기서 찾아야 될 줄로 압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형님이 내건 토템의《생명일체화》, ‘토템의 영원한 가치원소’, 그리고 ‘현대인의 이런 현대병에 대처하여 인성의 원초인 토템관념을 완전무결하게 구현하는것은 그야말로 좋은 약이 아닐 수 없겠다.’ 가 일리가 있는 것이지 이것을 절대화하거나 과대 포장할 때 그것은 진리에서 빗나가게 되는 줄로 압니다.

  사실 형님이 토템에 대해 위에서 본 《기치》이고 《정신》이고 《응집력》이고 《정》이며 《리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현대병치유의 처방으로 제시한 것은 일원론적인 인류기원론으로 볼 때 논리적으로 딱 맞아떨어집니다. 형님은 인류기원의 다원설보다는 일원론에 전적으로 섰구만요. 물론 형님을 비롯한 인류기원 일원론자들이 체질인류학에 있어서 키포인트로 되는 유전자론에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도 말입니다. 그러나 형님의 지적대로 ‘흥미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고고학연구에 의하면 아프리카이외의 다른 어느 구역도 인류의 탄생지였다고 할만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고 ‘아프리카인류선조의 이동설이 문화인류사가들의 공통적인 인식’으로 정말 되고 있다면 현 단계에 있어서 일원론이 진리겠지요. 그래서 당연한 논리로 ‘그러한즉 세계 각 지방에 널려 사는 여러 민족들이 모두가 아프리카선민의 이주민들이며 모두다 아프리카선민의 후예들이라는것이 정설로 되고 있겠지요. 형님의 이 론리를 훑어가면 토템→아프리카선민(원시씨족)→이주민(세계 각 지역의 인간들)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本是同根生’임에 틀림없다는 얘기가 되지요. 그리하여 씨족 성원들 사이의 인간관계가 ‘형제관계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형님은 바로 현대인간들의 《相煎何太急》하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 《토템시대 인간 상호간의 이런 형제적관계를 현대인간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적용할 수는 없을가?》를 고민하고 있는 어버이 같은 범인간애자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형님이 도달한 경지가 원융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세상이 종족, 민족 내지는 국가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없고 너나없이 하나가 되는 원융-대동세계로 나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지난세기말 동서냉전이 종식되면서부터 극성스럽게 세계화, 글로벌시대니 뭐니 하고 외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종족, 민족 내지는 국가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옴니암니 타투는 이율배반적인 양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워낙 세계화요, 글로벌이라는 것이 이른바 선진국 내지는 강대국들의 새로운 패권담론이고 함정이라는 논의도 만만치 않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정말 세상은 아벨이나 흥부보다도 카인이나 놀부 같은 놈들이 더 양산되니 말입니다. 백인과 흑인의 해먹은 종족적인 앙숙은 그만 두고라도 현재도 많은 곳에서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실은 우리의 원융이나 대동의 세계와는 너무 비딱하게 나가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형님은 ‘세계의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민족의 선조도 아프리카에서 건너왔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우리 민족의 시조탄생신화인 단군신화를 유력한 근거로 들고 있구만요.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단군신화의 발생지 삼위(三危)는 오늘날의 감숙성 돈황 막고굴부근의 삼위산(三危山)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에 석연치 않은 문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단군신화를 만들어낸 단군부족 즉 우리가 역사적으로 말하는 고조선사람들은 오늘날의 감숙성 돈황 막고굴 부근보다는 아무리 서쪽으로 멀리 가더라도 요동반도 쪽을 못 벗어난다는 것이지요. 요녕성 홍산문화유적지를 비롯한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 동검이 바로 그들이 사용하던 유물로 판명되고 있지요. 물론 단군신화의 발생지가 오늘날의 중국 감숙성 돈황 막고굴 부근의 三危山이라 할 때 조선민족의 아프리카선민이동설을 밑받침하는데 더 효과적이겠지요. 그리고 《단군부족은 후에 실크로드(비단의 길)를 따라 섬서성 진령(秦嶺)주봉 태백산을 넘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나왔다》는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어 지는 거겠지요.

  형님은 분명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태백 운운에 눈이 번쩍 뜨이며 그것을 감숙성의 三危 혹은 三危山, 그리고 섬서성의 태백산에 대치시킨 것 같은데 사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태백은 다분히 도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방향감각을 나타내는 三位太白(星)으로서 三危와는 우연히 ‘삼위’라는 조선말의 諧音을 이루었을 뿐 하등의 관계가 없는 줄로 압니다. 감숙성 三危山이나 섬서성 태백산이 도교의 성지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단군신화에서 도교적인 삼위태백이요, 불교적인 환인, 환웅(帝釋)이요, 유교적인 덕(德)을 나타낸 것은 후세의 기록자인 일연 같은 사람들이 해당 시기의 이데올로기나 도덕률에 맞게 부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조선민족은 전통적으로 중국을 상대로 사대주의로 많이 흐르다보니 무엇이나 중국에 많이 갖다 붙였습니다. 지명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한양이니 웅진 같은 중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도 수두룩한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신화, 특히 건국신화를 액면 그대로 이해해서는 그 원초적인 모습이나 원형(原型)을 파악하기 힘든 줄로 압니다. 그리고 형님은 우리 조선민족들이 《그곳(감숙성 돈황 막고굴부근. 필자 주)은 사막지대여서 여름철에는 일조시간이 길고 해볕이 뜨겁게 내리쬐기 때문에 단군부족사람들이 모진 더위를 막기 위해 흰 옷을 입었으며 나들이할 때는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너무 피상적인 논의인 줄로 압니다. 물론 옷 입는 습관은 기후풍토와 많이 관계되지요. 그렇다 하여 그것을 너무 직선적으로 단순하게 리해하면 웃기는 얘기가 됩니다. 여기에는 경제생활여건과 종교 및 민속신앙적인 복잡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중동의 더운 사막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보기에 답답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을 한 것만 보아도 이 점을 알 수 있지요.

  형님은 우리 조선민족의 두 주류 군체를 북방계 유목민족과 남방계 농경민족으로 나누고 있는데 저는 이 관점에 기본상 동의하면서도 굳이 진령을 계선으로 잡아 북방계와 남방계의 이동을 포착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선민족의 275개 성씨 중 절반이상은 그 씨족의 시조가 진령이남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조선민족의 공씨(孔氏)는 공자의 후예이고 신안 주씨(朱氏)는 주희의 후예이며 남양갈씨(葛氏)는 제갈량의 후예이고 청해 리씨(李氏)는 악비의 후대이다. 필자의 시조 남민(南敏)은 당나라때의 봉양부 여남사람으로서 당나라 천보 14년(기원 755년)에 안렴사의 사신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당시 신라국에 표착하여 그곳에 자리잡게 되였는데 남씨가족의 시조로 되였다.’고 했는데 여기에도 참 껄끄러운 점이 한 두 가지 아닌 줄로 압니다. 우리 조선민족의 성씨는 확실히 중국 사람의 성씨를 많이 땄습지요.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그 성씨를 땄다하여 그 후예이거나 후대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 조선사람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기만 해도 고유어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 을지문덕, 백제의 아자개, 견훤, 신라의 노힐부득, 달달박박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지요. 그러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중국 唐나라의 문물제도를 도입하면서 중국문화에 경도한 나머지 조선사람의 성씨도 중국 사람의 세 글자 성씨를 본 따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때는 성씨와 혈연의 유착도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유신, 최치원, 박인량… 이런 식이 정식으로 되어 줄곧 현재까지 내리왔지요. 현재 한국에서 고유 우리말 이름짓기는 이것에 대한 한 반발로 볼 수 있지요. 물론 남의 성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주체성이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되겠습니다만 사실 고대나 중세에 있어서 이것은 세계보편적인 한 현상이 되겠습니다. 유럽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리스의 데비드는 멋과 용감함의 상징으로 유럽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성씨로 되고 있지요. 로마의 정복자 알렉산데르는 그 이름의 위용이 러시아까지 미쳐 러시아사람들 가운데는 알렉산데르로 성씨를 지은 사람이 참 많지요. 그리고『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기적의 창조자로 많은 사람들이 따서 짓는 성씨로 되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동서를 막론하고 성씨는 한동안 양반이나 귀족의 대단한 신분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일반 상민이나 서민들하고는 별 인연이 없는 것이 되기도 했지요. 워낙 일반 상민이나 서민들에게는 성씨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조선사람들 사이에 개똥이요, 차돌이요 같은 천한 이름은 상민들 속에서 이름이 없을 때 생겨난 이름이기도 하지요. 물론 성씨에 존비귀천의 신분적 색채가 가미되니 위조족보가 남발하기도 했지요. 유럽 같은 경우도 보면 스티본은 야장쟁이 출신을 지칭했지요.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일반 서민들은 성씨가 없다가 도구가와시기에 성씨가 허용되면서 산 아래에 산다하여 山下모모, 밭 한 가운데 산다하여 田中모모, 강 위쪽에 산다하여 河上모모 식으로 편리한 대로 성씨를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상층 양반이나 귀족들이 일반 상민이나 서민들에게 성씨를 하사하기도 했지요. 이른바 賜姓이 그것이지요. 이상 성씨에 대한 대체적인 갈래판을 통해서도 알다시피 성씨는 사실 별 볼일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단지 성씨를 통한 족속(族屬) 따짐은 대단히 섣부른 얘기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형님의 론문에서는 많은 발랄한 생각들이 피력되고 있는데 민족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립이 가장 새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발전사와 민족의 형성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 않다. 즉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구분된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이다.’ 일반적으로 민족을 구분하는 데는 공동한 혈연을 기초로 하고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에 의거하게 되지요. 그런데 형님은 여기서 선천적인 유전적 혈연을 빼고 후천적인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을 싸잡은 문화를 내세우고 있구만요. 물론 문화도 중요하지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문화로 나누어지기도 하지요. 유목문화, 농경문화, 상업문화 등등. 그래서 한 문화 속에 여러 다른 민족들이 포함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는 뭐니 뭐니 해도 민족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아무래도 혈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피는 못 속인다는 소박한 논리가 내 몸에 와 닿습니다. 아니다구요? 그럼 형님의 논리대로 400만 년 전《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선조의 후예들은 세계 도처에 널려 퍼지고 퍼져 오늘날 60억을 헤아리는 세계 각이한 민족의 인구를 형성하고있다》고 합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네 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는것이 인류사요 민족사라 하겠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무리 400만 년이 지났다 하지만 현재 인종갈래를 볼 때 체질인류학적으로 각 종족이나 민족마다 유전자가 다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모양새도 다른 데가 너무 많습니다. 피부색 하나만 놓고 보아도 흑인, 백인, 황인, 홍인, 갈색인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쌍겹눈과 단겹눈, 우뚝코와 납작코, 장신과 단신… 이런 것은 형님의 론리대로 이동하여 정착해서 살다보니 一方山水, 養一方人 격으로 나름대로의 생김새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별 무리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래도 석연치 않은 점은 체질인류학적으로 같은 백인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유전자적으로 확연히 다른 아리안족과 비아리안족, 그리고 샘족과 햄족으로 나뉘어 지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아리안족이라고 해도 게르만, 라틴, 슬라브 등으로 세분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 백인들이 지난 수세기에 걸쳐 아프리카흑인들을 사람취급하지 않으며 만행을 저지른 표면적인 이유로는 흑인들이 자기네와는 유전자가 다른 별종임을 많이 강조했지요. 사실 형님의 논리대로라면 아프리카에 끝까지 남은 흑인원주민들이 아프리카선민들의 유전자를 가장 잘 이어받은 순종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형님의 논리대로 우리 조선민족도 아프리카선민들의 후예라면 체질인류학적으로 그 선민들의 유전자 및 생김새와 같아야 하는데 분명 같지 않습니다. 뭐 그것은 유전자의 변이문제라고요? 현재 종족이나 민족 사이 유전자가 다르고 형체가 다른 것을 단지 유전자의 유전 및 변이만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 줄로 압니다. 유전자변이로 해석하기에는 피차간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는 거지요. 현재 각 종족이나 민족은 나름대로의 피를 나눈 혈연을 이루고 있지요. 피는 못 속이는 법입니다. 한국의 많은 사생아들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입양되어 갑니다. 커서 자아의식이 확립될 임박에 이들은 본능적으로 정체성의 갈등 내지 혼란을 느낍니다. 나는 왜 아버지, 엄마와 생김새가 다르지? 나는 왜 언니, 오빠, 누나와 생김새가 다르지? 나는 도대체 누구야?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에서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종족적,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피는 우리의 집단무의식적인 종족적, 민족적 胎志에 다름 아니지요. 그래 피, 혈연을 빼놓고 어찌 종족적, 민족적 논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형님, 현재는 형님이 잘 지적하다시피 《오늘 여러 나라의 경제는 세계일체화에로 나가고 있으며 세계 여러 민족들 간의 래왕은 날로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님이 또 잘 지적하다시피 현재는 분명 《민족문제와 민족 간의 모순은 의연히 세계 불안중의 주되는 요인의 하나로 되고 있으니 이것은 현대인의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적인 슬픔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분명 혈연의 종족, 민족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다 할 때까지 분명 종족, 민족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형님이 피타게 외치는 아름다운 세계원융이나 인간이 이때까지 추구해온 대동세계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종족, 민족을 전제로 한 원융이나 대동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은 줄로 압니다. 절대적인 융합이나 대동세계는 없는 줄로 압니다. 여러 종족, 민족의 화이부동(和而不同), 이이존동(異而存同), 바로 진짜 너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너가 있으며 그러면서도 너는 너고 나는 나인 그런 경지 말입니다.


  남영전 큰 형님, 화(和)만 웨치고 부동(不同)은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화(和)는 부동(不同)을 전제로 하는것이 아닙니까?


  부동(不同)이 없는 화(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좀 대답을 해 주세요.


200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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