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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실존
--제1회 두만강문학상 심사평 및 작품해설
평심위원(대표) 우상렬
< 두만강> 창간호에 수록 된 12편 중단편소설은 우리 조선족의 대표적 문학지『연변문학』,『장백산』,『도라지』에 실린 秀作들로서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알 수 있게 한 대표적인 작품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이에『두만강』창간호에 수록한 것도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秀作들은 나름대로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어 심사위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심사의 고민 속에 빠졌음을 토로하는 바이다.
그 러나 심사는 어디까지나 심사인 만큼 상대평가의 잣대로 이미 선정되어 올라온 최국철의 <어느 여름날>, 박초란의 <스팽글>, 김춘택의 <장미를 지키는 남자>, 윤석원의 <토종이 어딨냐고?> 등 4편 중에서 대상작으로 최국철의 <어느 여름날>(국내상)과 윤석원의 <토종이 어딨냐고?>(해외상)를 뽑았다.
최 국철의 단편소설「어느 여름날」은 현 단계 농촌의 새로운 문제 즉 도시인들의 잠식문제를 고발하고 있어 이색적이다. 도시인들은 팽창하는 물욕의 마수를 농촌으로 뻗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농촌에 이 마수를 저지할 힘이 없다. 농촌문제의 심각성은 농촌,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여 나서서 싸워야 할 촌장이 이들과 단짝이 되어 돌아가는데 있다. 이 촌장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저지활동조차도 와해하는 핵심적 작용을 한다. 촌장이 바로 양보스에게 왈룡을 녹일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든가. 농민들 스스로는 너무 무맥하다. ‘현재는 10여호만이 미희미한 문패를 달고 숨소리를 죽이고 조용하게 살아간다. 어린이 첫돐 생일 잔치도 한번 없고 로인들의 회갑잔치도 없는 서편지경마을이라 … 아득한 섬 마을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래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 그래서 지경마을 사람들은 궐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왈룡이를 내세운 한 바탕의 난장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법적 대응도 할 줄 모른다. 그런 만큼 그것은 물 먹은 흙담처럼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가난하다. 물질적인 공세에 쉽게 녹아난다. 왈룡이의 중도이폐나 배신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결과적으로 ‘초여름을 잡으면서 뱀탕집간판이 붙으면서 영업이 시작되였다. 량보스네 펜션에는 시내에서 내려 온 갑부들로 밤낮으로 들컹거렸고 비단으로 온몸을 칠한 녀자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고달픈 남대천의 하늘과 그 하늘 아래에서 허위허위 위태롭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무차별적으로 희롱했다.’ 이 소설은 바로 중국이 개혁개방 후 줄기차게 산업화로 나아가면서 새롭게 부상된 도시와 농촌의 모순,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모순을 리얼하게 보여준데 1차적 가치가 있다.
이 외에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에 따른 한족들의 유입문제도 내비치고 있다. ‘서지경마을에서는 한족들이라면 당초에 곁에서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지만 조선말을 얼음에 박밀듯하는 왕씨네 세째와 네째의 두 형제의 천입은 결국 막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조선족 마을의 정통성 퇴색 및 파산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작가의 민족우환의식을 볼 수 있다.
그 리고 왈룡이와 왕싼의 대비를 통하여 작가의 민족성에 대한 사고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입에 발린 듣기 좋은 소리에 쉽게 붕 뜨고 하찮은 일에도 쉽게 격해나며 실속 없이 놀아나는 우리의 자화상. 여기에 왕싼으로 대표되는 한족들을 좀 보자. ‘아주 폄훼에 가까운 조크였지만 사람 좋은 왕싼은 대수로운 기색이 아니다’, ‘이들은 서지경마을에 들어 설 때 알뜰한 홀아비 석수쟁이 신분이였다.’ 不局小節에 실속 있게 놀아나는 그들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격.
이 소설은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 주인공 왈룡의 형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부각하였다. 이중적인 성격특성을 잘 조합해내고 있다. 얼숙은 면과 농민의 교활성, 우직하면서도 무른 면, 남한테는 한 없이 세고 색시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등 한마디로 개괄하기 힘든 풍부하고 다양한 면모의 성격특성이 살아 숨 쉬는 예술형상으로 성공시켰다. 그리고 이 소설은 함경도 방언을 능란하게 구사하여 지방적 특색을 잘 살렸다. 이것은 최국철 작가의 일관적인 문체적 특징인줄로 안다. 이로부터 놓고 볼 때 최국철 소설의 스찔적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언어표현에 있어서 유모아적 기질이 넘쳐나 작품 읽기에 재미를 더 해준다.
「토 종이 어딨냐고?」의 작가 尹 錫 元은 한국작가인 만큼 한국의 세태를 꼬집고 있다. 이를테면 단편소설「토종이 어딨냐고?」에서 주인공 장분수의 大智若愚적인 자조 섞인 1인칭수법으로 제 분수를 모르고 정말 푼수로 놀아나는 한국의 세태를 잘 꼬집고 있다. 장분수의 자조에는 ‘푼수’로 살지만 나름대로 ‘분수’에 맞게 사는 당당함과 비뚤어진 가치관에 제주제도 모르고 분수없이 날 뛰는 인간들에 대한 시니칼한 풍자가 도사리고 있어 뜻 깊다. 작품의 전반 주제도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전반 세계적인 근대화, 글로벌화 과정의 한 세태를 보여주고 있어 보편적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도 어필하는 바가 있어 한번 읽을만 하다. 그런데 이 자조적인 가치판단이 좀 혼란스러울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박 초란의 중편소설『스팽글』은 인간욕망의 문제 및 삶의 자세를 다루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만 욕망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스팽글로 상징되는 부질없는 욕망을 오히려 더 많이 부린다. 그래서 房奴, 車奴가 되고 끝없는 물질적 욕망의 노예가 된다. 현대인간들의 異化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로부터『스팽글』은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그래서 일종 보편적인 인간마음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주인공들도 영어문자로 부호화한 줄로 안다. 그런데 삶의 좌표를 굳이 禪의 불교적인 경지에 매치시키는 데는 異論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인 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상호 텍스트성을 잘 이용하여 주제사상을 거듭 강조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김 춘택의 중편소설『장미를 지키는 남자』는 제목의 남자 즉 아수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기사도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불가능할 때 억압된 욕망의 예술적 승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조지, 보들, 야마모도, 반야의 관계 및 이들의 아칭과의 관계를 통해서는 미국, 프랑스, 일본, 한국과 중국의 국제외교적인 역학관계를 내비치고 있는 듯하다. 즉 미국의 힘의 논리, 프랑스의 돈의 논리, 일본의 눈치보기와 돈힘을 더 한 논리, 한국의 난감함에 어쩔 수 없이 이런 논리에 놀아나기, 중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논리. 결과적으로 반야와 아칭의 끈질긴 돈독한 인간적 관계만 남아 한국과 중국의 유대관계를 강조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寓意소설로 읽힐듯하다. 그러나 그 구상이 묘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얽히고설킨 복잡한 국제 역학관계를 여실히 풀이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그 리고 이 소설은 반야와 아칭의 진정한 예술가와 누드모델의 자세 및 육욕의 합일 등을 통하여 ‘마음의 문’의 열고 닫는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대승불교에서 운운하는 일종 ‘반야’지혜를 내비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일종 상징소설로 읽을 수 있다. 즉 마음의 도를 터득하는 그런 경지창출의 상징소설. 물론 이런 도를 터득하고 경지를 창출해가는 주역은 반야이다. 그런데 이런 터득과 창출에 대해 동양의 가치를 높이 사려는 의도를 충분히 긍정한다고 해도 그 종결점이 왜 굳이 불교적인가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그리고 그 터득과 창출이 반야의 일종 자아 합리화와 변명에 불과한 감을 줄 때 그것은 새로운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박 초란의『스팽글』과 김춘택의『장미를 지키는 남자』는 비유, 상징 등 예술적 표현이나 기교 면에서 어쩌면 최국철의 단편소설「어느 여름날」보다 뚸어난 듯 하나 우리 조선족의 치열한 현실적 삶과 거리가 멀고 공히 세속의 문제를 일종 불교적 경지로 다스리려고 한데는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최국철의 단편소설「어느 여름날」은 이들 두 작품의 이런 취약점을 미봉하는 차원에서 오히려 돋보인다.
글 쓰기 지향점에서 놓고 볼 때 최국철의「어느 여름날」이 구체적인 우리 삶의 현실문제를 물고 늘어진 현실지향적인 작품이다면 박초란의『스팽글』과 김춘택의『장미를 지키는 남자』는 현실의 현상을 아우르는 보편성을 띤 실존문제를 물고 늘어진 작품이다.
사실 이 11편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면 대체로 현실과 실존이라는 이 글쓰기 지향점으로 개괄해볼 수 있다.
개혁개방 30년에 좋기도 했겠지만 우리의 삶은 많이 일그러져 있다. 우리 조선족의 삶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 작가들의 예각은 일단 여기에 집중되어 있는 줄로 안다. 이로써 조선족 작가의 사명감이 살아나는 줄로 안다.
구 호준의 단편소설「견공」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인간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개보다 못한 인간의 소외된 삶, 개로부터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밖에 없고 동류의식까지 느끼게 되는 인간의 소외적 삶이 리얼하게 잘 그려졌다. 그래서 ‘견공’이라고 부르게 되는 개. 예술수법 면에서 1인칭이나 3인칭에 비해 적게 구사하는 2인칭수법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개라는 소도구를 십분 잘 이용했다. 개와의 관계상에서 인간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잘 보여준 것이 성공적이다. 물론 ‘너’와 아들을 비롯한 가족,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좀 더 폭넓게 명확히 깔아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 ‘너’의 현실의 소외된 존재가 실감있게 안겨 올 수 있다.
김 경화의 단편소설「테테테」는 내 눈에 비친 ‘남자’의 전후 상이한 형상을 통하여 도시화와 시장경제시대에 우리 농촌사회의 황폐화를 보여주고 있다. 노신선생의「고향」을 읽는 듯하다. 그리고 이런 황폐화 속에서의 可憐天下父母心을 보여주기도 했다. 홍만호의 단편소설「리혼변수」는 들 뜨서 놀아나는 조선족 ‘그녀’와 대비되는 내실을 기한 듬직한 한족 ‘안해’ 및 흘러간 옛사랑을 비롯한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회억을 통하여 사랑위기를 극복해가는 낭만적인 사랑의 변증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의 변증법이 좀 안이하게 풀이되는 듯하여 깊이를 기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한 국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삶, 우리 문학의 새로운 한 메카로 떠올랐다. 어쩌면 마를 줄 모르는 우리의 영원한 문학의 샘줄기가 될 것이다. 전화의 단편소설「그곳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는 한국에서의 조선족의 피폐한 삶의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많은 관련 작품들과 비교적으로 고찰할 때 제재도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새로운 발굴도 없다. 그리고 지섭이라는 인물에 의해 주선을 끌고 왔으되 현상적인 나열에 거치고 만 감을 주며 광일이와 명길이의 이야기는 당돌하여 주선에서 이탈된 감을 준다. 슈제트 전개의 긴밀성이나 구성의 유기성이 많이 떨어지며 인물성격부각에서 흩어진 감을 주며 뚜렷한 전형형상도 창조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문 학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노정시키는 현실문제도 중요하지만 인간본연의 실존문제도 더 없이 중요하다. 현실문제에 대한 포착은 작가의 예민한 정치적, 도덕적 등 현실안광이 필요하겠지만 실존문제를 포착하는 데는 분명 현실을 꿰뚫어보고 아우르는 철학적 혜안이 있어야 한다. 아래에 보게 될 실존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현대인간들의 삶을 통하여 인간본연의 모습을 걸러낸 철학적 혜안이 내비치고 있다. 물론 이들 작품에 있어서 인간 본연의 실존문제는 서방의 실존주의의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처럼 살벌할 정도로 극단적이거나 치열하지는 않다. 적어도 동양, 아니 중국식 특색이 묻어난다.
리 여천의 단편소설「물구나무」는 모더니즘의 황당파 소설로 볼 수 있다. 인간실존의 황당함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리 정직하게 조용히 살려고 해도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치고 상할 때가 많다. ‘정말 말그대로 나무는 가만있으려 하는데 바람이 가만놔두려 하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 용수 및 그의 아버지, 그리고 소경소녀는 모두 전형적인 이런 희생자들이다. 특히 다치게 하고 상하게 하는 실체가 사회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주류담론이나 공권력일 때 그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띠며 더 할 수 없는 사회적 비극으로 치달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법기관의 무리한 조사로부터 오는 용수의 정신적 파탄 일보직전 및 ‘引蛇出洞’에 의한 용수 아버지의 하루아침에 ‘우파’분자로 전락, 자살은 그것의 생생한 보기가 되겠다. ‘처음에는 그래도 당당하던 그가 자기도 모르게 《죄인》이 되여 자기스스로가 자기를 용서할수가 없었고 불려다니는 자기 꼴이 한심해서 자신이 미워나기도 했다.’ 사법기관의 일방으로 몰아붙이는 심문에 아무런 죄 없이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용수의 심리토로. 우리 일반사람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세상인데 이 대명천지에 아직도 좌적인 ‘《세뇌》’운운하는 사법기관의 황당함은 용수의 심신을 정말 피곤하게 만들고 파탄일보 직전으로 내몬다. 보다시피 이 소설은 보편적인 인간실존을 우리의 현실적 삶과 매치시킴으로써 현실적 의의를 확보하기도 한다.
「물 구나무」는 황당한 실존 속에서나마 同病相憐의 인간의 정,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정, 사랑을 황당한 실존에서 살아가는 삶의 지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용수와 눈먼 소경의 관계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들 지간에는 흰색과 붉은 색에 관한 교류처럼 언어교류가 잘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끈끈한 정, 사랑 하나로 이심전심의 心心相印이 되어 있다. 이 소설은 여기까지, 인간의 정, 사랑을 갈구한 여기까지는 좋았었다.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 결국 세상을 안 보는, 외면하는 ‘소경주의’, 그리고 ‘세상을 거꾸로 보’는 ‘智者’로 등장하는 늙은이의 ‘의미심장’한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 데는 논의의 여지가 남는다.
허 련순의 단편소설「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걸기」는 일종 심리소설이다. 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어 보았자 그것은 나 혼자만의 넉두리에 다름 아니다. 소설제목도 심리소설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여주인공이 다이야몬드반지를 얻어 보고 잃어버리는 상황설정을 계기로 하여 보통 서민들의 횡재와 失財에 임해 느끼게 되는 의식과 무의식의 희노애락이 반죽된 다양한 심리세계를 형상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조선족의 정체성문제나 현실적 문제를 많이 물고 늘어진 허련순의 무거운 소설경향하고는 좀 다른 경향이 내비쳐 그녀의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듯하여 흐뭇하다. 슈제트전개에 많이 매달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소설경향을 놓고 볼 때 이런 심리소설은 돋보인다. 맛갈지고 수려한 언어표현력도 뛰어나다. 그런데 일부 세부적인 진실성에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김 서연의 단편소설「파리, 비둘기, 고양이, 301호남자 그리고 우방타워」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글쓰기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좀 이색적이다. 파리, 비둘기, 고양이의 먹고 먹히는 관계를 통하여 자연의 먹이사슬을 보여주었다면 나와 이들의 관계를 통해서는 현대인간들의 외롭고 무료한 실존, 그리고 자기도 주체할 수 없이 수시로 변하는 현대인간들의 얄팍한 심리, 그러면서도 자연에 맞선 인간중심적이고 우위적인 삶을 사디히즘적으로 누리는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와 301호남자의 관계를 통해서는 깊은 인간적인 유대보다는 자기의 이해득실이나 기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현대인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방타워의 시야에서의 소실은 현대도시생활에서의 현대인간들의 소외를 가장 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파리, 비둘기, 고양이, 301호남자 그리고 우방타워」의 주제의식은 전통적인 소설처럼 그 어떤 뚜렷한 중심이 있기 보다는 심히 파편적이다. 그리고 나의 긴 야행, 및 원고지는 샀으되 결국 노트북작업 등은 현대인간들의 마음 붙을 데 없는 무료함 및 자기도 주책할 수 없는 얄궂은 심리를 잘 보여주되 ‘파리에 관해 글쓰기’ 등등 잠꼬대 같이 긁적이기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글쓰기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권 중철의 「흔적」은 황당하고 과장된 수법으로 하나의 변형된 시대를 살아온 김팔순할머니의 운명을 통하여 모든것이 물욕으로 좌우되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시골에서 자라 시골에서 살아오면서도 김팔순 할머니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겪은 모든 정치사변을 다 겪는다. 그러면서도 소박한 시골사람의 본성을 잃지 않았고 비리와 비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중대한 력사적인 사변속에서 국내전쟁의 담가대로 참가를 하였고 남편을 <항미원조>에 보내여 공화국에 국민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 시대의 제물로 바쳐진 신세가 되었고 포로가 되여 돌아온 남편은 자살을 하게 되고 금전만능의 풍조가 만연한 오늘에 와서는 남편의 무덤마저 지키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비정과 비리와 날카롭게 맞서 싸워왔지만 결국 오늘의 현실앞에서 김팔순 할머니의 운명은 시대의 희생품으로 마감을 하게 된다. 이점에서 소설이 가지는 현실비판의 의의가 크다고 본다. 과장과 황당파수법을 기용하여 창작된 「흔적」은 현실비판의 주제를 다루는데 새로운 현장을 개척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소설의 전반 결구로 볼 때 흐트러진 감이 없지 않으며 언어사용에서의 분촌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수 없다.
이 상「견공」,「테테테」,「리혼변수」,「그곳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가 전통적인 사실주의 필치로 우리 조선족의 구체적인 현실적 삶을 보여주었다면 「물구나무」,「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걸기」,「파리, 비둘기, 고양이, 301호남자 그리고 우방타워」는 모더니즘의 황당파 수법이나 심리소설적 기법,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수법이나 기법을 잘 이용하여 우리 현대인간들의 보편적인 삶의 한 실존을 파헤쳤다는데 의의가 있다. 현실과 실존에 대한 예술적 조명, 생활을 전일체적으로 반영하는 문학, 특히 소설과 같은 서사문학의 본령이다. 이런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이번 12편의 秀作들은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름대로의 예술적 조명역할을 훌륭하게 해온 줄로 안다.
나는 현재 2009년 설을 맞으며 이 심사평을 작성하고 있다. 새로운 희망찬 한해의 출발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번 한해에 우리 문단의 보다 알찬 열매를 기대하면서 이 간략한 심사평을 가름하도록 한다.
2009년 설을 맞으며
[제1회 두만강문학상 심사위원; 리광일, 리여천, 우상렬, 리혜선, 장춘식, 허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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