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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두만강문학상 심사평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심사위원들의 거듭되는 논의와 만장일치로 이번 제2회 “두만강문학상” 예선작 가운데 국내수상작으로 박초란의 단편소설 <날아라, 룡! 룡! 룡!>(<연변문학> 2009년 X호)과 해외수상작으로 공령희의 단편소설 <섬에서 만난 아이>( <통일과 문학> 2009년 여름호)를 선정했다.
<날아라, 룡! 룡! 룡!>은 우리 조선족의 현실적 실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돈을 좇아 이리 내둘리고 저리 내둘린다. 북경, 상해, 심천, 서울, 온 가족이 국내외로 ‘산산쪼각’이 나 있다. 잘 살기 위해 우리는 마음에 없는 시집도 간다. 그런데 그 잘 산다는 의미가 돈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돈에 너무 지쳐있다. ‘돈 버는게 헐한줄 아냐?’가 이것을 잘 대변해준다. 끝없는 물욕에 매여 우리는 다람쥐 채 바퀴 돌듯이 한다. 그만큼 우리는 무미건조하고 메말라 있다. 메마른 ‘우물’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 소설이 단지 여기에 거치고 만다면 그것은 현실 폭로비판에 주안점을 둔 ‘비판적 사실주의’ 냄새를 많이 풍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분명 돈을 쫓되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정을 그리고 있다. ‘나’와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관계는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살 맛은 난다. 그리고 스물둘의 ‘나’가 갑자기 ‘마른 우물이 되여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럴수가.’로 경악하고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젊을수가 없었다.’로 성숙을 가져온다. 그런 만큼 노트북, 최신형의 핸드폰, 수많은 옷가지, 보석, 고급의 커피와 커피잔과 양주와 자가용, 일본남자의 비싼 아빠트나 차 등등 수많은 물질로 ‘그 우물을 채우기 위한’ ‘ 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였지만’ 채워지질 않는 줄로 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마른 우물, 바싹 마른 우물의 밑바닥을 멍청하니 들여다보면서 어느날 나는 문득 그 할아버지와 작은 귀여운 은빛룡을 떠올리고있었다…’ 결국 ‘날아라, 룡! 룡! 룡!’ 우리는 용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런데 이 용이 되는 데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데 있다. ‘네 몸을 보거라!’ ‘그 순간, 번쩍 내 마음의 눈이 띄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멍청해진 내 몸은 간 곳 없고 한마리의 작은 은빛의 아름다운 룡이 몸을 일으키고있었’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러면 우리는 ‘우린 누구나가 몸속에 우물 하나를 품고 살아가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현재 그 ‘바싹 말라버린 우물이 전엔 맑은 샘물들이 넘쳐흐르던 살아있는 우물이였다는걸…’ 발견하게 되고 우리 ‘몸속에 야광주’를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만이 ‘거리의 가로등들이 이 도시의 야광주마냥 빛을 뿜고’ 우리의 삶도 생활도 빛난다. <날아라, 룡! 룡! 룡!>은 결국 용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룡이라니? 그것을 굳이 령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늘이 촘촘한 몸뚱이를 번쩍거리며 구름우를 날아예는 한마리의 은빛의 아름다운 룡이였다.’ 세속의 ‘오물따위’의 ‘욕망덩어리’를 떨쳐버리고 비상하는 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구체적 대안하고 거리가 멀다. 다분히 상징적이고 낭만적이다. 문학작품이 사회학적 교과서가 아니라할 때 이런 상징과 낭만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승화시키고 고상한 경지로 나아가게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날아라, 룡! 룡! 룡!>은 정통적인 사실주의의 전형화하고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자잘한 생활세부에 대한 차분하고도 잔잔한 서술로 우리 서민들의 전반 원색적인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 신사실주의수법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似曾相識의 익숙하고 친근한 감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용정, 용문교, 용드레우물 등 지역적인 사항과 거기에 사는 인간을 통하여 지역 및 민족적인 특색을 살리면서 어디까지나 우리 조선족의 실존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전반 구조로 볼 때 객관적인 사실주의필치와 주관적인 표현주의수법을 잘 갈무리해내고 있다. 이를테면 작품의 주요흐름을 객관적인 사실주의필치로 끌고 가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주관적인 표현주의수법으로 마무리함으로써 그렇고 그런 세속적인 생활내용을 낭만적인 이상적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로부터 작품의 주제적 완성을 훌륭히 꾀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주관적인 표현주의수법을 구사함에 있어서 현대소설의 기본 본령으로 되는 ‘상징’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할아버지 및 우물, 그리고 용은 그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겠다. 여기서 흰 색, 흰 빛을 휘동한 할아버지는 우리의 신성한 선조, ‘바싹 말라버린 우물’과 ‘맑은 샘물들이 넘쳐흐르던 살아있는 우물’로 우리의 현재 메마른 삶과 지난날 생기가 넘치는 삶, ‘은빛의 아름다운 룡’으로 우리의 희망찬 앞날을 잘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개개의 상징 키워드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작품 마지막 부분의 상징세계를 엮어내며 전반 작품의 품위를 높이고 있다. 보다시피 여기서 ‘상징’은 하나의 수사법이기보다는 그것은 전반 작품을 최종 완성시키는 유기적 조성부분으로 되었다.
<섬에서 만난 아이>는 우리에게 인간 보편의 바람직한 삶의 한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는 철리소설. 그것은 하나의 믿음과 희망. 섬에서 만난 아이가 이것을 말해준다. 그 아이는 섬에서 오늘도 기다린다. 죽어간 아버지와 떠나간 어머니를 기다린다. 어쩌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번히 알면서 기다린다. 마음이 그렇게 시키니깐. 아이에게 있어서 이 기다림은 믿음과 희망 그 자체. 바로 이 믿음과 희망이 있음으로 하여 ‘아이에게서 어떤 생생한 빛이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있어서 이 믿음과 희망은 삶의 지주. ‘빛은 모든것을 덮울수 있는 그 무엇이였’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이는 눈 먼 할머니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그 어려운 삶의 여건 속에서도 느끈이 잘 살아갈 수 있다. 주인 여자가 말한 ‘본디 희망이라는게 사람을 맹글잖것소.잉?’은 이것에 대한 좋은 주석으로 된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던 경식은 바로 이 ‘섬에서 만난 아이’한테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래서 ‘경식이 아이를 바라보자, 경식속에 자리잡고 있던 한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튀여나왔다. 아이는 섬에서 만난 아이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들은 하나가 된다. ‘빛속에 그들은 하나됨과 동시에 정신이 깃털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들은 서서히, 그러나 정교하고 세밀한 동작으로 꿈과 희망의 닻을 미래에 올렸다.’ 이에 작가는 ‘그때 힘찬 바람이 동쪽으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다.’로 힘을 실어주고 있다. 보다시피 그들은 정신이 자유롭고 그들의 미래는 꿈과 희망으로 넘친다.
그럼 이제 남는 문제는 왜 아이들인가 하는 문제. 일언이폐지하면 어른들은 복잡하고 아이들은 단순하다. 그리고 어른들은 보다 쉽게 회의적이나 아이들은 보다 쉽게 미래지향적이다. ‘바다를 향한 그 아이들의 얼굴이 처음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만족감과 희망으로 가득 찬 얼굴로 변해갔다.’ 보다시피 아이들은 보다 쉽게 더 넓은 바다와 공감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그 ‘어떤 만족감과 희망으로 가득 차’가지 않은가. 이것을 아이들의 童心 내지 赤子之心이라 해도 좋다. 어른은 삶에 부대끼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쉽게 이 귀중한 童心 내지 赤子之心을 잃게 된다. 실련에, 삶의 권태기가 없지 않은, 그래서 섬을 찾고 바다를 찾은 경식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럴진대 어른은 수시로 되돌아와서 아이들한테서 한 수 배워야 하는 법. <섬에서 만난 아이>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섬에서 만난 아이>는 예술수법에 있어서 역시 객관적 사실주의와 주관적 표현주의를 잘 갈무리하고 있다. 소설을 읽어 내려 가노라면 별로 재미가 슬한 세태적 인생실패자의 회색적 인생담을 듣는 듯하다. 거의 마지막까지 육박해가는 데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 결국 주관적 표현주의로 반전을 가져온다. ‘경식속에 자리잡고 있던 한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튀여나오’면서 새로운 경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방금 전까지의 어른의 기나긴 권태로운 이야기는 이 새로운 경지를 돋보이게 하는 혹은 깨닫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존재함을 알게 된다. <섬에서 만난 아이>는 바로 이 반전의 새로운 경지를 펼쳐 보이면서 주제적 승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래서 철리소설에 값한다. 그리고 <섬에서 만난 아이>는 역시 ‘아이’를 비롯한 상징코드들을 잘 살리고 있다. 바로 이런 상징코드들을 읽어 내는데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그리고 <섬에서 만난 아이>는 자연환경 묘사를 통한 무드조성 및 오감이 넘나드는 통감각적 묘사는 높이 사야 할 일품임에 틀림없다.
전반적으로 볼 때 <날아라, 룡! 룡! 룡!>이 우리 조선족의 현실적 삶의 실존을 보여주었다면 <섬에서 만난 아이>는 인간 보편의 바람직함 삶의 한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수법 면에서는 많이 닮아 있다. 비슷한 예술수법으로 부동한 내용을 소화해낸 케이스로 보면 되겠다. 문학의 한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줄로 안다.
앞으로 수상자 두 분의 계속되는 건승과 건필을 빌면서, 그래서 본인에게 새로운 심사평을 쓸 기회를 주기를 기원하면서 본 심사평을 가름하도록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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