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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로"시대를 열어가면서(예동근)
2017년 06월 21일 10시 10분  조회:1687  추천:1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중국과 서양을 련결해왔던 모든 교역로를 통칭하여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국외의 해상과 륙상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도시를 선택하라면 꼭 꼽히는 두 도시가 있다. 하나는 말카라해협의 동방의 사업 중심지로 부상하였던 말라카이다. 다른 하나는 동서문명 교류의 장인 사마르칸트이다. 이 두 지역의 중심에는 모두 이슬람문명이 자리잡고있었고, 그 당시 세계의 경제, 문화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였으며 동서문화 만남의 지역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동방에서는 중국이 창조한 4대문명이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구로 전파되였다. 특히 종이의 전파는 인류문화의 보편적인 확산에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 8-13세기 이슬람의 황금시대라는 것은 종이의 황금시대이기도 하였다. 15세기의 유럽은 종이를 이교도의 물건이라고 천시하였기때문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소수의 성직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다싶이 하였고 양피지에 쓰여있는 성경책이 거의 유일한것이였지만 중세유럽의 문화발달은 종이를 만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이처럼 국가, 지역, 문명의 몰락은 개방과 페쇄에 의해 부단히 교체되면서 발전하였다. 보편적으로 보면 페쇄적인 문화는 새로운 대안으로 될수 없다. 개방된 시스템을 갖고있다고 하여 꼭 영속적으로 발전하는것이 아니라는것도 밝혀져있지만, 개방과 교류는 문명발전의 중요한 동력인것은 사실인것 같다.

  고대 중국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시발점이고 추진주체였는데 왜 새로운 문명시스템을 만들지 못하였을가? 당나라때 륙상실크로드를 개척하고 번성을 이루었고 명나라때 해상실크로드를 통하여 거대한 업적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왜 결국 페쇄의 문명경로를 리탈하지 못하였을가?

  오늘날, 우리 나라 정부가 추진하는 “일대일로”는 중국의 고대경험, 무슬림문명과 유럽문명에서 어떤 경험들을 섭취해야 하는가? 우선 유럽의 작지만 강대한 국가 네덜란드의 력사경험을 살펴보자.

  17-18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산업은 발뜨해 무역과 련결되여있었다. 당시 서유럽 국가의 선박은 발뜨해의 관문인 외레준드(Oresund)해협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네덜란드는 그후에 해상패권국가로 등장하였지만 처음에는 그 국력이 단마르크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이 해협을 장악하고있던 단마르크에 선박통행료를 내야 했다. 그런데 당시 통행료 산정방식이 매우 특이했다. 선박의 중량이 아닌 갑판의 너비를 기준으로 삼은것이였다. 즉 갑판이 좁을수록 통행료를 적게 낼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이런 불리한 도전에 두손을 들고 투항한것이 아니라 부단히 새로운 방법을 찾고 혁신을 통하여 강대한 해상무역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대량무역을 하게 된 네덜란드인들은 통행료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만드는 대신 시설 대부분을 선체 아래에 집중시킨 플류트(Fluit)선(뚱보화물선)을 제작하는것을 계기로 조선업과 해상운송업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였다. 그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수백척의 화물선을 제조할수 있었고 선박금융, 무역금융을 활용하여 세계의 무역을 련결시키는 무역시스탬을 구축할수 있었다.

  대표적인것이 바로 네덜란드가 만든 동인도회사 VOC이다. 네덜란드의 VOC는 근대 주식회사의 시초가 되였으며, 처음으로 증권거래소와 근대은행을 탄생시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네덜란드는 작은 국가이지만 기술혁신, 경영혁신, 시스템혁신을 통하여 세계무역의 중심으로 부상할수 있었다. 당시 영국은 네덜란드보다 앞서 동인도회사를 만들었지만 국가간섭이 많은 영국식 시스템은 네덜란드보다 한수 아래라고 볼수 있었다. 네덜란드가 만든 동인도회사 VOC는 동방무역회사들의 상업자본을 하나로 모아 거대자본을 형성한 결과이며, 네덜란드 상인들과 국가의 리익이 결합하여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강력한 확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기능을 종합적으로 갖추게 되였다. VOC가 만들어질 당시 자본금은 약 650만길더로 영국 동인도회사 자본금의 10배가 넘는 금액이였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상업패권은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당시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이 네덜란드 상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의 북부에서는 발뜨해협을 통과하는 네덜란드선박이 영국선박의 13배에 달했으며, 발뜨해 국가들의 곡물과 목재 운송의 4분의 3, 스웨리예 철수출의 절반을 네덜란드선박이 도맡았다.

  이같은 해상운송의 발달로 당시 유럽의 부유한 가정에서는 중국산 도자기에 담긴 인도산 사탕을 손님에게 대접하였고, 북아메리카산 담배를 피우며 뻬루산 은잔에 독일산 포도주를 따라 마실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도 “느린 세계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볼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나라의 “일대일로”는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균형있게 추진하고있고, 이 무역로드를 장기화하고 실현시킬수 있는 금융시스템 AIIB기금을 구축하였으며, 또한 맞춤형 실크로드기금을 만들어 적재적소에 투자하고있다. 또 네덜란드처럼 국가가 판을 깔고 상인들이 춤을 추게 하는 국가-시장의 결합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있다.

  서구의 성공적인 경험도 중요하지만, 중국력사의 시각에서 실크로드경험에 대하여 성찰하는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당나라의 륙상실크로드와 명나라의 해상실크로드에 대하여 성찰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현재의 현실에 대하여서도 랭철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

  력사적으로 볼 때 대당제국은 력사상 가장 개방적이였고, 다양한 문명과 문화를 가장 활발하게 흡수하면서 다양화, 세계화의 길을 걸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서유기》에서 현장법사는 인도로 가서 대장경을 가져와서 한어로 번역함으로써 중국문화의 질을 한층 높였으며, 중국문화의 발전에 신선한 혈액을 넣어 부단히 발전할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놓았다. 세계의 종교, 인종, 국적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명하고, 대담하게 세계와 교류를 한것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나라로 볼 때, 영락제시기에 정화함대가 일곱차례나 세계를 돌고 왔다. 일본의 미야자키 마쓰카스는 정화의 원정이 세계사적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의 “제1차 대항해”와 서양인의 “제3차 대항해”사이를 잇는 “제2차 대항해”라고 극찬한다. 정화의 원정은 1405년 7월 11일 시작되여 1407년에 끝난 제1차 항해를 시작해 그가 죽을 때까지 항해한 1433년까지 28년 동안의 대항해는 그 규모와 신대륙의 발견 차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선단의 보선 크기는 길이가 150메터, 선폭이 60메터, 아홉개의 돛대를 지난 약 3,000톤 배수량을 지닌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 모함을 중심으로 대형함선 100여척, 소선 200여척 등 317척으로 무려 27,800여명이 탑승하였다.

  영락제는 몽골과 서역 등 북방 초원을 다섯차례나 직접 원정을 다니면서 륙상실크로드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게빈 멘지스의 연구에 따르면, “정화는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 서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을 함대를 이끌고 원정을 다녀오게 되였다. 이는 콜롬부스의 대항해보다 70년 앞섰고, 다이스보다 60년 먼저 희망봉을 에돌아갔으며,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마젤란해협을 통과했고, 쿡선장보다 300년 먼저 오스트랄리아를 탐사했다.” 지리상의 대발견과 규모로 볼 때 류례없는 대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영락제가 죽고, 정화가 죽자 명나라는 해양대국의 꿈을 접고 페쇄정책으로 회귀하였다. 영락제가 조카의 황제자리를 찬위하여 세계 각국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대항해를 시작하였다는 설, 국내 무역의 자급자족으로 대규모 함대의 운영과 보양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필요성이 떨어졌다는 설 등 다양한것이 있다. 하지만 이런것들을 잠시 간과하고 오로지 정화라는 이 인물에 대하여 볼 때 흥미로운 점이 있다.

  정화는 본명이 마화이다. 명나라가 당시 운남의 곤양성을 정벌할 때 명나라 장군은 영특하게 생긴 소년인 마화를 죽이기 아까워 거세하여 환관으로 만들어 궁으로 보냈다. 후에 마화는 영락제가 보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워서 환관중 두번째로 높은 내관태감의 직위에 올랐고 “정”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 종이발명가 채륜을 이어서 중국의 유명한 3대 환관으로 기록되여있다.

  이처럼 력사에 출현한 우연한 사람이 정화가 아니라면 명나라의 해양대항행은 존재하였을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중국의 대표적인 륙상, 해상 실크로도의 사례에서 소수민족의 역할과 공헌이 여실히 반영되여있다.

  오늘날, “일대일로”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대장정이 시작되였다. 앞으로 다양한 문명과 공존하면서 호혜할수 있는 새로운 무역시스탬, 문명시스탬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성공을 기원하면서 다양한 문화, 다양한 배경의 인재를 등용하여 더 멋진 중국문화가 만들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인민넷 2017-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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