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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서 활약하는 흑룡강 사람들 | 탁구로 청춘을 불태우는 젊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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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세계탁구순회경기 한국대회 복식 우승. 왼쪽으로부터 세번째 사람이 김의웅씨다.

2011년 세계탁구순회경기 한국대회 시상식 현장. 남자복식경기에서 우승을 따낸 두 선수가 시상대의 제일 높은 곳에 서있다. 탁구에서 중국팀이 우승을 하는 장면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우승의 두 주인공 중에 조선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른 종목이 아닌 천재가 많고 경쟁이 가장 치렬한 중국 탁구 대표팀에 조선족이 있었다는 사실로만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이 사람은 할빈 출신의 김의웅(1991년생)씨다. 나라를 대표하여 국제급 대회의 우승을 거머쥔 김의웅씨는 당시 불과 스무살이였다.

2011년 세계탁구련맹 순회경기 한국대회 남자복식 우승, 2011년 전국탁구선수권 남자복식 8강, 2010년 전국선수권대회 단체우승(광동성팀), 2009년 제11회 전국운동대회 남자탁구 단체 2위, 2009년 세계대학생운동대회 중국팀 단체우승, 2008년 전국대회 단체 8강, 2007년 전국소년대회 단식 2위 등 리력을 자랑하고 있다. 소시적 할빈시 소년대회에서 련속 3회 우승을 따내고 광동성에 건너가 전문훈련을 받으며 탄탄한 성장일로를 거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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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팀을 대표해 2010년 전국선수권대회에서 단체우승을 따냈다. 왼쪽으로부터 네번째 사람이 김의웅씨. 왼쪽 두번째는 마림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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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세계 대학생운동대회에서 단체 우승을 한 중국팀. 왼쪽 두번째가 김의웅씨이며 중간이 허흔선수이다.

그는 중국 남자탁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1팀에서 마림, 왕호, 마룡, 허흔 등과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대표팀에서 한자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5년에 선수생활을 매감했으며 현재 광주에서 탁구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김의웅과 그의 '금관' 탁구클럽

김의웅씨는 2021년 현재 광주시에 자비로 탁구클럽을 운영하며 학생 200여명을 훈련시키고 있다. 클럽 이름은 본인의 성씨 해음자로 변형된 '금메달' '금'자와 우승을 의미하는 '관'을 합쳐서 금관(金冠)이라 지었다.

감독진은 국가명수인 김의웅씨와 주백장, 국가1급 운동원 두명, 국가 2급 운동원 한명을 비롯한 8명으로 구성됐다. 현재 탁구실은 월수구에 하나, 천하구에 두개 확보하고 있으며 월수구에서 1대1 수업을 하고 있으며 천하구에서는 공통수업과 소규모 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다섯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섭렵하고 있다.

수업은 매일 오후부터 저녁까지 하고 있으며 주말은 아침부터 오후까지다. 설립해서 2년이 지난 지금 클럽의 학생들은 월항오 대만구 공개조 단체 1위, 학교조 단체 2위, 공개조 단체 1위, 학교조 단식 1위, 광동성 청소년아동 대회 녀자복식 1위, 광주 제14회 '시장컵' 백운경기구역 8살 및 이하 소조, 9-10살 우승, 광주시 선수권대회 남자 정조(丁组) 단식 우승 등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 성급 대회에 한번에 약 천명이 참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같은 성적은 대견스럽다.

그중 일부 성적으로 국가청소년팀에 들어가 집중훈련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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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웅(왼쪽)씨와 금관탁구클럽 아이들이 올해 지역대회에서 수상하고 기념의 순간을 남겼다.

개구쟁이, 탁구와 인연 맺다

어릴 때 장난기가 심했던 그를 두고 이웃이 장난을 즐기는 아이에게 탁구를 배워주면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냐고 건의해왔다. 고민중이던 부모는 그가 6살 되던 해 할빈체육학원에 보내 탁구를 배우도록 했다. 전문감독의 지도아래 그는 금방 감각을 찾았으며 탁구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2년뒤 그는 할빈시 련속 3년 청소년탁구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이 같은 성적은 부모와 감독으로 하여금 그의 탁구재능을 깊게 믿게 했고 그의 분투방향을 확정해줬다.

8살이였던 1999년 우연한 기회에 김의웅은 심천시에 탁구를 배우러 떠났다. 그해 여름방학 김의웅은 심천에 있는 친척집에 갔다가 신문에서 청소년체육학교 학생모집 광고를 보고 시험삼아 면접을 보러 갔다. 그곳에서 그의 천부적 재능이 인정을 받고 순조롭게 입학했다. 그후 4년동안 집체생활을 하면서 전문적인 지도를 받으며 빠른 진보를 가져왔고 전국, 전성, 전시 탁구대회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따내며 프로선수의 길로 통하는 대문을 노크했다.

2003년 김의웅은 광동성대표팀에서 시험을 볼 기회가 주어졌다. 시험을 보는 한주일 동안 자신의 실력으로 성팀 감독의 눈에 들었고 성팀에 채용됐다.

성대표팀에서의 4년의 경력은 후날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국가팀에 입선되기까지

성대표팀에 입선된 후 중요 대회에서 련속 3년동안 단식과 단체 우승을 석권했으며 감독들도 그를 중요한 선수로 지목했다. 2006년 전성운동대회를 앞두고 모두들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따내면 국가대표팀 2팀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기대감에 벅찼다. 그의 실력을 두고 단식에서 금메달은 무조건 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본인도 "과장없이 상대의 실력은 나랑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기대를 한몸에 받은 그도 자신감에 부풀어오른채 경기장에 들어섰다.

"젊음의 아픔이였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는 말했다. 결과는 모든이의 예상을 벗어났다. 단식이고 단체고 전부 패배였다. 그날부터 김의웅은 고통의 늪에 빠졌다.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간 후의 박탈감 때문에 큰 타격을 받은 그는 긴 시간동안 좌절하여 반포기상태에 빠져있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몇년동안 같이 훈련하던 동료들은 한층 도약할 사람은 도약하고 탈락될 사람은 탈락되면서 한단락의 성대표팀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동료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고 자신은 성팀에 여전히 남았지만 앞날은 안개에 가리워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감독의 권고로 탁구채를 겨우 집어들었으나 경기에서 거의 이기다가도 지는 상황이 반복으로 연출됐다. 이 과정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본인은 고백한다. 감독은 가능성은 충분하니 다음 기회를 잘 잡으면 꼭 성공한다며 포기하지 않고 그를 격려했다. 당시 감독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그런 감독을 리해할 수 없었다. 주변의 권고로 운동분야의 심리의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운동과 심리치료를 병행하면서 힘들었지만 다시 시작했고 자신감도 점차 회복했다.

1년동안의 회복과 훈련을 거쳐 이듬해 전국청년선수권 대회에서 16강에 들어 마침내 대표팀 2팀에 입성했으며 이듬해에는 순조롭게 1팀으로 선발됐다. 성팀에서의 경력은 인생에서 중요한 경험 루적 과정이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1팀에 입선되고 보니 그곳은 완전히 신세계였다. 마림, 왕호, 마룡, 허흔 등 이름이 쟁쟁한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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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팀시설 훈련뒤 김의웅(우2)씨가 마림, 마룡선수를 비롯한 동료들과 휴식의 한때를 보내고 있다.

"실감이 나지 않았고 그냥 신기했다" 은퇴한 후에도 이들과 자주 련락하는 사이라지만 그당시 느낌은 이러했다. 그러나 이런 느낌도 잠시였다. 고생 끝에 한숨 돌릴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1팀에 올라온지 한달도 안돼 새로운 경쟁이 시작됐다. 새로 입선된 선수들이 2팀과 또 경쟁을 해야 했으니 느슨해졌던 신경이 또 다시 팽팽해졌다.

스타 선수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배운 것이 많았다. 올림픽 우승은 이 종목에서의 산봉우리라고 말하는 그는 그들에게서 자률과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자기에 대한 높은 요구를 배우면서 항상 자신을 채찍질했다.

"많은 사람들이 재능은 있지만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이들처럼 자신에 대한 요구가 높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강자가 특히 많았던 우리 그 시대에 요행심리를 품고 그럭저럭 보내는 사람들은 얼마 안돼 탈락됐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가 1팀에 들었을때는 왕력근, 마림, 왕호의 전성기였다. 그 뒤로는 마룡과 허흔, 장계과도 있었다. 그가 힘을 내 우로 도약하려 할때 뒤에는 또 진기, 학수가 따라왔다. 한마디로 그 시대에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자리 매김한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였다. 그런 와중에도 대표팀을 따라 국제대회를 여러차례 다녀왔고 우승까지 챙겼다는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년동안의 활약을 거치고 2013년 대표팀을 떠난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에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더 버텨봤자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순발력, 지구력, 신장과 힘 등 신체조건이 뛰여난 선수들에 비해 나는 차이가 있었다. 대표팀을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나의 조건으로 그 높이까지 올라가 대표팀에서 몇년의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매우매우 장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 그대로 접수하는 김의웅씨의 솔직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24세 되던 2015년 김의웅씨는 은퇴를 선택했다.

갈등 후에 찾아온 선택

선수생활을 접은 후 그는 미국에 건너가 창업하며 탁구를 지도했으나 시장이 리상적이지 못해 2년여 뒤 귀국해 친구와 함께 심양에서 료식업에 착수했다. 그 사이에도 탁구에서 손을 완전히 떼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가정의 관계로 2019년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사실 그때는 탁구를 떠나 완전히 새로운 령역에서 새롭게 시작해보려 했으나 시기가 리상적이지 않았다. 은퇴후터 클럽을 꾸리기 전까지 사실 그는 앞날이 막막하고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선수시절 여러 대회에 참가하면서 인생은 아드레날린(肾上腺素. 교감신경을 흥분시키는 호르몬)으로 충만된 짜릿하고 긴장되고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이 깔려있는 사람에게 어지간한 일은 하찮고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래서 자꾸만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찾고 싶어한다.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했을때 발생하는 락차는 엄청 큰 것이다. 그럼 다시 탁구를 시작해야 할가? 높은 곳에서 내려와 탁구클럽을 운영한다는 건 눈에 차지 않았다.

그는 "국가 대표팀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 모순에 빠진다. 어딜 가나 받들려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역할 전환이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렇게 몇년간 이런 저런 선택을 앞에 두고 자아부정의 순환을 거듭하면서 자신을 찾기 위한 방황 속에서 보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2017년 가정을 꾸리고난 후 선택의 시간은 많지 않았다. 프로선수때는 로임을 받으며 자신을 먹여살리면 그만이였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까지 생기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렇게 결국 탁구로 복귀했다.

출발점이 일반 사람보다 높았다. 광동성에는 수준이 그를 초과하는 사람이 없었다. 본인은 전국적으로도 국가팀에 있다가 은퇴후 탁구채를 들고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두손 안에 든다고 말한다.

그렇게 '금관'탁구클럽은 빠른 시간내에 학생들을 흡인했고 그자신도 직접 클럽에 다니며 감독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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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웅씨가 클럽에서 학생들을 훈시하고 있다.

역할을 전환한 후의 김의웅씨는 어떤 모습일가? 그는 "내가 선수일 때는 나혼자만 진보하면 되는 일이지만 지금은 아이들마다 진보하게 해야 된다는 점이 그때와 다르고 또 어려운 부분이다. 전문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책임감을 더 살려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배워주는 한 아이는 기초가 없이 입문했는데 처음에는 학부모로부터 오는 의심의 눈길을 자주 받았다. 아이는 매일 열심히 훈련을 하지만 뭔가 감각이 약간 부족했다. 학부모들은 대부분 수준 높은 감독을 찾으면 무조건 잘될 거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였다. 그러나 김의웅씨는 그 아이가 갖고 있는 장점을 알고 있었다. 일부 아이들은 처음에 훌륭한 감수성을 보여주고 손감각이 좋아 출발시 우세가 비교적 크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은 보편적으로 훈련에 몰입하지 않는 상황이 쉽게 나타난다고 그는 말한다. 그 아이는 신체소질, 스트레스 대처능력, 한결같은 마음, 우승을 향한 마음이 있었다. 이런 특질들은 한 아이에게 매우 소중한 능력이라고 그는 말하며 뒤로 갈수록 빛날 것이라고 학부모를 설득했다.

그 아이에게서 그 가능성이 점차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말은 립증되였고 더욱 신뢰성이 생겼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부터 성팀에서 좌절했을 당시 감독이 나를 믿는다고 했던 말의 진정한 의미가 더 잘 리해되는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제날 정경이 소환되며 김의웅씨의 사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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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웅씨가 어린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코로나때 작은 클럽들은 속속 부도났지만 그들은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잘 버텨냈다. 코로나가 지나간 후 사회적으로 체육운동을 더 중시하고 광주시가 곧 고중입학 체육시험항목에 탁구를 도입했기 때문에 시장전망도 밝아지고 있다. 앞으로 규모도 더 확대하고 전문성도 더 높여 전국을 향해 학생을 모집할 계획이다.

"한 건물에 열댓개 탁구대를 놓을 수 있는 더 정규적인 체육관을 마련하는 것이 최근 몇년의 목표이다. 더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시간의 루적도 필요하다"

젊지만 많은 스토리를 겪어온 김의웅씨의 인생 제2막이 이제 막 시작됐다.

/마국광 기자  사진 클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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