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담, 재담에 대한 향수가 있는 사람을 대상을 '추억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의 새로운 옷을 입은 만담, 재담을 통해 찡하게 여운이 남는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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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정말 잘생긴 거 같애. 내만 나오면 다들 나를 좋아하데? 내가 뭐 맞춤하게 재밌게 생겼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요즘따라 요놈의 인기 때문에 숱한 녀자들이 나를 따라다니는데 내 또 자존심이 있지무. 웬만한 녀자는 절대 보지도 않지. 아 저기 그런 녀자 하나 오네. 여러분, 저 녀자를 박수로 환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리경화입니다.
남: 아하 기다산게 길쭉하게 잘생겼다.
녀: 아니 이 량반이…
남: 왜 그러슈? 길쭉하게 잘 생겼다는데…
녀: 아니 여보시요. 사람이 나오자바람으로 길쭉하다니 어떻다느니. 아니 그럼 내가 길쭉하면 그쪽은 짧다새서 짤쭉이시오?
남: 뭐 짤쭉이?
녀: 그렇지 짤쭉이.
남: 에잇 길쭉이.
녀: 에잇 짤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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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재담 〈길쭉이와 짤쭉이〉로 데뷔한 김영식과 리경화이다. 이들의 데뷔 무대는 예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몇백명이 모인 무대에서 주거니 받거니 펼친 재담은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 뒤로 이 둘은 〈노래번역〉, 〈이웃〉, 〈무정한 남편〉 등 수십편의 작품을 함께 하면서 각자 따로 대본을 쓰고 합쳐 연습해봐도 죽이 척척 맞는 경지에 이르렀다. 눈빛만 봐도 리해한다는 것이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만담가들의 인기는 당시 단연 최고의 스타로 꼽혔다.
최수봉 선생 예술인생 40돐 기념식에서.
“만담, 재담은 말만 잘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외워서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면서 대사를 말해야 관객이 웃습니다. 기계적으로 대사를 외워서 말하면 아무도 안 웃습니다. 결국 연기력으로 승부를 겨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작품 속 등장인물 그 자체가 돼야 하는 거죠.”
이처럼 인기를 끈 만담, 재담이 일본의 만자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 리경화는 “사실과 다르다. 만담, 재담은 우리 민족의 ‘토박이’ 문화의 한갈래이다.”라고 콕 집어 말한다. 그리고 김영식은 “우리의 만담, 재담은 우스개소리를 하되 실없는 게 아니라 사회를 풍자하면서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과거 봉건사회에 마을 축제를 벌릴 때 사당패를 불러서 만담을 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 말뚝이한테 량반이 혼나는 이야기 같은 내용들도 있었답니다.”라고 말한다.
일본의 만자이는 에도시대부터 존재해왔으며 오사까에서 크게 발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자이는 바보와 똑똑이 역할이 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내 쾌감을 느끼는 게 일본 만담의 특징이다.
반면, 우리의 만담, 재담의 시작은 조선왕조시기로 거슬러올라간다. 옛날 ‘배뱅이굿’, ‘남사당패놀이’와 같은 마당놀이에서 놀이막 사이에 입담에 능한 한명 혹은 두명이 등장해 관중들을 웃기면서 즐겁게 한 것이 만담과 재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박춘재라는 만담가가 있었는데 재담으로 임금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잘해내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가무별감(歌舞別監)’이라는 특별한 벼슬까지 지냈다.
제자들에게 만담, 재담을 가르치고 있는 김영식(왼쪽).
20세기초에 들어서서 만담과 재담에 능한 사람으로 신불출(申不出)이 유명했다. 신불출은 1930년대 중반부터 〈곰보타령〉, 〈엿줘라타령〉, 〈망둥이타령〉, 〈망둥이 세마리〉 등의 만담으로 당시의 세태를 풍자하고 해학적인 리치를 보여주었다. 일제강점기, 형세가 형세인 만큼 인정극 또는 비극이 주류였다. 공연은 그나마 숨쉴 공간을 만들어줬다. 본명은 신영일, 신홍식, 신상학 등 분명치가 않다. 1930년대말에 윤백남과 신불출 등이 중심이 되여 만담, 재담 등에 재치 있는 기질을 보인 사람들로 ‘담우회’를 만들어 일제강점에 대한 풍자적인 만담, 재담으로 본격적인 공연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조선반도는 물론 중국의 동북지역 조선족집거지도 돌아다니면서 공연했다.
만담, 재담의 씨앗은 이렇게 중국 동북지역 조선족집거지에 심어졌고 그것이 싹이 틀 때에는 중국 조선족 특색의 만담, 재담으로 연혁된 것이다.
김영식은 “해방 이후, 1950년대에 들어서서 연변내에는 오락장소와 사교춤야회에서 여흥프로로 만담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최초 연변의 재담, 만담은 오락장소나 문예공연장에서 막간 때의 마땅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준비된 광대놀이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때 당시 재담, 만담도 지금과 같이 무대에서 간단한 의상과 소품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또 새소리, 소소리, 닭소리 등 여러 동물들의 소리를 모방하는 개인장끼들로 구성되였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재담, 만담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만담은 혼자 하는 입담풀이이고 재담은 대화형 만담을 의미하는데 주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형식이였다. 이때 한쪽은 ‘바보’역할을 하고 다른 한쪽은 ‘똑똑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자들에게 만담, 재담을 가르치고 있는 리경화(가운데).
당시 연변교육출판사의 편집으로 근무하던 림장철과 삼로인구연예술의 창시자인 최수봉은 자주 만담을 엮어서 공연했다. 림장철은 <세계일주>라는 제목으로 만담을 엮어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최수봉은 늘 야회의 취지와 모인 인물들의 신분에 맞추어 제목을 바꿔가면서 만담을 엮군 했다. 그는 지난 세기 60년대 중반까지 근 100여편의 만담과 재담을 발표, 공연했는데 그중에서 <좋다타령>, <말 아닌 말이 말썽>, <태양>, <해산중 출입금지>, <바지 열두개> 등이 비교적 유명하다. 지난 세기 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만담과 재담과 같은 구연예술이 침체상태에 처해있다가 20세기 70년대말, 8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최수봉이 쓴 <장생불로약>, <달고 쓴 것>, <돈>, <말> 그리고 리영근이 각색한 <개고기 오락회>, 림장철이 쓴 <웃음철학>, 김창봉이 쓴 <입담풀이> 등 많은 만담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1979년 3월 5일 연변구연예술단의 설립은 중국에서의 조선족구연예술발전에 력사적인 한페지를 엮게 되였다. 만담, 재담 창작이 의사일정에 올라있었고 해마다 우수한 작품들이 속출하였다. 따라서 프로 배우와 아마추어 배우들이 많이 나타나 여러 지방의 공연무대에서 활약하였다. 1978년에 연변구연가협회가 발족되였고 1988년에 연변구연가협회와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련합으로 구연예술경연을 개최하고 우수한 작품과 배우들을 장려하였는데 작가 김창봉, 배우 리동훈 등이 수상했다. 그리고 새로운 배우들이 많이 양성되였는데 그때 한창식, 강동춘, 리동훈, 한석준, 전영호, 황명화, 장미옥, 조학범, 리순자, 리옥화 등 만담, 재담 배우들이 유명세를 탔다.
김영식은 “지난세기 80, 90년대에 들어서 재담, 만담의 인기는 절정을 달렸습니다.”고 말한다.
그리고 리경화는 “당시 재담과 만담이 여러가지 사회문제와 비문명에 대해 해학적으로 날카롭게 풍자했으니 관중들이 작품을 관람하면서 속시원히 웃지 않을 수 없었고 보다 나은 사회가 만들어가려는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었지요.”라고 부언한다.
그 시기 분장재담, 극재담 등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다. 여러 사람이 재담을 하다가 이어 분장을 하고 각자의 역할을 바꾸어 극을 펼치면서 마지막에는 또 재담, 만담의 형식으로 되돌아와 사회문제를 재치있게 풍자했다.
우리에게 익숙하게 잘 알려진 만담가 강동춘도 그 당시 리광수가 극본을 쓴 <개>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개>는 ‘개’로 끝나는 150개의 단어를 리용한 작품으로 이때 만담이라는 쟝르를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공연물로 만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 계보를 이어받아 2000년대의 만담, 재담 무대에 오른 김영식과 리경화는 생활인지 연기인지 헛갈릴 정도로 만담, 재담을 몸으로 익혀왔다. 무대를 통해 건강한 웃음을 꿈꿔왔던 이들 단짝은 인터뷰 내내 ‘즐겁게 살자’며 속사포처럼 주고받았다.
두사람이 출연했던 재담 <즐거운 결혼식>은 2004년 제2회 전국 소수민족 곡예전시공연에서 1등상을 받았고 같은 해 이들이 출연한 재담 <입담풀이>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곡원잡담’ 프로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기까지 했다.
그때 배우들의 풍자와 우스개소리에 관중들은 포복요절했고 속이 시원해했으며 그 과정에 생활과 사업에서 쌓인 고민들을 씻어내며 대리만족을 얻었다…
김영식은 만담, 재담은 결코 ‘그냥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상을 비유하며 생활의 지혜와 유머가 섞여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리경화는 “함께 아이디어 하나를 놓고 치렬하게 고민하며 느리지만 차곡차곡 연기력을 쌓아가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지금은 공연의 주류가 바뀌였고 그러는 사이에 만담과 재담의 명맥은 끊기다싶이 한 상황입니다.”라고 말하며 섭섭한 표정을 짓는다.
2009년에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만담, 재담’의 대표적인 기능보유자로 활동 반경을 애써 넓혀가고 있는 김영식, 리경화가 만담, 재담을 되살리려 하는 리유는 분명했다. 만담과 재담에 대한 향수가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추억장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의 새로운 옷을 입은 만담과 재담을 통해 찡하게 여운이 남는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위축된 게 사실이다. 만담, 재담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흔하다. 아는 사람이라도 “아직도 만담, 재담이 존재하나?”라고 의문을 가질 정도로 존재가 희미해졌다. 설 무대도 마땅치 않다. 후진양성에도 애를 먹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본 만자이의 경우 현재 동경에만 전용 공연장 150개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전승, 보존이 잘되여있다고 한다. 게다가 매주 공영방송에서 장시간 만자이를 중계하기도 한다.
특히 비슷한 구연예술 형태인 중국 의 썅성(相声)은 꾸준한 지원과 관심 속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아주 대조적이다.
썅성은 명나라 때부터 1인 이상의 대화를 통한 대중공연의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 중엽부터 썅성배우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특히 1949년 이후부터 중국 전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당대 유명한 썅성배우들을 많이 배출한 천진은 오늘날 중국 만담의 성지로 불린다. 현재 풍공(冯巩), 곽덕강(郭德纲)과 같은 정상급 썅성대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20대 썅성배우도 흔할 정도로 신인들이 쏟아지고 있다. 해마다 썅성 경연대회를 열 정도로 인기도 높다.
만담과 재담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재미였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었던 시대에 라지오를 둘러 앉아 만담을 듣는 시간은 대단한 락이였다. 최고인기를 누리던 때에는 만담과 재담을 담은 테프도 많이 나왔다.
“만담, 재담은 ‘흘러간 과거’나 ‘퇴색한 우스개’가 아닙니다. 어엿한 우리 대중문화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수정혁신한 새로운 모습의 만담, 재담을 무대를 통해 방송을 통해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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