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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각과 그의 구화산행적 고증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7월3일 14시17분    조회: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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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교각
중앙민족대학 문예연구소 리암
 
 
《지장보살》 김교각은 중당이래 우리 나라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중국불교지역인 조선반도 삼국시기 신라의 고승이다. 사람들은 줄곧 그를 우리 나라 불교 4대명산의 하나인 구화산의 개산불조(開山佛祖)로 추앙하고있다. 그의 행적에 관하여 력대의 문헌에는 많은 기록이 있다. 례하면 만청의《구화산지》,《청양현지》, 송의《고승전》 그리고 명의《신승전》 등에 모두 그의 전기가 수록되여있다. 청의 리용(李庸)이 말하기를《구화산은 지장보살로 하여 존대받고있으니 그를 알리려면 지장보살의 성스러운 업적을 널리 알리는것이 우선 마땅한것인줄 안다… 고로 지장의 전기를 써 인물지에 올리니 글 읽은 후생들이 그 어질고 뛰여남을 감탄하고있다.》 하지만 중국과 조선반도의 문화교류사의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는 김교각에 대해 학계에서는 아직 충분한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있다. 특히 그의 조국에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있으니 아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또한 김교각에 관한 우리 나라 문헌자료 역시 그의 출신, 당에 들어온 시간, 소속교파 등 방면의 기록에 있어서 일치성을 보이지 않거나 일부 결함을 보이고있다. 따라서 본고는 중국과 조선반도의 불교문화교류사측면에서 이에 대해 간단히 론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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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조선반도의 교류력사에서 불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재에 따르면 불교가 조선반도에 전파된것은 기원 372년으로서 이는 곧 중국 동진(東晋)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이다. 그때《전진의 부견이 사자와 중 순도를 보내여 불경과 경문을 가져왔다(前秦符堅遣使及僧順道送佛像經文)》. 2년이 지난후《아도가 진(즉 동진)에서부터 왔다. 이듬해 을해 2월 초문사(肖門寺)를 지어 순도(順道)를 안치했고 또 불란사(佛蘭寺)를 지어 아도(阿道)를 안치했다. 이것이 고구려불법의 시작이다.(阿道來自晉(卽東晋), 明年乙亥二月, 創肖門寺以置順道, 又創佛蘭寺置阿道, 此高(句)麗佛法之始)》 12년후 백제 침류왕(枕流王)이 즉위(384)하면서 호승(胡僧)이 동진으로부터 불법을 전파해오기 시작한다. 신라는 이와 조금 늦은 눌지왕(納祗王)(417-458년) 재위시기에 호승이 왔으며《량나라가 사자를 보내 가사와 향물을 주었다. (梁遣使賜衣著香物)》 봉건국왕들의 제창하에 삼국은 선후로 불법을 받아들였으며 끊임없이 중국으로부터 불상과 경문을 수입하였다. 동시에 중국승려들이 조선반도에 가서 전법하는것을 환영하였다. 례하면 고구려의 광개토왕 5년(396) 진의 유명한 백족화상 현시(縣始)가《경문 수십부를 가지고 와서 고구려를 왕화(往化)했으며 때를 맞춰 널리 퍼뜨렸다.(賫持經律數十部往化高句麗, 乘機宣。)》 백제 위덕왕(威德王) 19년(541) 사자를 량에 보내여 열반 등 경문을 구했으며 신라 진흥왕(眞興王) 26년 진(陳)의 사자 류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경서 1700여권을 가져다주었다. 이와 동시에 삼국의 승려들도 끊임없이 중국에 와서 불법을 구했으며 그중 유명한이들로는 고구려의 의연(義淵), 파약(波若), 혜관(慧灌)이 있으며 백제의 혜현(慧顯), 겸익(謙益) 그리고 신라의 원광(圓光), 원각(圓覺), 자장(慈藏), 의상(義湘), 원효(元曉), 승전(勝詮), 도의(道義), 보조(普照) 등이 있다.
김교각이 생활하던 8세기는 신라불교의 전성기였다. 비록 삼국가운데서 신라에 불교가 류입된지는 조금 늦은편이지만 왕공귀족들의 적극적인 참여하에 불교는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6세기 전기 이후 불교가 직접 봉건정치와 결합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의 보호를 받으며 왕궁으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전파되였다. 최치원이《신라국지증대사적조지탑비명(新羅國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에서 서술한바와 같이《접때 불교가 서쪽에서 찾아오니 부처의 지혜가 동쪽 나라까지 흘러왔다. 본디 군자의 땅이라 부처의 지혜가 물들기를 매일처럼 깊어만 갔다… 나라에서부터 좇고 고을마다 밝히니 모래가 바람에 실려오듯 후미진 모퉁이까지 깊이 퍼져왔다.(是乃天彰西顧, 海印東流, 宜君子之鄕, 染法王之道, 日深又日深矣… 就以國觀國, 考從鄕至鄕, 則風傳沙崄而來, 波及海隅之心)》 고려 명승이며《해동고승전》의 저자인 각훈(覺訓)도《신라는 불교를 믿으며 사람마다 다투어 귀의하고있어 그 세상을 바르게 할수 있음을 알게 된다. (新羅旣信奉佛敎, 人爭歸信, 知世之可化)》고 하였다. 신라의 력대 임금들도 대부분 독실한 불교도였다. 그중 한 례를 든다면 24대 임금 진흥왕은 어려서부터 불법을 믿었으며 만년에는 삭발하여 가사를 걸치고 스스로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일컬었다. 그 왕비도 임금을 본받아 스스로 비구니가 되여 영흥사(永興寺)에 옮겨 거처하였다.《법흥왕이 이차돈의 모략을 좇아 단호히 불법을 신봉한(法興王從異次頓之謀, 斷行奉佛)》이래 신라는 대량적으로《절을 짓고 승려를 안치했으며 불상을 모시고 불탑을 세웠다. 불법을 구하려는 고승들이 수륙 량도에 넘쳤으며 불교가 중국에서 전해온 뒤 280년간 구해오지 않은 경서가 없으며 전해오지 않은 경서도 없었다.(創寺度僧, 造像起塔, 求法高僧不絶于海陸兩道, 造疏大土蹶起于國, 二百八十年間, 無經不來, 無經不傳)》 기재에 따르면 법흥왕 15년(528)부터 14세기초 신라가 멸명하기까지의 300여년사이, 수많은 신라승려들이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구했으며 그중 70여명의 저명한 승려가 배출되였다. 이런 류학승(留學僧, 그밖에 장기간 당에 거주하고있는《상주승(常住僧)》도 있었다)들이《불법을 익힌 뒤 귀국하여 모두 임금의 스승이 되고 불문의 수령이 되였다.(得法歸國, 皆爲國王之師表, 佛門之領袖)》 이들은 삼한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중국과 조선반도의 문화교류에 지울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기원 7세기중엽, 신라의 불교는 이미 기본적으로 열반종, 률종, 화엄종, 법성종, 법상종, 선종, 천태종 등 7개 파로 나뉘여 형성되였으며 8세기이후 선종이 서서히 불단의 주류를 이루며 선계파(禪系派)를 형성해나가게 된다. 이런 불교류파는 시작은 비록 함께 중국의 불교를 사승하거나 거기에 기원을 두고있지만 신라땅에 옮겨간 뒤로는 이국 력사문화와 풍토습관의 세례를 거쳐 끊임없이 뿌리를 내리고 발육성장하면서 내용과 형식 면에서 모두 풍부한 발전을 가져왔다.
동방의 여러 나라가운데서 당조와 신라의 교류가 특히 빈번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신라와 당조는 한동안 마찰도 빚었지만 8세기초엽 이후 두 나라는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당왕조가 동북방에 위치한 이 이웃나라에《친인선린(親仁善隣)》의 정책을 펼쳤기에 두 나라는 문화교류가 더욱 빈번하게 된것이다. 738년 당현종이 형도(邢濤)를 사자로 파견하여 조문을 드릴때 말하기를《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불리우며 례의범절을 알기로는 중국과 비슷하다.(新羅號爲君子之國, 頗知書禮, 有類中國)》고 하였다. 당시 신라의 류학생, 승려, 상인들이《장안에 넘쳐났다. (不絶于長安道上)》 당조의 력대황제들은 여러차례 신라의 고승을 접견하였으며 그들이 당조에서 공부하고 행화(行化)하는것을 격려하였다. 당시 중국의 이름난 고승들인 현장, 지엄, 서당, 법맥 등은 모두 신라의 승려를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그들에게 비결과 불법을 전수하였다. 따라서 량국의 문화교류에 적극적인 역할을 일으켰다.
이상은 바로 김교각이 생활한 사회력사환경에 대한 간술이다. 근 몇백년에 달하는 력사기간 순도와 아도 등이 처음으로 삼한에 불법을 전수하였으며 김교각과 혜초 등이 후에 중국에 와서 불교를 공부하고 장기간 거주하면서 행화하였으니 이는 중국과 조선반도 문화교류사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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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은 삼한시기 신라 경성사람으로서 속성은 김이요, 법호를 교각이라 하였다.《지장보살》은 그가 원적(圓寂)한후의 존호이다. 많은 문헌자료들이 그의 가계를 수록하고있는바 귀납해보면 크게 두가지 설법이 있다. 그중 비교적 영향력이 있는것은 송의 찬녕(贊寧)(919년-1001년)이 지은《고승전(高僧傳)》과 당의 비관경(費冠卿)(생졸 미상, 주로 정원부터 장경년간에 활동)의《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이다.《고승전》에서는《석지장은 신라국왕의 친척이다.(釋地藏新羅國王之支屬也)》고 하였고 후자는《지장은 신라왕자이다.(僧地藏則新羅王子)》라고 하였다. 그후 무릇 김교각을 언급한 문인들은 저마끔 이 두 설법가운데 하나를 취하였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김교각자신이 쓴《수혜미(酬惠米)》라는 시에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후자의 관점이 정확하다. 시에서《금방울 버리고 포의를 걸쳐 바다건너 도 닦으러 화서에 왔네. 이 몸이 본디 왕자였으매 수행길에서 사모하던 오용지를 만났더라.(棄却金鸞納布衣, 修身浮海到華西。 原身自是酋王子, 慕道相逢吳用之)》고 하였으니 그는 왕위를 마다하고 삭발한 뒤 바다건너 중국에 온 존귀한 신라《왕자》임이 틀림없다.
신라왕족은 세세대대로 불교를 깊이 믿었기때문에 그 자제 중에는 부귀와 공명을 버리고 불문에 들어선이들이 비교적 많다. 그들중의 일부는 자신의 땅에서 명산대찰을 찾아 수련하는가 하면 일부는 중국에 찾아와 도를 닦기도 하였다. 지어 일부 사람들은 먼 바다를 건너 직접 인도에 가서 불도를 구하기도 하였다. 김교각은 바로 중국에 온 많은 사람가운데 한분이였다. 여러면에서 알수 있는바 김교각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당조에 들어오기전 이미 한문에 조예가 깊었고 문학수양도 높이 쌓았다. 이것은 현재까지 전해내려오는 그의 두수의 시에서 잘 보여진다. 당에 들어온후 그는 많은 시를 지었는바 청의 주윤(周贇)은《지장탑을 노닐며(遊地藏塔)》라는 시에서《록원에는 이미 절이 없는데 계림에는 외려 시가 있구나.(鹿苑今無寺, 鷄林獨有詩)》라고 읊었다. 그리고《화성사에서 우연히 있노라(化城寺偶聯)》라는 시에서는《서방의 활불인줄 알았더니 동국의 시선이로다.(始信西方活佛, 是東國詩仙)》고 썼다. 아쉬운것은 김교각의 시가 대부분 실전되고 오늘날 그 일부를 보고 대략 짐작할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김교각이 어느때 당에 들어왔느냐에 관해서는 줄곧 여러가지 설법이 존재했다. 력대의 각종 문헌기재는 저마끔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있으며 좀처럼 그 일치함을 보이지 않고있다. 하지만 총적으로 보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볼수 있다.
하나. 숙종 지덕년간(756년-758년)에 당에 들어왔다는 설법이다. 청조 강희년간 유성룡(喩成龍)과 리찬(李燦)이 펴낸《구화산지(九華山志)》와 광서년간 사유개(謝維喈)와 주윤이 편찬한《구화산지》 및 강희년간 팽정구(彭定求) 등이 편찬한《전당시》 권 808에서는 모두 김교각이《당 지덕년간초에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왔으며 구화산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있다. 찬녕의《고승전》 권 21《김지장》조에《지덕초 제갈절 등이》 구화산에서《석실(石室)에 페목(閉目)하고있는》 김교각을 만났다는 단락이 있다. 청조의 문인들은 아마 이 만남을 김교각이 금방 온 시기로 오인하고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고증해보면 여기서 문제점을 발견할수 있다.《지덕》은 당숙종 리형(李亨)이 집정한 첫해의 년호로서 3년밖에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절 등이《지덕초》에 구화산을 돌아볼 때는 김교각이 이미 석굴에서 페목선정(閉目禪定)하고있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김교각이 구화산에 들어온 시기는 기필코 지덕이전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설법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정된다.
둘. 당고종 영휘 4년(653)에 중국에 들어왔다는 설법이다. 홍일법사(弘一法師)의《지장보살성덕대관(地藏菩薩聖德大觀)》에서《송의〈고승전〉에 기재하기를 당 영휘 4년 신라왕족 김교각이 중국 구화산에 왔다. 령적이 퍼그나 많으므로 기재되여 전해진다.(宋《高僧傳》載, 唐永徽四年, 新羅王族, 姓金, 名喬覺, 至中國九華山。靈蹟甚多, 具載傳中。)》고 하였다. 특히 이 방면에 비교적 권위적인 정복보(丁福保, 1874년-1952년)의《불교대사전》에서는 지어 김교각이《당 영휘 4년, 24세때 삭발한 뒤 말 잘 듣는 흰 개를 이끌고 배 타고 와서 강서 지주부동쪽의 청양현 구화산에 들어갔다. 구화산마루에 단정히 75년을 앉아있다가 개원 16년 7월 30일 밤에 입적하였다. 향년 99세였다. 송의《고승전》에 그의 전기가 실려있다.(唐永徽四年, 二十四歲, 祝髮携白犬善聽, 航海而來, 至江西池州府東靑陽縣九華山, 端坐九華山頭七十五載, 至開元十六年七月三十日夜成道。計年九十九歲。宋〈高僧傳〉爲他立傳。)》고 하였다. 비록 서술문자는 많지 않지만 인, 지, 시, 사 등을 모두 소상히 밝히고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는듯하다. 하지만 력사자료를 자세히 찾아보면 이러한 설법은 그 문제점이 수두룩이 나타난다. 례하면 당조와 송조의 김교각에 관한 기록에는 그가 영휘 4년에 구화산에 들어갔다는 언급이 없지만 왜 1000년이나 지난 뒤 만청과 근대학자의 서술에서 갑자기 이러한 설법이 나온것일가? 또 그들이 송조의 찬녕이 지은《고승전》을 참고문헌으로 이러한 설법을 제기하였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 상관 장절을 찾아보면 근본 그러한 설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보아 그 근거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수가 없다. 김교각 본인이 쓴 시《환속하는 동자를 보내며》에서 수련에 읊기를《절간이 외로워 집을 그리니 승방을 작별하고 구화산을 내리누나.》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구화산이 등장한다. 구화산의 원명은 구자산으로 당조의 대시인 리백이 현종 천보년간(742년-756년) 여기서 시를 지으면서 서문에《청양현남쪽에 구자산이 있는데 그 높이가 수천장에 달하고 정상에 아홉 봉우리가 련꽃모양을 하고있다… 그 옛 이름을 버리고 구화산이라 불렀다.(青陽縣南九子山, 山高數千丈, 上有九峰如蓮花……予乃削其舊號, 加以九華之目。》고 썼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김교각이 이 시를 지을 때는 필연코 천보중기이후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구에《구화산을 내린다》는 구절이 있을수 없다. 만약 우에서 서술한것처럼《영휘 4년 중국에 와》서《개원 16년에 입적》하였다고 하면 그가 어찌 입적한 몇십년뒤 시를 지을수 있단 말인가?
셋. 개원 7년(719) 당에 들어왔다는 주장이다. 구화산문물관의《지장왕소개서》에는 김교각이《당 개원 7년 바다 건너 중국에 와서 구화산에 들었다.(唐開元七年航海來中土, 卓錫九華山。)》고 씌여있다. 이것은 청조의 리용이 편찬한《구화산지》 권 3의《총림・김지장탑》조에 근거한것임이 분명하다. 이 조에는 김교각이《24세때 바다 건너 구화산에 들어갔다. 정원 10년(794) 99세를 일기로 입적했다.》고 적혀있다. 우에서 서술한《개원 7년》 입당설은 794년에서 99를 덜어내고 다시 24를 보탠 결론이 분명하다. 여기에서의 관건은《24세》이다. 화성사서쪽 신광령우의 김지장탑은 김교각이 입적한 뒤 삼년후에 지은것이다. 천여년의 시간동안 각종 원인으로 말미암아 여러차례 다시 지었다. 하지만 리용이 본 탑은 청 강희 23년 유성룡이 군수로 있을 때 다시 지은 탑이다. 그 탑명(塔銘)이 무엇에 근거하여 김교각이 24세때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는지는 알수가 없다. 기록에 근거하면 최초로 지은 탑명은 이미 실전되였으며 오늘날 그 원모습을 알 방법은 없다. 송인 류성(劉城)이 그의《구화산유람기(遊九華山記)》에서《구화산의 비판(碑版)에서 적다싶이 지장이 여기에 온것은 당 지덕이전이며 열반은 정원년에 들었다.》고 하였으니 그가 본《구화비판(九華碑版)》에 최초의 모습을 보존하고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도 역시《지덕이전》과《정원년》이라고 시간범위만 말했을뿐 구체적인 시간을 밝히지 않았다. 필자가 알기로는《개원 7년》과《24세》설을 증명해줄 이밖의 더욱 원시적인 자료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김교각은 대체 어느해에 당나라에 와서 안휘 구화산에 들어갔으며 어느해에 죽었을가? 다행히 이에 관한 믿음직한 자료가 있어 우리에게 소중한 선색을 제공해주고있다. 바로《전당문》(청 가경 19년, 동고(董誥) 등 편) 제600권에 기재된 당 비관경이 쓴《구화산화성사기》이다. 전문은 1000자좌우로 되여 있으며 내용이 충실하고 서사가 명확하며 문필이 공정함으로 하여 오늘날 김교각연구에서 참고할만한 소중한 문헌자료이다. 김교각의 활동년대와 타계년대에 관하여 문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개원말년 장단이라고 부르는 승려가 고을에서 여기 와서 묵었다. 마을 유지인 호언이 만류하여 중생을 위해 널리 법도를 폈다. 마침 그곳 득세한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였는데 고을관아에서 아둔하여 그 거처를 불사르고 페몰시켰다. 이때 승려 지장이 있었는데 바로 신라왕자이며 김씨의 가까운 친척이다. (開元末, 有僧檀號張姓, 自郡館至, 為鄉老胡彥請住, 廣度男女。觸時豪所疾, 長吏不明, 熒其居而廢之。時有僧地藏, 則新羅王子, 金氏近屬。》
《지덕초년에 제갈절 등이 봉우리에 올랐다. 산이 깊고 인적이 없으며 날씨 또한 맑은데 승려 한분이 석실에 페목하고있었다.(逮至德初, 有諸葛節等, 自麓登峰。山深無人, 雲日雖鮮明, 居唯一僧, 閉目石室。)》
《건중초에 장암이 당지를 다스리고있었는데 스님의 품격을 높이 사 시주를 듬뿍 하였다. 낡은 편액을 옮기려 하므로 조정에 아뢰여 절을 지어주었다.(建中初, 張公岩典是邦, 仰師高風, 施捨甚厚。因移舊額, 奏置寺。)》
《구십구세되던 정원 십년 여름날 갑자기 제자들을 불러 작별하니 비로소 세상을 뜨게 됨을 알았다.(時年九十九, 貞元十年夏, 忽召徒告別, 罔知攸適。)》
이러한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알수 있다. (1) 김교각이 당에 입국하여 구화산에 들어간 시간은 당현종 개원말(740년좌우)이전이다.
(2) 제갈절일행이 구화산에서 김교각을 만날 때는 당숙종 지덕초(약 756년)이다. (3) 군수 장암이 낡은 편액을 페기하고 새 편액을 걸었을 때는 당덕종 건중초(약 781년)이다. (4) 김교각이 원적한 시간은 당덕종 정원 10년 즉 794년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비관경이 문장의 끝부분에 적은 한단락의 서술이다.《때는 원화 계사(癸巳)년이다.(즉 당헌종 원화 8년, 813년) 내가 산아래서 한가롭게 지내며 어려서부터 보고들은것을 삼가 적는다. 맹추 15일(時元和癸巳歲。予閑居山下, 幼所聞見, 謹而錄之。孟秋十五日。)》 보다싶이 비관경의 이 기록은 원화 8년에 적은것이다. 즉 김교각이 입적한후의 19년째되던 해이다. 비관경의 가족은 세세대대로 구화산아래서 살았으니 어려서부터 김교각의 사적을 직접 목격했던것이다. 그는 김교각이 구화산에서의 행적을 증명할수 있는 믿음직한 증인이라고 할수 있다.
《전당문》에서는《관경, 자는 자군(子軍)이요, 청양사람이다. (구화산은 안휘성 청양현경내에 있다) 원화 2년 진사에 급제했고 모친의 상을 당하여 무덤을 지키며 구화산 소미봉에 은거해 있었다. 장경(長慶) 3년 어사 리인수(李仁修)가 그 효성을 기특히 여겨 조정에 천거하였으니 조정에서 불러들여 우습유(右拾遺)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고 기록하고있다. 따라서《구화산지남․고증(九華山指南․考證)》에서는《비관경은 지장과 함께 정원시기사람이다. 집은 구화산아래 있었다. 그의〈화성사기〉는 믿음직하다.(費冠卿與地藏同爲貞元人, 家九華山下。其化城寺記可爲信使。)》고 적고있다. 리용도 그의《구화산지》 권 8에서《관경과 지장은 모두 정원시기사람으로서 이는 실록이다.(冠卿與地藏同爲貞元人, 此實錄也。)》고 하였다.
김교각에 관하여 제일 처음 기록한 문자는 응당 그가 원적한 삼년후 세운 탑명이라고 할수 있지만 아쉽게도 일찍 실전되여 오늘날에 와서 고찰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비관경의《구화산화성사기》는 오늘날 우리들이 볼수 있는 김교각 관련 문헌가운데서 가장 일찍하고 가장 완정한 진실한 기록이라고 볼수 있다. 후세의 문인들이 김교각을 론할 때 대부분 이 기록을 근거로 하고있으나 천여년동안 이리저리 옮겨 적다보니 현대에 이르러 일부 문제에 대한 엇갈림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것은 제치더라도 비교적 권위를 자랑하는 문헌, 례하면 송의 찬녕이 지은《고승전》(그가 원적한 시간을 정원 19년으로 적음), 청의《전당시》에 수록된《김교각조》(그의 당에 입국한 시간을 지덕초로 적음), 현대인 정복보의《불교대사전》 및 상해 사서출판사의《종교사전》(이 두 책은 모두 입국시간을 영휘 4년, 원적시간을 개원 16년으로 적음) 등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작은 흠집이라 하더라도 지인론세(知人論世)에 립각하여 김교각을 바르게 료해하고 연구하려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지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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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각이 당에 입국하기전의 정황과 입국경과는 력사문헌에서 극히 간술된 기재만 찾아볼수 있다. 비관경이《구화산화성사기》에서 서술했다싶이《김교각은 어깨가 벌어지고 기골이 출중했다. 신장은 칠척이요, 힘은 여느 사람보다 셌다. 일찍 말하기를〈륙경의 천하와 삼청의 학문가운데서 유독 궁극의 진리만이 내 마음에 맞는다〉고 하였다. 삭발하고 바다를 건너 길을 걷다가 이 산이 구름을 꿰뚫고 아스라니 높으니 천리밖에서 힘차게 걸어올랐다.(金喬覺項聳骨起, 驅長七尺, 而力倍百夫。嘗曰:‘六籍寰中, 三清術內, 惟第一義與方寸合。’落發涉海, 舍舟而徒, 睹此山於雲端, 自千里而勁進。)》 송의 찬녕이 지은《고승전》에서도 그가《마음은 자비로왔지만 모습은 험상궂었다. 접때 삭발하고 바다 건넌 배에서 내려 걸으며 석장을 짚고 여러곳을 돌았다. 지양(오늘의 귀지시)에 이르러 구자산을 보고 못내 기뻐하였다. 산길을 따라 봉우리에 오른 뒤 바위에서 쉬고 계곡의 물을 길으며 그 고결함을 보여주었다.(心慈惡貌, 疑悟天然…于時落發涉海, 舍舟而徒, 振錫觀方, 邂逅至池陽, 睹九子山焉, 心甚樂之。乃逕造其峰, 岩棲澗汲, 以示高潔。)》고 하였다. 이로부터 김교각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였으며 왕위를 탐하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또한 자라서 성인이 된후《륙경의 천하》를 돌며《사해에 불도를 펴》는 큰 뜻을 품었음을 알수 있다.
김교각이 당에 입국한후의 행적에 관하여서는 비관경과 그 이후의 수많은 기록에서 적잖은 정황을 료해할수 있다.
김교각이 금방 도착했을 때《구화산의 여러 봉우리》가 아직《개암나무가 우거진》 상태에 처해있었다. 그는《천리밖에서 힘차게 걸어》 입산한후《개암나무를 베고 등나무를 헤치》며 여러 곳을 답사한 결과《골짜기의 땅을 얻어》《남쪽을 향하고 땅이 고른》 곳에 은거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길고 고달픈 수행을 시작했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는 구화산에서 옹근 75년동안 수행에 정진했다고 하는데 사실여부는 현재 고증할 길이 없다.
처음 김교각은 산굴에서 살면서 사람들과의 래왕을 자제했다. 생활여건은 아주 간거했는바 거친 삼베옷을 입고《소금에 좁쌀을 끓여먹었다.》 산굴에 석장을 세운 뒤 세상일을 묻지 않고 긴 세월 선정(禪定)하여 수련에 힘썼는데 지어 독사한테 물려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어느 한번은 불경을 연찬하기 위해 산을 내려 백리밖의 남릉(南陵)에 가서 타인한테 불경을 베껴줄것을 부탁했다. 그때 남릉에 유탕(兪蕩)과 같은 사람들이 그를 무척 존중했는바 그의 청탁에 응해 불경을 필사하여주었다고 한다. 비관경은《입산한후에는 속세와 래왕을 끊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현존하는 두수의 시로부터 미루어보아 결코 전혀 래왕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어려운 생활환경속에서 김교각은 산아래 백성들과 래왕하였는데 일부 사람들과는 깊은 친분을 맺기도 하였다. 시《동자를 산아래로 보내며》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고있다.
 
적적한 절에서 집이 못내 그리워
인사하고 승방 떠나 구화산을 내리누나
대란간 기대 대말 타기 한창 나이라
금싸락 줏는 일도 싫증났구나
물병 채우던 계곡물속 달희롱도 그만두었고
차 끓이는 사발속의 꽃놀이도 그치였구나
잘 가거라 눈물 헤프게 흘리지 말어라
로승은 안개와 노을을 벗 삼으리라
 
이 시는 환속하는 동자승을 산아래로 송별하면서 지은것인바 그 애틋한 정이 시행에 구구절절 녹아있다. 동자는 김교각과 한동안 함께 생활했었다. 그동안 동자는 자주 구화산 봉우리의 계곡에서 달놀이도 했었고 김교각과 함께《쌀이 없어 소반에 나물을 끓이》는 고달픈 나날도 보냈었다. 바로 이러한 생활경력이 그들사이에 돈독한 망년지교를 맺어주었던것이다. 시에는 동자의 천진란만한 모습이 약동하고있을뿐더러 김교각이 어린 벗을 보내는 석별의 정도 넘쳐흐르고있다.
김교각은 또《수혜미》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조리고있다.
 
금방울 버리고 포의를 걸쳐
바다건너 도 닦으러 화서에 왔네
이 몸이 본디 한 나라 왕자였으매
수행길에서 사모하던 오용지를 만났더라
다른 말은 못드리고 가르침을 청했더니
어제 쌀을 보내와 끼니를 이었다네
이제는 반찬과 밥을 맛있게 먹었으니
배불러 지난날의 고픔을 잊어버렸네
 
이것은 쌀을 보내온 벗한테 준 답사이다. 신라국의 왕자가 구화산 석굴속에 은거하니 그 어려움은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시에서 보아낼수 있는바 김교각은 이미 며칠동안 쌀이 떨어져 굶주림에 시달리고있었다. 바로 이때 마음씨 착한 친구가 쌀을 보내와 그를 기아에서 해탈되게 하였다. 이에 대해 김교각은 내심 감격해마지않았는데 붓을 들어 그 고마운 마음을 시로 화답하였다.
두수의 시는 질박하고 서글프며 또 감개무량함도 없지 않다. 이는 국적을 초월한 뜨거운 인간애에 대한 진솔한 감정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당조는 불교발전의 전성기였다. 당왕조는 문호를 활짝 열어젖히고 수많은 외국승려들이 수시로 중국에 와서 공부할수 있게끔 했으며 중국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행화하려는이들의 소원도 들어주었다. 이러한 객관적환경은 김교각의 수련에 상당한 편리를 제공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구화산일대의 백성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끔 하였다.
숙종 지덕초 청양현에 제갈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지인 몇몇과 더불어 구화산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였다. 때는《산은 깊고 인적은 없는데 날씨 또한 화창하였다.》 그들은 부지중 어느 산굴에서《승려 하나가 페목하고 석실에 들었는데 다리 부러진 솥을 보니 소금과 좁쌀을 끓여 끼니를 에웠다.》 이 고행승이 바로 김교각이였다. 제갈절일행은 크게 감동되여《땅에 엎드려 흐느끼며 말하기를〈스님의 이 지경으로 고행을 하는것은 우리들의 큰 잘못이다.〉(投地號泣曰:‘和尚苦行如此, 某等深過’)》 그리하여 그들은 돈을 모아《단공의 옛 땅을 사 한사코 스님을 모시려고 하였다.(買檀公舊地, 敢冒死請大師從之)》《린근의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모여들어 나무를 베고 집을 지으니 선방이 그 모습을 바꾸었다.(近山之人聞者四集, 伐木築室, 煥乎禪居)》 그중 가장 이름난이로는 승유(勝瑜)라는 사람이였는데 절이 선 후 김교각의 상좌제자가 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절을 짓는 과정에 청양현사람 민양화(閔讓和)가 땅을 내여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후에 그 자신과 아들 도명(道明)은 선후로 출가하여 김교각의 충실한 제자가 되였다고 한다.
김교각은 백성들의 뜨거운 지원을 받았을뿐만아니라 지방정부와 조정의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덕종황제 건중(780년-783년)초에 군수 장암(張岩)이《스님의 높은 품격을 경모하여 시주를 듬뿍 하였다.》 동시에 황제께 상주하여 절의 편액을 내리시길 청하였다. 력대의《본 고을 사또와 유지들은 모두 절에 찾아와 스님을 존대하기를 거르지 않았다. 서강의 상인들도 멀리서부터 산을 바라며 포목 약간필과 돈 약간꿰미를 시주한 뒤 향을 태우며 례를 올리고 스님의 넓은 포덕을 빌었다. 하물며 몸소 마주하고 가르친자들의 깨달음이야 오죽했으랴. 이웃고을의 귀인들도 례를 다하며 시주를 아끼지 아니하니 어찌 본 고을의 사또들이 태만하리오! 부자와 귀족들이 기꺼이 사재를 기울이는것 또한 그 덕망이 감화한 까닭이리라.(本州牧, 賢者到寺, 必嚴師之敬。西江賈客于雲外見山, 施帛若干匹, 錢若干緡, 焚香作禮, 遙以祈佑師廣德焉;況親承善誘感悟深者哉。旁邑豪右, 一瞻一禮, 必獻桑土, 豈諸牧不合禮焉!富商大族, 輕其產哉。道德所感也。)》 이로부터 당시 김교각의 영향이 어느만큼 컸던가를 알수 있다.
얼마뒤 김교각의 사적과 명성이 그의 조국 신라에도 전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려로의 멀고 험악함을 마다하고 바다건너 구화산에 들어갔다. 당시 구화산을 바라고 찾아온 신라의 승려들이 구경 얼마나 되는지는 지금 집계할 방법이 없다. 당시 화성사가 사방의 많은 시주를 받긴 하였지만 이런 래방자의 의식을 해결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김교각은 제자들더러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하도록 했으며《밭을 일구어 식량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짐작컨대 화성사의 기거한 승려들의 수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수 있다.
김교각은 90고령의 만년에 이르러서도 생활이 무척 검소하였다. 입는것이란 손수 짜낸 베로 지은 옷이였고 여름이면 시중군 한사람을 데리고 남대(南臺)에 거주한외 평소에는 기타 승려들과 함께 기거하였다.
기원 794년(당덕종 정원 10년, 신라 원성왕 10년) 어느 늦은 여름날, 99세의 김교각은 중승을 불러모아 작별을 고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대를 받던 구화산 개산종사는 일심전력으로 불법을 전파하기 위하여 고심하다가 육신의 로쇠함을 어길수 없어 조용히 입적하였다. 그의 홍법을 위해 모든것을 불사한 고귀한 정신은 그의 수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였고 구화산이《강동향화지종(江東香火之宗)》으로 불리며 우리 나라 불교 4대명산으로 되는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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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불교에는 다음과 같은 고훈이 있다.《출세하려면 산골을 떠나고, 도를 닦으려면 반드시 스승을 모시라.(千喬必出谷, 學道務求師)》 이것은 참으로 지언이 아닐수 없다. 그러면 김교각이 당에 입국한 뒤 누구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 또한 어느 종파였을가? 이 문제는 아직까지 어느 누가 특별히 제기한적이 없다. 그가 당에 입국한 초기에《도처에 석장을 짚으며 돌아다니다가》,《구화산이 구름을 꿰뚫고 높이 솟은것을 보고 천리밖에서 힘차게 걸어왔다.》는 기록을 보아 강동, 오월 지역을 전전하면서 명산대찰을 찾은 시간이 어느정도 되는듯하다. 이 기간에 부근 명찰의 고승들과 접촉이 있은듯하지만 아쉽게도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상황은 파악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허다한 자료들에서도 그가 구화산에 든후 다른 불교 교파와 어떤 련계가 있었는지는 밝히지 않고있으며 저술하고 설법한 자취도 찾을길 없다. 그냥 그와 상관되는 일부 자료에서 이 방면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다. 비관경은 그의《화성사기》에서 적기를 입산초에 김교각이《사부경을 얻고자 하산하여 남릉에 가니 유탕 등이 필사하여드렸다.》 만년에 그가《못가에 대를 짓고 사부경을 연찬하니 하루종일 향불이 꺼지지 않고 유독 그 오묘함에 심취해있었다.》《지장보살원기(地藏菩薩愿記)》 서문에서도《보살님이 매일 남대에 앉아 향을 피워올리고 사부경을 연찬하며 그 오묘함에 심취해있었다.》고 적고있다. 여기서 말하는《사부경》이란 바로 종래의 불교정토종에 근거를 둔 리론경전이다. 즉《무량수전》,《관무량수전》,《아미타경》외에《고음성타라니경》을 첨가(혹자는 세친《왕생론》을 첨가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였다고 하므로《4부의 경서》라고 한다. 당초기에 자은대사 규기가 최후로 이 네부의 경서를 중국정토종의 주체경서로 확정하였다. 상술 기록에서 김교각은 한생을《사부경을 소원하여》 이를 지도서로 삼아 자아수련과 타인의 교화에 힘썼음을 알수 있다. 또한 그가 정토교의를 신봉하며 정토종일파에 속함을 단정할수 있다.
미타정토종은 고인도에서 발원하여 동한말년에 중국에 류입되기 시작하였으며 동진이후에 점차 성행하였다. 정토종은 일명 련종(蓮宗)이라고도 한다. 시조는 동진 명승 혜원(慧遠)이며 그가 려산에서《십팔현》과 함께《못을 파서 백련을 키우》면서 백련사를 성립했다. 그후 현란(縣鸞)(476년-542년), 도작(道綽)(562년-645년) 등이 미타정토신앙을 힘써 발전시켜 독립적인 교의체계로 만들었으며 세속에 널리 전파하였다. 당조초기 선도(善導)(613년-681년)때 이르러 정토종체계는 이미 형성되였으며 정식으로 중국의 정토종을 이루었다. 그 교의는《마음으로 부처가 되는것》이며 선정 상태에서 미타의 형상을 관상(觀想)하며《일심으로 미타만 외우며 앉으나서나 시절과 멀고가까움에 상관없이 외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부처의 원력(願力)을 입어 정토세계로 왕생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 핵심적특징은《입으로 부처를 외운다(口稱念佛)》로 개괄할수 있다. 중국의 정토종은 기타 불교종파와 비할 때 리론적인 측면에서 심오한 철리를 내재하지 않고있으며 전법체계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풀어진것이 하나의 특점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그 수행방법이 간편하기에 중당이후 널리 류행되다가 나중에 선종과 융합된다.
오늘날 김교각이 남긴 문자가 극히 희소한것은 바로 정토종 자체가《입으로 부처를 외우고》 리론전개와 저술 및 설법을 중시 하지 않은것과 련관이 있지 않나싶다. 김교각이 구화산에 들어 수련한 방법은《페목석실》이였고《독사한테 물려도》《단정히 앉아 무념의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렇게 얼마만큼의 세월을 견지 했는지 모른다. 이에 대해 송의 진암(陳岩)은《구화사집(九華寺集)》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있다.《땅에는 서리가 끼고 락엽이 흩날리는데 입산하여 단정히 앉은지 얼마였더냐. 도리를 캐고 깨닫는것은 알수 있어도 시간이 흘러 모습 흐트러짐은 전혀 없더라.》,《하나만 생각하면서 만사를 잊고 단정히 앉아 선기를 생각하는것은 최고의 방법이다》,《굴속의 신선은 어느해에 앉았던가? 깊이 빠져 앎은 흔적없이 마음에 오더라.》 김교각의《단정히 앉아 꿈쩍 않는》 수련방법은 후세사람들에 의해《철판주각(鐵板注脚)》이라 불리웠다. 이러한 선정방식과 마음을 가다듬는 의지는 정토종의 수련요구에 부합되는것이였다. 혜원 등이 못을 파고 련꽃을 심으면서《백련사》를 결성한 이후 그 계승자들은 특별히 련꽃을 숭배했는데 이로 하여 정토종을《련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갈절 등이 모금하여 화성사를 세울 때 김교각이 방생지를 파서 많은 련꽃을 키운것 역시 우연은 아니고 그 용의가 따로 있었던것이다. 그러므로 진암은 시에서 또 읊기를《떨기떨기 푸른 련이 련못에 만개하니 로승은 키우던 옛시절을 자랑하네. 화심에 티없으니 성정이 아늑하고 아늑함은 본디 정토에서 왔더라.》
6세기초 양무제가 정토종의 대표인물인 현란을 숭신하여 이름을 하사하기를《육신보살》이라 하였다. 당송이후 사람들은 김교각의 유체를 매장한 탑원을 가리켜《육신보전》이라 일컬었다. 명신종 주익균(朱翊鈞)도 만력 중기에 김지장탑에《호국육신보탑》이라는 칭호를 내리였다. 이러한것은 정토종의 교의와 수련방법 및 정토고승의 위신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보아진다.
김교각은 도를 터득한후 제자들로부터《지장보살》로 존봉받았다. 지장이란 본래 인도불교의 보살이름이다.《지장보살 십륜경》에서 해석하기를《참고 견디며 움직이지 않기를 대지와 같으며, 조용하고도 은밀히 사색하기를 비장과 같도다.(安忍不動如大地, 靜慮深密如秘藏)》고 하였으니 이로 하여 이름한것이다. 후세에 김교각을《지장보살》로 존봉한것은 그가 생전에 조용히 선정하기를《철판주각》과 같았으며 입적할 때《관속에 뉘여 삼년이 지나 다시 뚜껑을 열어보니 얼굴모습이 살아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으며 근골을 건드리니 쇠소리가 나》기때문이다.(이는 불경에서 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송의《고승전》과 명의《신승전》 및 그후의 많은 기록은 모두《부처가 멸도하여 천오백년이 지나 지장보살이 신라국 왕가에서 태여났어라.》라고 적었으며 이로 하여《이름을 사방에 떨치》고 그 추종자가 세세대대로 끊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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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각은 중국에 온후 백성들의 숭앙과 여러 방면의 큰 지지를 한몸에 얻으며 일대 불종으로 떠받들렸다. 이는 구화산의 불교권을 형성하는 일에 평생의 심혈을 기울인 그의 로고에 대한 마땅한 평가이며 중한 량국 교류사에서의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1200년래 김교각에 관한 전설은 수없이 많다.
당조의 오월과 삼한 그리고 일본의 무역은 몹시 빈번하였다. 명주(지금의 寧波)는 줄곧 중, 조, 일 삼국이 왕래하는 교통요도였으며 대량의 삼한상인과 외교사절이 이 항로를 따라 오갔다. 김교각 역시 이 길을 따라《바다 건너》 오월 구화산에 다달은것임이 틀림없다. 앞에서 서술하다싶이 김교각 생전에 이미 많은 신라승려들이 바다 건너 화성사에 귀의하였다. 구화산 쌍봉아래 쌍봉암이라고 불리는 절간이 있는데 그것은 김교각의 명성을 바라고 찾아온 신라승려 정장(淨藏) 등이 건설한것이다. 이 절에 그때 당시 많은 신라불교도들이 있었기에 신라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금의 구화산 북쪽산자락에 이성묘(二聖廟)라 불리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깃들어있다고 한다.《청양현지》 기록을 보면 김교각이 중국에 온지 9년째되던 해 소우(昭佑)와 소보(昭普) 두 신라대신이 어명을 받고 중국에 와서 그를 모셔가려 하였다. 김교각은 이를 사절하였고 둘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거실을 짓고 수련하였다.》 김교각을 존숭하여 구화산에 온 이러한 신라승려들은 도를 깨친 이후 계속 중국에 남아 부처를 배우고 행화에 힘쓰거나 귀국하여 포교에 전념하였으니 이는 량국의 문화교류에 상당한 역할을 일으킨 셈이다.
화성사가 건립된후 절의 승려들은 배로 늘었으며 전성기에는《수백명에 이르렀다.》 절의 의식문제를 해결하고저 김교각은 중승을 이끌어 도랑을 파고 논을 풀었으며 몸소 농사일을 하기도 하였다. 청의 심단(沈端)이 시로 읊기를《동굴어구에 기봉이 솟아 옥련을 토하고, 절간문에는 폭포가 감돌며 은구슬 뿜네. 선인이 봄날에 인간에 내려와 보습으로 논을 풀어 농사를 짓네.》라고 하였다. 논에는《황립도(黃粒稻)》라 불리는 벼를 심었고 논두렁에는《오채송(五釵松)》이라고 하는 소나무를 심었다. 이것들은 모두 김교각이 신라에서 옮겨온것이라고 문헌에서는 기록하고있다. 송의 진암은《구화시집․황립도》에서 황립도는《구화산에서 난다. 그 알은 굵고 맛은 향기로우며 보통벼하고는 다르다.》고 하였다. 청의《일통지(一統志)》에서 말하기를《오채송은 가지마다 다섯송이 꽃이 피고 다섯갈래가 나며 그 열매는 먹을수 있다. 무늬는 가로세로 짜놓은듯하며 중 김지장이 서역(해동 신라를 가리킴)에서 가져온것이다. 절앞에 있었는데 한그루가 죽으면 그 옆에 새로운 한그루가 돋아난다는것이 특이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과 조선반도사이 농업문화교류의 증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대중국은 동방에서 으뜸가는 농업발달국가였다. 멀리 대우시대부터 이미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장악하고있었다. 벼를 심고 수리관개시설을 중시하며 선진적인 농기구를 사용하는것 등이 그 보기이다. 삼한이 중국농업문화와 접촉한것은 그 유래가 깊다. 사료와 각종 고고학적발견에 따르면 기원전후에 삼한은 이미 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리조 사학가 림상덕(林象德)도《동사회강(東史會綱)》 권1에서《다루왕 6년 2월 백제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벼농사를 가르쳐주었다. 처음 남주군부터 시작하였다.》고 적고있다. 여기서《처음으로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었다(始敎民)》라 함은 바로 벼농사는 당시 아직 신흥산업이였다는 증명이 된다. 이로부터 삼한은 대량적으로 벼재배기술을 보급하였고 자국의 우월한 기후 및 지리 조건하에서 대량의 벼우량품종을 배육해냈다. 800여년이후 김교각은 바로 이러한 벼씨와 재배기술을 갖고 중국에 왔으며 구화산과 당지백성들과 함께 논을 풀어 농사를 지었다. 이 또한 중한 량국 농업문화교류에서의 좋은 사례가 아닐수 없다.
우리 나라 력대통치자들은 김교각이 건립한 국제적우의에 대해 줄곧 중시를 돌려왔다. 우선 력대의 황제들이 화성사에 많은 금품과 편액 그리고 친필성지를 내렸으며 명청시기에는 더욱 아끼며 돌보았다. 그중 명 만력 14년(1586년)과 만력 27년(1599년) 두번에만 해도 화성사에 대량의 장경을 하사하고 거금을 들여 절간을 다시 지어주었다. 그리고 1705년 강희황제는 강남을 순시할 때 내시를 특별히 파견하여 구화산에 진향했으며 친히《구화성경(九華聖境)》이라고 편액을 써서 화성사에 보냈다. 1766년 건륭황제도 친필로《분타보교(芬陀普敎)》 네 글자를 써주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구화산을 적극 도왔는바 강희황제만 해도 두 번이나 은을 하사하여 화성사 보수에 쓰도록 하였다.
우리 나라 력대 문인들도 모두 김교각의 공적에 관심을 돌리였다. 무릇 구화산을 유람한 문인치고 이 개산불조를 가공송덕하고 기리는《시와 제사를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의 일기(一夔)는 구화산을 돌아본후《바다 건너 고향땅을 떠나와 영화를 버리고 고행에 들었더라. 두 나무아래 초가를 짓고 뭇꽃속에 탑을 쌓았도다.》고 적었으며 송의 진암은 구화산을 두루 답사한후《구화시집》 한책을 지었는데 대부분은 김교각을 칭송하는 시편들이다. 그중 한수를 본다면《팔십사 계단우에 돌 하나 있으니 오백여년 지난 지장무덤이구나. 바람에 풍경소리 반나절 울리니 사람마다 꿈속에서 듣는듯하더라.》 명의 정원표(鄭元標)는《지장탑을 배알하고(謁地藏塔歌)》라는 시에서《신탑이 천고에 솟고 진신(眞身)이 불문을 누르네. 속세의 눈을 뜨니 이르기를 왕손이라 하더라. 도 닦던 루대는 비여있건만 마음은 의연히 남아있구나. 꽃을 들어 뜬금없이 물어보나니 피고지는 사연을 누구하고 얘기할고?》라고 읊었다. 청의 주윤이《화성사를 돌아보며》라는 시에서 읊기를《큰 꿈을 백년만에 깨니 귀향행차 어느덧 늦어지는가. 빈터에 두 나무그림자 엇갈리고 높은 점괘에 구화산이 놀랐네. 록원에는 이미 절이 없건만 계림에는 시가 남아있구나. 종래로 향불이 끊지 않아 도가 때를 만남이로다.》고 하였다.
김교각은 중국 불교계와 불교도들에게 아주 높은 위망을 가지고있다. 봉건사회의 백성들은 현실세계에서《안락정토》를 찾을수 없었다. 하지만 지장보살은 그들에게《성심》,《심심(深心)》,《발원심(發願心)》을 가르쳤으며 사람마다《왕생정토》할수 있음을 알려주었다.《고난을 해탈하면서 중생을 륙도》할 교의와 민간에서 널리 류전되고있는 그와 상관된 신화전설은 살아서는《안락》하고 죽어서는《왕생》하려는 그들의 희망과 맞아떨어진다. 이는 바로 김교각이 장시기동안 사람들한테 신망과 존대를 받은 사회적원인이다. 그러므로 김교각과 련관된 이야기는 날로 신비하고 널리 퍼져 그를 믿는 선남선녀들이 부지기수였고 구화산으로 가는 길을 메울 지경이였다. 이에 대해 청 광서년간의 사유개와 주윤은《구화산․불교․보살》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오늘날 이르러 례배 드리는자가 수천리 길을 잇고있다. 하루도 빠짐이 없으니 구화산의 분향은 천하에서 으뜸이로다.》《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근거하면 안휘 청양현은 당현종 천보 원년(742년) 추포(秋浦), 남릉(南陵), 경현(泾縣) 세 곳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선주부(宣州府) 관할구역에 속해있었다. 당대종 영태 원년(765년) 지주부에 소속시켰다. 지주 청양현 구화산은 김교각이 정과(正果)를 얻은 곳이기에 력대 정부에서는 되도록 삼한태생의 사람을 파견하여 관리로 삼았다. 청 강희 28년(1686년)《구화산지》를 새로 지었는데 당시의 지주군수 유성룡과 중헌대부 겸 지주지사였던 한교 리찬(李燦)이 주필을 맡았다. 편집성원 가운데는 청양현 한교 리정(李禎)도 있었다. 리찬은《중수구화산지서》가 따로 전해지고있다. 수정판에는《중수구화산화성사비기》를 수록하였는데 이 비문의 작자는 오국주(吳國柱)로서 자는 청원(淸遠)이요, 당시 청양현령을 지내고있었다. 오국주 역시 한교였다. 이는 단지 일부분으로서 만약 더 자세히 고찰한다면 새로운 발견이 있을수도 있다.
오늘날 불교명산 구화산은 세인이 주목하는 명승지로 되여있다. 무릇 구화산을 돌아보는 국내외 관광객들은 모두 김교각과 그가 남긴 자취들을 경모해마지않는다.
주지하다싶이 김교각이 평생 남긴 업적과 그가 키워놓은 중국과 조선반도 백성들사이의 우의는 아주 소중한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현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고승인 홍일대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큰뜻으로 두려움없이 돛배 타고 만리 바람 헤쳐왔으니 일세의 영웅이로다.》《신주땅을 돌보고 동국땅을 은혜롭게 했으니 별이 자리를 두르듯 사방에서 그 어짐을 좇았다.…령롱한 빛은 우러르게 되고 그 업적은 천추만대로 기리게 되리라.》
 
(번역: 리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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