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연변농악무》와 나의 아버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8월5일 03시20분    조회:490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하태일

《연변농악무》와 나의 아버지 하태일

50년대 흥겨운 농악무의 한장면, 앞줄 꽹과리를 손에 들고 앉은 자세로 춤추는 사람이 하태일선생 《연변농악무》는 그 화려하고 다채로운 예술형태로 공연에서 마지막 종목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관중들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력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있다.

우리 민족 전통이 깃들어있는 연변농악무는 예술의 꽃봉오리로 피여난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연변농악무》의 요람 연변문공단에서 한국 ,조선보다 일찍 원 마당놀이 농악무를 무대화, 예술화하였다는것은 특별한 의의가 있다.

연변가무단의 1954년도 민족예술유산과 창작정황학습에 관한 소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유구한 전통을 가지는 농악무를 1949년부터 1950년 하향할 때 찾아내였고 배우기 시작한것인데 당시에는 마땅한 중시를 일으키지 못하였기에 얻을바의 성적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농악무는 1951년도에 민간예인을 데려다 배우면서 비로소 참다운 학습이 시작되였다… 4달동안의 학습을 거쳐 … 농악무의 능수가 있다는 곳이면 다 찾아다니면서 배웠다. 연변 팔도구촌과 투도구의 민간농악대는 학습의 주요대상이였다. 우리가 출연한 농악무에는 민간예인 두명이 직접 참가하고있는데 그중 《하태일(河兑镒)》동무에게서 배운것이 많았다. 이 농악무로부터 조선족 무용에도 씩씩하고 아름답고 독특한 동작들이 존재하고있다는것을 실제에서 긍정하였다.
 
연변농악무의 창시자인 하태일선생
1951년, 당중앙의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라는 지시에 따라 주덕해동지의 직접 배려하에 문공단 김태희단장이 민간예인을 모집하였다.
하태일도 모집한 여러 민간예인들중의 한분이였다. 하태일은 1906년 2월 15일 한국 경상남도 남해 삼동면 동천리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학교 문앞에도 못 가본 하태일은 7살부터 마을에서 농악무를 배웠는데 그중 가장 환영을 받는 상모춤을 배워 뛰여나게 춤을 잘 추었고 장고, 꽹과리도 잘 쳤으며 상모 제작기술도 빈틈없이 배웠다.

한국 전통에 따라 매년 추석이나 구정이 돌아오면 농악대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공연을 다니였다. 1931년, 구정이 돌아오자 금방 결혼한 안해를 보고 《내 자랑하러 간다》 하고 나가서 정월대보름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벌써 《타고난 춤군》이라는 말이 그 지역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1936년, 형님을 따라 중국 연길시에 와서 자리잡고 수도공사에서 땅을 파고 상수도를 설치하는 일을 하였다.

초기 문공단의 초빙으로 하태일은 밤에 양마차로 문공단에 가서 무용배우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쳤다. 당시 문공단의 바레무용가인 조득현선생님도 하태일선생을 따라 농악무를 한보한보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태일은 자신의 전통적인 무용동작을 가르쳐주었을뿐만아니라 조득현선생에게 농악무의 일체 소재도 남김없이 전수하였다. 4개월간의 부단한 노력끝에 하태일선생의 농악무 무용동작과 소재를 기본바탕으로 한, 조득현선생이 정리 개편한 무대화, 예술화한 《연변농악무》가 창립되였다.

국가1급 작곡가 최삼명선생은 《연변농악무의 유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하태일선생님의 농악무 기본바탕으로 조득현선생님의 창조 재개편에 의해 연변에 농악무가 창립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예술단이 중국 연변 방문시 연변가무단의 우수한 농악무종목을 보고 연변에서 평양예술단의 농악무 공연 종목을 취소하였다.》

국가1급 무용안무가인 최옥주선생님께서는 《농악무의 모든 소재는 하태일선생님이 조득현선생님에게 전수한것으로 이 작품을 가무단의 무용배우였던 전한률씨가(하태일의 제자) 조선을 대표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련환절에서 공연하여 금상을 수여받았다. 하태일선생님은 농악무의 창시인으로 본인의 전통을 전수하였을뿐만아니라 직접 공연에 참가하고 주역을 담당하여 당시 중국문화부와 북경무대를 놀래웠다. 하태일선생님은 연변농악무의 창시인이고 문화재이며 걸출한 표연예술가다》고 하시였다.

1951년 8월 13일, 전 주 제1차 업여문예콩크르에서 하태일선생님은 민간예인의 신분으로 무대에 올라 담당주역을 담당하고 시범연출을 하여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 및 령도의 칭찬과 장려를 받았다.

당해 9월에 하태일선생님을 문공단 정식배우로 받아들였다. 1952년 10월 23일, 길림성문예회연콩크르에서 무극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를 표현하여 하태일선생님은 상모표현 1등상을 수여받았고 조득현선생님은 창작1등상을 수여받았다.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치주 창립 경축활동 당시 장춘영화촬영소 촬영조가 연길에 와서 농악무 촬영을 마치고 찍은 사진.  앞줄 왼쪽  5번째사람이 하태일선생.
 
1953년,료녕성 심양시에서 열린 동북3성 희극 음악 무용 콩크르에서 연변농악무를 공연하여 하태일선생님은 상모우수표현상을 받았고 조득현선생님은 창작우수작품상을 수여받았다.

1956년 전국 음악무용주 공연에서 연변농악무는 전국무대를 놀래우고 이듬해 쏘련에서 열리는 제6차 세계청년예술절에 참가하기로 결정되였으나 아쉽게도 경비 부족으로 43명 배우들의 출국꿈은 무산되고말았다.

1957년 국가문화부에서 주최한 전국무용대회에서 연변농악무로 하태일선생님은 주연(领舞) 우수상을 수여받았고 조득현선생님은 안무(编舞)우수상을 수여받았다. 당시 모택동동지 등 당과 국가 지도자의 접견을 받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하태일선생님은 예술화한 농악무를 무대에서 처음으로 표현하였으며 상모춤을 무대에서 처음으로 전수하였으며, 상모춤으로 처음으로 성급 이상의 표현상을 받았다.

1959년 7월 25일, 50세를 넘긴 하태일선생님은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사로 전근되였다. 하태일선생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하셨기에 억양이 달라 매번 학생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칠 때마다 《뺑 돌아서거라, 내가 배워줄거마.》라고 하시고 상모를 저을 때 목힘으로 돌리지 말고 전체 몸의 률동으로 돌리라고 강조하였다. 후에 학생들중에서 하태일선생님의 《뺑 돌아서거라》가 류행되였었다. 지금 일부 상모수들이 상모를 돌릴 때 경추 아픈 고생을 하는데 이는 상모돌림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1961년말, 자연재해가 지난후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방침에 따라 학교 교원을 축소하게 되여 하태일선생님은 부득이 퇴직하고 문화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 종종 학교에 나가 무용교학을 하시였다.

1975년 9월 4일(음력), 하태일선생은 중병으로 그 소중한 무용기교를 다 전수하지 못한 유감을 안고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문화혁명기간에 연변농악무는 《잡귀신》으로 몰려 한동안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문화혁명후기 연변가무단에서 다시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여 그 생기를 되찾게 되였다.

몆십년간 연변농악무는 가무단의 공연 고정종목으로 관중들의 절찬을 받아왔다.

하태일선생님은 연변가무단에서 농악무의 제2대 후계자로 량상호, 김덕현, 박종규, 전환률, 두학준, 최성국, 리종만, 마문호, 김동건, 리옥순, 최옥주, 김희옥, 박숙자 등을 양성하였고 예술학교에서 제3대 후계자로 최호수, 리영욱, 김송룡, 마문선, 한세호, 김영록, 전영문, 한동국 등 많은 후계자를 양성하였다.

한동국은 1965년 예술학교 가무반에 입학하여 하태일선생님의 영향으로 농악무에 큰 흥취를 가지고 상급학년의 학생(하태일선생님의 제자)김영록, 전영문으로부터 농악무를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후 고향 왕청에 돌아가 서위자에서 하태일선생님의 제자, 연변가무단의 하향간부 박종규선생님을 만나 농악무를 더한층 익힐수 있었다.

1979년부터 1989년 사이 왕청현문화관, 왕청현문공단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김명춘, 김만중 량호범, 한상일등 많은 상모수를 배양하였고 농악무 《명절의 밤》, 《환락》,《희열》,《가을의 밤》, 《위성이 하늘로 날아오르네》 등을 창작하여 여러차례 상을 수여받았다. 특히 1986년, 3인무 《환락》을 창작하여 전국민간음악 무용콩크르에서 2등상을 받았다.

한동국은 전통적인 농악무 무용동작을 기초로 하여 많은 연구를 거쳐 대상모와 소상모가 완벽하게 결합하는 무용장면, 상모의 《짓》에 전등불을 달고 돌리는 놀라운 표현형식, 소 중 대 상모를 한사람이 순식간에 돌리는 등 농악무에 많은 생기를 불어넣었다.

연변농악무는 많은 사람들의 고심한 노력으로 한세대 한세대 전수되여왔으며 오늘에 이르러 제4대로 김명춘이 전수받아 왕청에서 농악무의 보급과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있다.

2009년 9월 30일, 농악무중의 상모춤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급 《인류 무형문화유산》종목에 등록되였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도 유일하게 등록된 무용류 종목이다.

《연변농악무》는 연변인민의 자랑이며 우리 민족의 긍지로 연변예술 력사의 한페지를 차지할것이며 전 인류 문화재산으로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다.

하찬숙(필자는 연변농악무의 창시자인 하태일선생의 딸임)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곤명시정협위원, 곤명동방금홍부동산개발회사 이사장, 북경세박투자그룹 박철 회장            북경수도국제공항에서 공항고속도로를 따라 시구역방향으로 10여킬로메터 달려 5환로부근에 이르면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있는 번화한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온다. 역동하는 도시...
  • 2021-04-08
  • 김려화 교수, 조혈줄기세포 분화조절 분자 메커니즘 밝혀     얼마전 국제학술지 《eLife》에 게재된 동북림업대학 생명과학학원 유전학과 김려화(조선족.50) 교수의 조혈줄기세포 분화조절 관련 연구 결과가 세계적 관심을 끌고있다. 김교수가 이번 론문( “Rab5와Rab11, 여러 개의 신호전달경로 억제 통해...
  • 2021-04-06
  • 한 중국 류학생이 영국 런던에서 음악의 꿈을 좇아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 영화 《합법 동반자(合法伴侣)》가 지난 12일 전국적으로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19년 제22회 상해국제영화제 및 아시아 신인상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각본상에 노미네이트(提名)된 작품인 데다 인기스타 리치정(李治廷)과 백가(白客)가 주...
  • 2021-03-24
  • 최영덕 로인의 즐거운 예술생활 강가의 돌쪼각, 산기슭에 나딩굴고 있는 나무뿌리… 다른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지만 무순시 최영덕 로인의 손질을 거치게 되면 ‘보배’로 탈바꿈된다.   3월 14일, 필자는 지난 2000년 무순시조선족제1중에서 정년 퇴직한 최영덕(79세) 로...
  • 2021-03-18
  •         리민은 1924년 흑룡강성 라북현 오동하촌의 한 애국자 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친 리석원은 일제에게 빼앗긴 땅에서 살기싫어 20세기 20년대에 중국 동북에 망명해왔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겪으면서 민족독립과 항일의 뜻을 굳혔다. 그...
  • 2021-03-12
  •   항일전쟁시기 가장 처절하고 간고했던 동북전장에서 싸운 동북항일련군에는 녀전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고 경력이 가장 풍부하며 영향력이 가장 크고 기여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전우들사이 평판도 가장 좋은 사람은 녀전사 리재덕이라 할 수 있다. 리재덕((1917-2019) 리재덕은 1917년 1...
  • 2021-03-09
  •  구성지고 신명나는 우리 민족의 소리 - 판소리에 현대음악을 접목시켜 틱톡이라는 새로운 매개체를 통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가 있다. 바로 현재 연변가무단에서 판소리 전승자, 민요가수로 활약중인 최              구성지고 신명나는 우리 민족의 소리 - ...
  • 2021-03-08
  • 국제미술전시행사의 총괄 기획인 허문길 화백   ▲사진설명: 허문길 화백    2월 22일 주칭다오 한국총영사관 김경한 총영사는 조선족 출신 허문길 화백을 면담하면서 중한 양국간의 문화교류행사에 대해 진지한 자문을 구했다.      그렇다면 허문길 화백은 누구인가.    허문길...
  • 2021-02-26
  • 길림성 통화청산그룹유한회사 리청산 회장이라면 동북지역의 조선족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끌끌한 민족기업인으로 년매출이 수억원에 달하고 년간 납세액이 5천만원을 넘는 기업의 총수로 해마다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사심없이 사랑을 쏟아가고 있다.   △ 코로나19와 싸우는 1선 의무일군들에게 보내는 원...
  • 2021-02-24
  • 일전에 필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솔잎식품생산허가증’을 획득하고 ‘솔왕’으로 불리는 연변장백산솔잎연구유한회사 조경수(1956)를 찾아 솔에 대한 일가견을 들어보았다.   일찍 2006년 조경수는 연변일보 중문판에 ‘솔연구의 제1인자’라고 불리며 주목을 받은 적 있다. 솔관련...
  • 2021-02-20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