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광림이 만난 재미조선족 김만수 박영애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11월1일 08시58분    조회:499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광림

 
                           
20세기 80년대부터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이래 중국속의 조선족의 제일 뚜렸한 변화가 전통적인 거주지인 동북지역을 떠나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이동하는 현상이 보편화된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족의 가치관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고 현대의 조선족들은 보다 열린 환경에서 다원문화속에서 삶을 영위하는것이 숙명처럼 되여가고있다. 이런 환경의 대변화속에서 우리 조선족들은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돈을 많이 겪게 되고 지금까지 잘 유지돼왔던 민족공동체에도 위기가 생겼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조선족의 새로운 성공모델을 찾아서 거기서 희망을 찾아보는 경향이 비교적 짙다.
 
내가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조선족들은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옳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하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김광림 (일본 니가다산업대학 경제학부 교수)

 
과감히 도전하는 김만수박사
 
나는 2010년 8월부터 UC Berkeley를 떠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게 되였는데 그때문에 미국 동부의 보스턴에 거처를 잡아야 했다. 그러나 보스턴에는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어 어떻게 새로운 거처를 찾을가 고민하다가 내가미국생활체험을 련재하고있는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략칭:조글로)에서 미국생활에 관한 글을 쓰고있던 조선족 김만수박사를 찾게 되였다. 김만수박사는 그때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관련 포스터닥( 박사과정을 마친후의 연구원과정)을 하고있었는데 내가 메일을 보내니 대뜸 전화까지 걸어주면서 미국에서 같은 조선족을 알게 된 반가움을 표하며 내가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는 문제를 크게 도와주었다. 내가 보스턴에 옮겨갈 때도 역전까지 마중나왔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연구를 하는 조선족연구원들을 불러놓고 나를 위한 환영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이런 사적인 교분에서 내가 김만수박사에게 호감을 가지는것은 물론이지만 나는 김박사의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을 높게 평가하고싶다. 김박사는 연변출신으로 연변대학교 농학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일본에 류학하여 기후(岐阜)대학교에서 수의학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의 국립연구소에서 몇년간 연구원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서 포스터닥이라는 신분으로 4년간 동물의료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연구하는 기간에 김박사는 연구성과를 많이 내고 특허를 두개나 따게 되였으며 그런 성과를 인정받아 2011년 초봄에 약관 40세의 나이에 중국과학원동물연구소의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김박사는 처음부터 최고의 엘리트과정을 밟은것이 아니라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한단계씩 발전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그가 일본에서 미국에 옮겨가는 과정에서 영어공부를 하느라고 집안 구석구석에 영어메모장을 붙혀놓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4년간 연구하는 기간에 불철주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정도로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이 김박사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것 같다. 연변의 농촌마을 출신으로 부모의 후광을 크게 입은것도 아니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가면서 연변대학교에서 일본류학을 하고 다시 하버드대학교에 가게 되고 중국 최고의 과학연구기관에서 당당하게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자리를 잡게 된것이다. 이는 그의 끈질긴 노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나눔을 실천하는 박영애원장
 
나는 미국에서 2년간 체류하면서 미국생활을 여러 미디어에 련재하게 되였는데 그런 과정에 미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인너넷사이트인 《조선투데이》의 운영자인 박영애원장를 알게 되였다.
 
박원장은 중국 길림성의 중의학교인 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의 여러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연변대학교 의학원을 졸업, 북경의 중의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나서 1990년부터 미국으로 이민, 필라델피아에서 중의원을 개업하여 현재에 이르고있다.
 
박원장은 중의원을 경영하면서 미국에서 더 공부를 하여 중의학박사학위를 받게 되였다. 그녀의 이런 경력을 보면 상당한 학구열과 근면한 노력이 있었음을 쉽게 보아낼수 있다. 특히 한명의 녀성으로서 두 자식을 미국에서 공부시키고 자신은 병원경영으로 성공했다는 자체가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박원장을 높이 평가하고싶은것은 그의 사업에서의 성공보다 그가 사업에서 성공하고 나서 나눔의 정신을 솔선하여 실천하고있다는 점이다.  
 
박원장은 미국에서 딸애가 대학교를 다니던 과정에 방학이면 민간인들이 기부한 장학금으로 연수를 많이 다니는것을 보고 자신도 그런 좋은 사업을 하고싶은 충동을 느겼다고 한다. 생각해보다가 자신이 미국에서 병원경영하는 과정에 재미한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따져보면 결국 자신이 중국에서 조선족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어와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은 덕분이 아닌가 생각되여 길림성 교화시 외곽에 있는 조선족소학교(모교)에 기부하기로 작심, 우수학생과 우수교사를 지원하고 교수용품들을 사도록 하였다. 몇년간 모교에 기부해오다가 그 모교가 학생래원이 줄어들어 페교가 되자 연변적십자회와 상의하고 도문시 농촌의 조선족소학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연변제1중학교에도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연변대학교에 장학금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연변대학교에서 조선족민족박물관을 짓게 되자 거기에도 자금지원을 했다. 박원장은 지금까지 길림성의 조선족학교와 연변대학교에 인민페로 수십만원 기부한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중의원을 경영한다고 하지만 수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자금이 남아도는 상황도 아닌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조선족의 민족교육에 대한 장학사업에 대단한 열성과 자긍심을 가지고 그 사업에 많은 시간과 재력을 들이고있다.
 
박원장은 필라델피아에서 20여년간 살아오면서 이 지역을 찾아오는 조선족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재미연변대학교학우회 후원사업도 해온것으로 알고있다. 수년전에 다른 사람이 꾸리던 재미조선족의 최대인터넷사이트인  ≪조선투데이≫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박원장이 운영사업을 맡게 되였는데 그녀는 병원경영을 하면서 이 인터넷사이트의 유지에도 애를 쓰고있다.
 
중국에서도 해외에서도 사업에서 성공한 조선족은 적지 않다. 그러나 박영애원장처럼 민족의 교육사업후원에 발벗고 나서고 조선족공동체의 공익사업에 열성을 붓는 사업가들이 너무 많은것은 결코 아닐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박영애원장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싶다.


조글로미디어

원문보기

아리랑주간 신문 지면보기

파일 [ 3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경쟁은 한국인끼리 했나요. “아닙니다. 그 사업은 주로 이탈리아 계 이민자들이 했습니다. 다만 이탈리아 출신 사장 밑에 한국인 영업사원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무척 고전했지요. 나중...
  • 2005-11-23
  • 연해주 고려인 중 최고 갑부 텐 알렉산드르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에서 건설업과 유통업 등 10여 개 기업을 운영해 고려인 중 최고 갑부로 이름난 텐 알렉산드르 하리또노비치(한국명 정일) 연해주 고려인 재생기금 회장. ⑥연해주 고려인 중 최고 갑부 텐 알렉산드르 (우수리스크=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텐 알렉산드르 하...
  • 2005-11-23
  • [원제: 힘들지만 보람있는 삶 엮는다] 1급지체장애인 리광수 고선옥부부 자식 위해 리광수(46살), 고선옥(38살) 부부는 1급지체장애인이라는 아픔속에서 남편은 안해의 눈이 되여 주고 안해는 남편의 다리가 되여주면서 자식을 밝게 키워 미담을 엮고있다. 멀리 흑룡강에서 혈혈단신으로 연변에 시집온 리의경학생(화룡시 3...
  • 2005-11-23
  • 미국의 국제교육연구소가 미국내 전 대학의 외국인학생과 미국출신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있는 학생들 현황을 종합해 일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 류학중인 조선국적의 학생은 2004~2005학기에 총 219명을 기록, 2003~2004학기(174명)보다 25.6%가 증가됐다. 2001~2002학기에는 113명이였다. 조선국적의 미국류학...
  • 2005-11-22
  • 《인젠 손뗄수 없어요》 장백현에 거주하고있는 올해 57세나는 한족 퇴직로동자 장집림은 지난해부터 조선어를 자습하기 시작, 신문을 읽을수 있고 간단한 조선어를 한어로 번역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장집림은 퇴직한후 마작놀이나 트럼프놀이보다는 뭔가 의의있는 일을 찾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끝에 그는 장백...
  • 2005-11-22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북한 ‘삼흥코스트 그룹’의 노동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천용수 회장. 그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1992년, 북한에서 만난 일본의 유력 일간지 기자와 대북사업에 관해 인터뷰했다가 ...
  • 2005-11-22
  • 우수리스크시 최연소 의원 발레리 강 지난해 26세의 나이로 우수리스크시 시의원에 당선된 발레리 강. 1978년생인  그는 고려인 중 최연소 시의원이고 25명의 시의원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다. 시의원으로 당선되기 전 미하일로프군 군수에 출마했다 낙선했던 강 의원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정치를 한...
  • 2005-11-22
  • 프랑스 유학을 떠나다 1929년 여름 한낙연은 몇 년 만에 상하이에 도착한다. 하지만 상하이는 예전의 활력에 넘치는 도시가 아니었다. 상하이에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미 지하로 숨어들어 은밀하게 활동하던 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그로서는 더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만나기로...
  • 2005-11-22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1980년대 초, 제약회사 세일즈맨으로 승승장구하던 청년이 맨손으로 호주에 왔다. 챙겨주는 이 없는 남의 나라에서 23년 만에 12개 알짜 기업을 일궜다. 한순간도 조국을 잊지 못한 사내는...
  • 2005-11-21
  • 리완빈부자 도보로 홍군의 장정코스를 다녀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 제5차반포위토벌전역에서 실패한 중국로농홍군은 1934년 10월부터 1936년 10월까지 남방근거지로부터 섬북근거지에로의 전략적 전이를 하게 된다. 당시 세상을 놀래웠던 이 장거가 바로 그 유명한 2만 5천리 장정이다. 새 중국이 창건된후 특히 개혁개방...
  • 2005-11-2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