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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집념으로 고체물리학연구에 평생을 바쳐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2월28일 14시04분    조회: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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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광성


저명한 조선족물리학자 김광성교수의 외길 인생

자석은 왜 서로 붙을가, 지남침은 왜 항상 남쪽을 가리키지? 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봤을 법한 의문들…살아가면서 그 수많은 의문들은 삶에 부대끼며 지나온 길에 하나 둘씩 잃어버린다. 하지만 한 소년은 달랐다. 헐벗고 굶주리던 그 시절에도 그의 호주머니속엔 항상 령롱한 의문들로 가득했고 그것들과 동반해 소년은 물리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무궁무진한 미지의 세계를 품고있는 물리학, 원 연변대학 물리학과 김광성교수(76)는 어쩌다가 이 신비롭고 오묘한 물질세계에 대한 연구속으로 빠져 평생동안 끈질긴 탐구로써 자신만의 고체물리학리론을 정리해냈다.

해살좋은 날, 약속시간에 어김없이 연변대학앞에 나타난 김광성교수, 한올 흐트러짐도 없는 짧은 백발과 갱핏한 몸매에 온화함이 물씬 풍겨나왔다. 그가 인터뷰요청을 어렵사리 승낙했던것은 단지 자신이 물리학연구를 오래전에 놓았다는 리유에서였다.

지독한 가난속에서 싹튼 꿈
1936년, 료녕성 본계시 환인현에서 김광성교수는 일곱형제중 한명으로 태여났다. 많은 식솔에 끼니를 이어대기 어려웠고 설상가상으로 팔로군에 참가했던 두 누나때문에 일가족은 국민당의 수색을 피해 이곳저곳 피난을 다녀야 했다. 국민당이 집을 포위하고 누나들의 행방을 대라고 윽박지르는바람에 벌벌 떨기만 하다가 다행히 마을에 명망있는 어르신이 보증해줘 겨우 풀려난적도 있었다.

그런 란세판이다보니 공부라곤 일본이 투항할 시점 일본소학교 4학년을 다니다 그만둔것이 전부, 극심한 식량난과 도피생활속에 공부는 그저 사치일뿐이였다.

해방이 되고나서야 못 다한 공부에 대한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고 마침 현성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있던 관전현조선족중학교가 현성으로 옮겨오면서 1학년 학생들을 모집하게 되였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고 생각한 김교수는 마음을 다잡고 시험장에 들어섰다. 자신이 알고있는 답안을 모두 써넣고 자신만만히 시험장을 나왔지만 결국 응시생이 너무 적어 반을 편성하지 못한다는 통보였다. 마음속으로부터 올리솟는 울분을 토할길이 없어 헤매고있을 때 다행스럽게 1, 2등 두명만 뽑아 편입생으로 받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두말할것도 없이 그번 시험의 1등은 단연 김광성교수였다.

그렇게 시작된 배움의 길, 학교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학교와 20리 상거한 집에서 매일 통학하려니 매일 동이 트기전에 집문을 나서야 했기에 그는 아침을 먹을 시간도 없었고 점심도시락을 싼다는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아침도 못 먹고 오전수업 내내 배고픔을 참으며 강의를 듣다가 점심이 되면 남의 눈길이 의식돼 아무도 없는 구석을 찾아 조용히 배고픔을 삭혔다. 수업내용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일본소학교를 다니다나니 조선어를 잘 모르는데다 그사이 남들보다 뒤처진 진도가 어림잡아 2~3년은 됐기때문이다.그 와중에 청천벽력같이 유난히 믿고 따르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게 되고 가세는 더더욱 몰락했다. 그는 짬만 나면 이붓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어린 나이임에도 집에 책임을 다하려 했다. 그런데 한번은 이붓어머니로부터 논두렁에서 핀잔을 듣게 되고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그는 이미 장가를 간 형님네 집으로 달아나버렸다…

어린 나이에 그 많은 일을 겪고 방황할법도 하련만 김교수는 꿋꿋했다. 어렵게 잡은 공부의 기회가 소중한것도 잘 알고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결심하면 해내는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자신에게 추호의 머뭇거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공부 또 공부였다.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차츰 상위권학생들과의 거리를 좁혀가더니 미구에 1등의 자리를 차지했다. 김교수는 그때 무엇보다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물리공부에 각별한 흥취를 나타냈고 평생 물리연구를 하련다는 꿈을 가슴속에 싹틔웠다고 고백했다.

성적이 줄곧 1위를 차지했던 김교수는 1952년 중학교졸업시 수석에게만 주는 혜택, 통화시고중으로 추천받는 자격을 가졌다. 지독한 가난속에서 그는 국가에서 내려오는 조학금 5원으로 근근득식 끼니를 에울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였다. 그렇게 그는 고중시절도 내내 최우등으로 성적표를 장식했다.

곡절속에서 다시 희망의 끈을 잡고
그런 김교수가 얼마든지 국내 최고의 대학으로 갈수 있었지만 "색맹"이라는 "벽"앞에서 어쩔수 없이 일류대학을 포기하고 연변대학을 선택했다.

그렇게 1955년부터 시작된 연변대학생활, 당연한듯이 또 기다렸다는듯이 김교수는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오랜 시간 동안 싹틔워왔던 꿈이 드디여 결실을 맺었다. 분투와 랑만 그리고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찬 그 대학시절을 김광성교수는 마치 물리학을 위해 태여난 사람처럼 자세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물리학전공에 몰두했다. 길림대학 물리학과에 있는 동창한테 어렵게 학습필기까지 부탁해가면서 자신의 지식면을 넓히려 애썼다. 김광성교수는 대학시절의 방학이 그렇게도 좋았다고 한다. 다름이 아니라 방학을 리용해 수학과 화학 면의 지식을 습득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4년 내내 모든 학과목에서 만점의 성적을 자랑한 김광성교수는 원래 연변대학에 배치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1957년 반우파투쟁에서 억울한 사람을 두둔해나섰다가 1959년 졸업시 중학교로 배치받게 됐다.

당시 이 사실을 알게 된 림민호교장은 친히 사실을 자세히 료해하고 시정해나섰다. “이 학생은 4년 내내 만점을 맞은 근면하고 성실한 인재이다. 꼭 연변대학에 남겨야 한다.” 우여곡절끝에 김광성교수는 연변대학에 배치받아 물리학연구를 계속할수 있게 됐다.

“연변대학은 나의 학술연구의 요람이였어요. 본격적인 학술연구는 그때로부터 시작됐다고 봐야지요.”

당시는 “이름을 날리고 전문가가 되는” 성명성가사상이 농후한 때였다. 김광성교수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다고 털어놨다. 동력이야 어디서 근원했던 김광성교수는 연변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 세계 각국의 학술잡지들을 년대별로 차근차근 훑으면서 학습의 무아지경속에 빠져들어갔다. 공부밖에 모르는 그가 어찌나 걱정됐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건강에 주의하게” 하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얼마후 연변대학에서는 김광성교수에게 길림대학 연수기회를 마련해줬다. 김교수는 당시 길림대학에서 반도체물리학을 연구한 고정산교수의 제자가 되여 고체물리학, 반도체물리 등에 대해 깊이있게 연구, 학술면에서 큰 진보를 가져왔다. 김교수는 연수기간의 1초가 너무 아까와 밥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단 1초도 다른데 할애한적 없었다고 얘기했다. 연수기간 그는 길림대학의 물리, 수학, 화학 등 전공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석사연구생 수업을 방청했다.

하루종일 아무 말도 없이 책만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은 기숙사의 변함없는 풍경선이였다. 한창 연찬의 길에서 자신의 꿈을 영글리며 남부러울것이 없던 김교수, 세상은 또 한번 그를 울렸다. 1964년, 그는 모택동의 호소를 받들어 농촌으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내려가게 되였다.

김교수는 그때 자신의 교과서와 책들을 몽땅 던져버렸다. 마음을 비우고 농촌에서 수굿이 일만 했다. 시간은 흘러 문화대혁명도 끝나고 왕청의 어느 두메산골 생산대에서의 2년 세월도 흘러갔다. 1972년 중학교 교원으로 교편대를 잡아서 6년 세월이 흐를 때까지 모든것을 다 털어버리고 열심히 일했다. 그것이 응당한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을 키워준 사회에 대한 보답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그러다 1978년 연변대학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마냥 머리속을 스쳐지나며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수 없었던것이다. 십여년의 세월이 쓸고지나간 자리는 그토록 처량했다.당시 물리학에 관해서는 머리속이 텅텅 비여 백지상태였다고 김교수는 회억했다. 하지만 그즈음에 김교수는 농촌생활의 단련을 받아 몸도 마음도 훨씬 강해져있었다. 그래, 해보자,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자!

김교수는 머리를 질끈 동이고 팔을 걷어붙였다. 밤을 패고 끼니를 거르면서 따로 휴일도 없이 기초지식부터 알차게 다져나갔다.

학생들의 강의를 준비하고 교과서를 편찬했으며 석사연구생 지도를 겸하면서 눈코뜰새없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짜내 도서관을 찾았다. 당시 세계 고체물리학리론이 어느 수준까지 발전했는지 동태를 살피고 연구과제를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봐야 할 지난 10여년간의 학술잡지들을 책상우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뒤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했다.

김교수는 십여년간의 농촌생활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고 한다. 비록 몸이 고달프긴 했지만 밥맛도 돌고 잠도 잘 왔으며 무엇보다도 성명성가사상이 저도모르게 사라졌던것이다. 그 시절은 그야말로 김교수의 몸과 마음을 건강히 가꿔준 정화의 시절이였다.

학문의 바다서 자유로이
김광성교수는 대량의 학술잡지를 탐독하고 물리학계의 발전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생긴후 자신의 연구방향을 확정지었다.

김교수의 연구분야는 주요하게 고체의 성질에 대해 연구하는 고체물리학 리론연구이다. 김교수는 응집형태물리학이라고도 하는 이 학문의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가운데서 김교수는 초전도체라는 물질에 대해 연구하고 “전자지간 교환상호작용이 초전도체전변온도에 주는 영향”과 관련된 론문을 련 4편 발표했다. 초전도체는 온도를 부단히 낮춰 림계온도에 도달시키면 전기저항이 없어진다. 원자내에서 두개의 전자궤도가 겹칠 때 생기는 스핀(spin)과 관계된 상호작용을 교환상호작용이라 하는바 이는 자성체의 강자성 반강자성 등 성질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김교수는 초전도체의 온도변화에 주는 영향을 설득력있게 규명했는바 김교수의 론문 4편이 모두 국가핵심류정기간행물인 《중국저온물리학보》에 실렸다.

김광성교수의 주요한 연구성과로는 전자 포논(phonon)상호작용에 관련된 리론연구를 손꼽을수 있다.김교수는 이것이 전자지간 교환작용, 전자지간 상관작용, RKKY 상호작용, 희토금속중 4F-S전자지간 교환상호작용에 주는 영향을 심도있게 파고들어 선후로 “전자지간 교환작용이 전자 포논상호작용에 대한 영향”, “전자지간 상관작용이 전자 포논상호작용에 대한 영향”, “RKKY 상호작용이 전자 포논상호작용에 대한 영향”, “희토금속중 4F-S전자지간 교환상호작용이 전자 포논상호작용에 주는 영향” 등 영향력있는 론문을 발표했다.

특히 “RKKY 상호작용”과 “희토금속중 4F-S전자지간 교환상호작용”의 영향에 관해서는 아직 학술계에서 제기되지 않은 새로운 분야로서 김교수가 규명하고 설득력있는 리론을 내놓아 고체물리학계 새로운 한발자국을 다그쳤다.

그밖에도 김교수는 전자지간 교환작용이 금속전기전도에 대한 영향과 RKKY 상호작용이 금속전기전도에 대한 영향, spin파가 금속열학성질에 대한 영향, 포논이 금속자성에 주는 영향여부 등에 관해 연구하고 규명했다.

김교수가 고체물리학리론연구를 펼치면서 쓴 론문은 도합 60여편으로 그중 7편이 미국 《CA》잡지(전세계에서 제일 전면적이고 광범하게 화학화공 및 관련 학과문헌을 수록하는 최고등급의 학술잡지)에 발표됐다.

뿐만아니라 미국 열전자물리연구소, 로씨야물리연구소, 로므니아핵물리연구소 등으로부터 련속부절히 원고채용고지서가 날아들었다. 김광성교수는 고체물리학리론면에서의 학술연구성과를 인정받아 1993년부터 나라로부터 국무원특수보조금을 향수하고있다.

“물리학은 참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물질들이 나타내는 현상, 성질로부터 그 구조원리를 밝혀내 리론화하는 일은 너무나 매력적인 연구입니다.” 매일 복잡한 공식과 씨름질해야 하는 물리학리론연구는 끈질긴 인내를 요하는 학문으로 따분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바로 김광성교수와 같은 물리학리론연구가들이 자연계 천변만화하는 각종 현상의 본질을 파헤쳐주기때문에 인류가 이 세상을 알아가고 또 이 세상을 개변시킬수 있는 힘을 가질수 있는것이다.

한 우물만 파는 무서운 집념과 한결같은 태도, 물리학리론연구가 한치의 오차도 용서하지 않듯이 자신에게 한순간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꽉 찬 삶, 그리고 이것이 아니면 살수 없는 신앙심에 가까운 추구, 그것이 그로 하여금 조선족의 자랑스런 물리학자로 우뚝 서게 한듯싶다. 김광성교수의 평온한 웃음속에 비치는 행복한 만년생활은 그의 지칠줄모르고 달려온 삶에 대한 세상의 은총인듯싶다.

연변일보 장연하 리련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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