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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단에 화제를 불러온 특별한 시인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3월13일 14시36분    조회:4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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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남영전


당대 걸출한 민족시인시가상 수상자


《장백산》잡지사 남영전 전임 사장을 만나
남영전. 1948년 3월 3일(음력) 출생, 고중을 졸업한 뒤 농촌에 하향도 했고 로동자로도, 선전부문 간부로도 있었으며 《장백산》잡지 주필로 있다가 2010년 3월 퇴임했다.
그의 학력을 보면 길림성작가진수학원 졸업이 최종 학력이다. 미국세계문화예술원 명예문학박사,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부회장,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부회장, 미국세계시인대회, 영국국제전기협회 종신회원, 중국관리과학연구원 특약연구원,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연구원, 길림대학 문학원, 동북사범대학 상학원, 연변대학 사범학원 겸직교수, 제9기 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평심위원 등 사회직책을 갖고있지만 남영전시인은 이보다 쟁론을 내온것으로 더 유명해졌다. 길림성작가협회 부주석인 장미민 문학평론가는 남영전시인을 두고 “남영전은 아주 특별한 시인”이라고 평가한다.

유복자로 태여난 불운의 사내
길림성 휘남에서 태여난 남영전시인은 유복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1945년에 참군해 1947년 사평전역에서 희생된 동생의 뒤를 이어 참군했다가 잇달아 희생되였다. 아버지가 희생될 때는 남영전씨가 어머니 배속에서 다섯달 되였을 때라고 한다. 그에 앞서 그의 조부와 두 고모가 일본군의 세균전에 의해 3일내에 련이어 돌아갔다. 심각한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어머니도 잇달아 세상을 뜨다보니 그는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남들이 심심찮게 부르는 “아버지, 어머니”는 그에게 있어서 한낱 아픔이였고 그리움이였으며 그러한 아픔과 그리움은 그의 굴강한 성격을 키워냈다.

남영전씨의 할머니는 항상 “할머니는 너 하나만을 믿고 살고있다”며 “너는 아버지가 없이 자랐기 때문에 커서 잘못하면 호로자식이고 너는 다른 사람보다 공부도 잘해야 한다”며 항상 가르쳐왔다. 남영전시인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그의 전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분으로 각인되고있다.

“할머니는 평범하면서도 또 평범하지 않은분이였습니다. 남편과 아들딸을 다 잃은 할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할머니는 몇번이고 인생을 마감하려 하다가도 손자때문에 단념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는 실로 일구난설입니다.”

“할머니는 비록 지식은 없어도 옛말을 굉장히 구수하게 잘했습니다. 아마도 할머니의 이야기가 저의 문학세포를 키워준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부모와 같고 인생의 스승과 같고 문학세포를 심어준 계몽스승과도 같습니다.”

당시 휘남에서 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한 남영전씨는 현지의 한족고중을 선택했다. 리유는 단지 할머니를 위해서였다. 당시 통화에 있는 조선족고중은 기차로 두세시간 거리였다고 한다. 할머니를 혼자 두고 통학할 생각은 없어 결국 한족고중을 선택했다. 그러다보니 시험도 한어로 보아야 했다. 언어문자관을 넘기 위해 그는 이미 졸업한 사람의 책을 빌어 자습에 나섰다. 결국 중상등수준으로 한족고중에 입학할수 있었다. 한족학생들이 3년간 이미 배운 외국어 로어도 령부터 시작해 무난히 소화해냈다. 그의 어문작문은 범례로 선정되여 복도에 붙여졌다.

하지만 남영전씨는 수학에 더 애착이 있었다고 한다. 고중 2학년 때 3학년 수학을 끝냈을 정도였고 심지어 길림성교육청에 교재편찬과 관련된 의견을 제기해 주목받기도 했다. 고중에서 입당까지 하고 대학을 꿈꾸던 그였지만 그 시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대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진것이였다. 결국 1968년 그는 농촌으로 하향하게 되였는데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멀리 갈수 없어 현소재지교외의 농촌을 선택했다. 그러던중 농촌에서 대학에 갈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할머니를 돌볼 사람을 찾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지만 오히려 결혼자라고 입학이 거부되였다. 할수 없이 농촌에서 일년 넘게 있다가 자동차부품공장의 로동자로 뽑혔으며 인차 직장주임으로 승급하고 공장의 모든 자료작성을 맡기도 했다.

“당시는 길림성에서 문예창작을 회복하는 시기였습니다. 통화지구에서 있은 한차례 문예창작회의에 참가한 상황을 공장장한테 회보하였는데 간단한 문장작성이 아닌 창작이였던지라 공장장은 저보고 일을 탈리하고 문학창작에 종사하도록 ‘특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남영전씨는 시, 소설, 보고문학, 극본, 가사 등 쟝르에 관계없이 창작에 달라붙었는데 가장 먼저 발표한 작품이 시였다. 《길림문예》에 중문으로 시를 발표했다. 또 당시 시대적인 특성에 맞게 영화를 본 뒤 영화평론을 《길림일보》에 발표하기도 하다가 결국 시쪽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시인으로서의 창작의 변화 그리고 “남영전현상”
남영전시인은 자신의 시창작단계를 1971년부터 1978년까지 한단계, 1978년부터 1985년까지 한단계, 1985년 이후를 한단계 등 3개 단계로 나누고있다.

“1971년부터 1978년까지는 정치색채가 짙고 문학의 본원에 들어서지 못했으며 구호식이였습니다.” 이는 남영전시인뿐만아니라 당시 시대를 거친 문학인들의 공동한 느낌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뒤 1978년 개혁개방을 통해 창작의 원활함이 가미해지면서 남영전시인은 인성화된 작품을 만들고 문학에로 복귀하고 현실주의 색채가 짙은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그의 첫 목표는 자기를 길러주고 인생을 가르쳐준 할머니를 작품으로 표현하는것이였다. 그러한 할머니를 작품으로 잘 표현하지 못한다면 평생 시를 쓰지 말라고 스스로도 항상 충고해왔다. 하여 남영전시인은 1984년에 “할머니”란 수필을 써 국내 유일한 국가급 소수민족문학지인 《민족문학》에 발표했는데 반향이 좋았다. 그후 그 수필을 서정시로 고쳐서 발표했는데 제2기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 1등상까지 탔다. 남영전시인은 시 “할머니”는 물론 “휘우듬한 그림자”로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을 받았고 “아버지”로 길림성정부 최고문학상인 제1회 “장백산문예상”을 받았다.

남영전시인의 시창작 단계에서 가장 파급적이고 영향력을 끼친 단계는 1985년 이후로 이어진 세번째 단계다. “토템(图腾)”과 시를 접목시킨 이 단계는 어찌보면 “남영전”이라는 인물이 더더욱 널리 알려진 단계이자 “남영전현상”을 일으킨 단계로 평가되면서 시단은 물론 평론계의 주목도 받고있다.

토템(TOTEM)은 “원시사회 또는 현대의 일부 지역에서 자신들의 부족 또는 씨족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것으로 믿어 신성하게 여기는 동식물이나 자연물”로 해석되고있다. 말하자면 원시군체의 친속, 선조, 보호신의 표지이고 상징으로서 인류력사상 가장 일찍한 일종 문화현상이라는것이다. “토템”이라는 말은 인디안어 “totem”에서 기원했으며 “그의 친속”, “그의 표기”"라는 뜻이다. 원시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 씨족은 모종 특정한 종(物种)에서 기원했다고 인정하였으며 이를 신앙해왔다. 따라서 대다수 정황에서 모종 동물과 친연관계가 있다고 여겼으며 따라서 토템신앙을 선조숭배와 련결시켰다.

이러한 토템문화를 계기로 남영전시인은 새로운 문학현상으로 불리우는 토템시를 만들어냈다. 남영전시인은 한 민족에게 토템이 하나인것이 아니라 여러 개이며 모든 성씨는 토템과 관계가 있고 성씨마다 자기의 고유한 토템을 갖고있다고 주장한다. 또 그런 토템은 자기 시조의 탄생신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 광주에 중화토템박물관과 중화성명박물관이 섰습니다. 토템박물관에는 화하토템기원, 성씨토템, 가족토템, 띠토템과 상품토템 천여건이 진렬되여있습니다. 백개 토템에 백개 성씨를 전시한 한족은 적어도 백개 이상의 토템을 갖고있을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여러 씨족, 부족들로 이루어졌으므로 결코 토템이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토템사상은 인차 사회적인 찬반론에 휩싸이게 된다. 특히 그의 토템시는 국내외적인 쟁론을 불러왔다. 1987년 그가 첫 작품을 발표한후 시인, 평론가들의 흥취를 불러일으켰으며 지금까지 200여편의 평가문장이 신문잡지에 실리고 출판인, 학자들의 전문집, 론문집, 시서화집, 전각 등이 16권 나오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다. 1995년 이래 도합 국내외적으로 도합 9차의 “남영전토템시심포지엄”이 열렸는데 그중 2003년 6월 중남민족대학은 다섯개 대학 전문가들과 공동으로 남영전시인도 모르는 남영전토템시와 관련된 세미나를 열었으며 론문집을 내기도 했다. 더욱 재미있는것은 2009년 절강 호주사범학원에서는 남영전토템시연구를 공공선택과로 내왔는데 100명 명액이 찼다고 한다.

심지어 2005년 《작가》잡지는 42수의 남영전토템시를 24페지에 달하는 편폭으로 실은데 이어 2011년 10월호에 남영전시인의 토템시, 토템시를 쓰게 된 원인, 길림성 문련, 작가협회, 사회과학원 등 권위인사들이 남영전의 토템시에 대한 발언요지 등을 총 18페지에 게재했다. 1986년이래 그는 52수의 토템시를 창작했는데 1년에 평균 두수 정도다. 그는 학자가 되려고 토템시를 쓴것이 아니며 토템시가 말하려는 핵심은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사는것으로 이는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데서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토템은 일종 문화이고 토템시 역시 일종의 문화이며 인류의 공유문화이며 현실적으로 필요한것이라고 주장한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를 긍정해주고 높이 평가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토템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지난 2006년 3월 중국 시단의 학술평론 연구중심으로 불리우는 수도사범대학에서 중국시가연구쎈터와 시대문예출판사가 공동주최한 “남영전시가 창작세미나”가 열렸는데 중국시단의 가장 권위평론가로 불리우는 사면선생은 “남영전의 시가창작은 생명력과 활력으로 충만되여있다”며 “남영전의 시작품은 도템문화의 각도에서 민족문화를 새롭게 천술하였을뿐만아니라 항구성 제재를 처리할 때 현실제재와 동시에 전개하여 시인이 현실생존 처경에 대한 관심을 토템 계렬시속에 유기적으로 융합시키면서 지식분자가 민족문화에 대한 경외감과 량지감을 구현하였다”고 평가했고 당시 시대문예출판사 장홍파부총편집은 “도템시는 현재 국내외에 아주 큰 반향을 일으키고있다. 따라서 남영전의 시가연구는 조선족을 비롯한 중국소수민족의 시가창작에 중대한 의의가 있을뿐만아니라 중화민족의 당대 시가창작의 번영에 심원한 영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반대로 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의 토템시는 진정한 토템시가 아니며 영물시라고도 말한다.

어찌하든 길림성작가협회 부주석이며 문예평론가인 장미민씨의 말을 빈다면 “한 시인의 시작이 이렇듯 오랜기간 그리고 광범위한 토론의 붐을 일으킨것은 중국시단의 남영전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남영전시인 스스로도 토템시를 두고 국내외적으로 논란이 많다고 승인한다. “다 좋다고 하여 무조건 훌륭한것은 아니지만 모두 다 나쁘다고 하면 결국은 실패와 같다. 좋다와 나쁘다, 옳다와 아니다의 공존으로 하여 존재의 가치가 있는것이다.”

민족의 문학도들을 위한 노력
남영전씨는 《장백산》잡지의 발간인이자 30년간 《장백산》잡지를 위해 로심초사해왔다. 1979년은 길림성 각 지구에서 문학예술계련합회(문련)가 설립되고 문학기구들이 회복되고 작가들이 복귀하는 시기였다. 당시 통화지역의 조선족교원들은 통화시에서 문련기구를 설립할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특히 1980년대 통화지구에 조선족이 12만명이 넘었지만 조선문 잡지가 없었으며 길림성 산재지역에는 길림시의 《도라지》문학지가 유일했다.

남영전씨는 류하현 선전부에서 사업하는 조건을 빌어 현장한테 보고하여 경비 700원을 발급받고 그 경비로 한차례 문학창작대회를 마련했는데 회의에서는 비록 우리 말로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았지만 발표할곳이 없는 문제가 제기되였다. 문학을 사랑하는 통화지구의 지성인들은 수많은 토론을 한 뒤에 상급에 조선문잡지를 내올것을 신청했다. 이에 통화지구문련에서는 선전부에서 사업하고있는 남영전씨한테 잡지를 꾸릴 중임을 맡겼다. 문학창작대회를 통해 통화지역 조선족작가들의 고충을 잘 알고있는 그는 선뜻이 임무를 맡았다. 몇달간의 준비끝에 1980년 5월 《장백산》잡지가 마침내 고고성을 울리게 되였다. 잡지는 과외로 꾸려왔으며 인쇄는 심양에 가서 했다. 출간도 초기 1년에 2기 꾸리던데로부터 계간으로, 격월간으로 꾸려졌고 《장백산》잡지사는 편제가 없던데로부터 1981년에 전액편제 2명, 1985년에는 5명으로 확정되였으며 민족사무위원회에서 해마다 2000원씩 보조하던데로부터 1983년부터는 길림성재정에서 년간 3만원씩 보조해주면서 《장백산》잡지는 점차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1985년에는 그와 동료들의 노력으로 성급잡지로 되였는가 하면 연변, 북경, 흑룡강, 료녕 등지 문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1985년에는 3만부가 발행되는 쾌거도 일구어냈다.
잡지가 잘 꾸려지니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의 관심과 지지도 받게 되였으며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인 정령, 애청, 왕몽, 곡목, 마라친부 등은 축하의 편지도 보내왔다. 하지만 잡지사가 통화에 있으니 여러모로 불편하였다. 특히 통화지구가 매하구시, 백산시, 통화시로 갈라지면서 《장백산》잡지의 진로가 문제로 나섰다. 백산시에는 조선족이 적었고 다른 곳에서는 부담으로 생각해 접수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1987년 규정에 따르면 성급잡지는 지방에서 꾸리지 못하게 되여있었다. 이 틈에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수는 없었다. 1988년 통화지구당위 류희림서기가 길림성 부성장으로 임직하게 되였는데 그 “관계”를 빌어 1990년에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길수 있었다.

《장백산》잡지를 위해 남영전씨는 자기 글을 창작하는것을 잠시 접을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상급에서는 그를 당학교에 보내 학습시키고 선전부 부부장으로 점찍어 두었지만 잡지운영을 위해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1988년 민족문학잡지사에 와 사업하라고 초청했을 때에도, 지난 2006년 민족문학잡지사에서 재차 주필로 초청했을 때에도 그는 거절하고말았다. 그때는 그가 길림신문사 사장, 장백산잡지사 사장으로 임직했을 때였다.

“잡지나 신문은 우리 민족의 목소리를 낼수 있는 진지와도 같다”며 민족의 잡지에 대한 책임감에서라고 한다.

2005년 4월 길림신문사 사장으로 임직했을 때 남영전씨는 또 다른 난제에 부딪치게 된다. 로후한 난방시설 때문에 추위에 떨어야 했고 전기선 로화로 화재의 위험이 있었다. 화재의 위험부터 제거해야 했는데 신문사에는 자금이 없었다. 하여 당시 남영전사장은 아는 동생으로부터 5000원을 “강요”하여 전기선로부터 보수했고 당시 길림성로동청 신봉철부청장 등 지인들과 사회 인사들의 지원을 받아 난방시설도 개조했다.

사장으로 있으면서 남영전씨가 길림신문사를 위해 해놓은 가장 큰 일이 바로 재정전액지원단위로 만든것이다. 임직초기 길림신문사는 빚이 많았다. 초기에는 이곳 저곳에서 지원을 받고 조선족 사회인사들의 지원을 받으며 신문사를 운영해왔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수 없었다. 그러던중 길림신문사는 한가지 큰 사건과 접촉하게 된다.

“조선족귀국로무자 벌금사건”이다. 2005년 길림성의 조선족 귀국로무자들이 귀국할 때 공항에서 벌금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벌금사건에 관한 반영을 들은 남영전사장은 즉시 내부참고를 작성해 성당위, 성정부와 해당 부문에 반영하는 한편 담당기자를 배치해 관련 부문을 추적취재하고 련속 보도를 조직하였는데 사건은 길림성 당위와 정부 관계부문 특히 길림성연성환경건설판공실과 공안청의 중시를 불러일으켰으며 해결을 가져왔다. 이 사건에 대한 원만한 해결을 계기로 길림신문사는 언론지로서의 위치를 찾았는가 하면 2006년에는 길림성재정에서 전액 지원하는 단위로 탈바꿈했다. 모든 사업이 정상궤도에 올라선 뒤 그는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주필, 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 자리에서 물러났다. 원래는 2008년이 퇴직년도였는데 어쩔수 없이 2년 더해 2010년 3월에 물러났다고 한다.

그동안 남영전시인은 《록색의 꿈》, 《상사집》, 《신단수》 등 15권의 시집, 수필집 《잊을수 없는 사람들》 등 3권을 출간했고 중국고전문학작품 《당송전기집》, 《봉신연의》, 《파금단편소설집》 등 3권의 도서를 번역했으며 3차례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획득하고 4차례 전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 3차례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을, 두차례 길림성정부 최고문예대상인 “장백산문예상”을 받았다. 또 3차례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을 수상하고 당대 걸출한 민족시인시가상을 수상했으며 인민일보와 중국작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성세민족의정 응모상”을 비롯해 50여차 수상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쎈터(IBC), 미국세계명인전기쎈터로부터 4매의 성과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영국의 “세계명시인백과전서”, “국제명인사전” 등에 수록되였다.

남영전시인은 1995년에 국무원특수수당금 향수자로 되였으며 2008년에는 고급전문가로 선정되여 표창받았다.

연변일보 장연하 신연희 전윤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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