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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의 걸출한 정치활동가 한락연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3월20일 11시31분    조회: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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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한락연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오늘부터 시작

본지는 오늘부터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을 게재한다.

중국조선족이 중국에 대규모 이민한지 이제 100여년 된다. 중국에서 이룩한 중국조선족의 위대한 업적을 찬송하고 억세게 싸우고 간고분투하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곤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국조선족의 위대한 영웅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이 보도를 기획한다.

100여년이래 중국조선족 가운데는 훌륭한 지도자, 과학자, 지식인, 기업인 등 각 분야 인재들이 용솟음쳐나왔다. 그중 100명(기업인 25명)을 엄선하여 본지와 《인터넷길림신문》을 통해 보도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의 위용을 전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중국조선족 위상 향상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1년동안 100명을 취재보도한후 책으로 편찬할 계획이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하여 중국조선족의 지난 100여년 력사를 진일보 깊이 료해하기를 기대한다.

보도는 본사와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단에서 공동주최하며 광주모드모아그룹에서 후원한다.

- 본사 편집부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정치활동가, 인민예술가, 세계반파쑈투사

2011년 7월 30일,한락연선생 타계 64주기를 맞으며 룡정시락연공원에서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룡정사람들은 그를 두고 고향-룡정이 낳은 가장 훌륭한 아들이라고 말한다. 조선족들은 그를 두고 중국조선족이 낳은 가장 걸출한 혁명가, 정치활동가, 예술가라고 말한다. 등소평으로부터 《위대한 국제주의전사》로 불리운 루이 앨리(1897-1987뉴질랜드사람)는 자기의 전우 한락연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중국공산당 당원인 한락연은 동북 길림성의 한 조선족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사업작풍과 그의 혁명정신은 그의 이름과 같이 락관적이였다. 임무앞에서 그는 종래로 곤난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혁명사업에 대한 그의 굳은 절개와 열정은 혁명의 화염마냥 그와 함께 공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덥혀주었다.》

농민의 아들로부터 독립운동가로

1898년 12월 8일, 길림성 룡정촌 토성포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한락연의 원명은 한광우고 자는 락연이며 윤화라는 아명과 소공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 그의 가정은 부유하였으나 9살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졌다.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한락연은 하학후면 묘지에 가서 나무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1914년에 소학교를 졸업한후 선후로 전신국과 세관에서 일하며 집안살림을 보태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시기 세관에서 일하는 편리를 리용하여 외국의 서적과 신문을 통해 한락연은 서방예술을 접하는 한편 진보적인 사상을 접수하게 된다.

1919년 조선《3.1》반일운동에 동조하고저 룡정에서도 3월 13일에 2만여명이 참가한 반일시위가 일어났는데 당시 한락연은 시위자들이 들 프랑카드와 태극기 수백개를 손수 만들었다. 14명의 희생자와 48명의 부상자를 내고 94명이 체포된 이번 시위에서 한락연은 일본침략자들의 만행을 보았고 젊음의 끓는 피를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사업에 바칠 결의를 다진다.

일본경찰의 지명수배자로 된 한락연은 그해 사랑하는 안해 최신애와 배속에 있는 딸 인숙이를 룡정에 둔채 결연히 룡정을 떠나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가 조선혁명가들을 따라 중국혁명의 성지-상해로 간다.

안해 최신애와 딸 한인숙과 함께.

1920년에 상해미술전과대학에 입학한 한락연은 미술공부에 전념하는 한편 조선혁명자들을 자주 만나 고려공산당 활동에 참가하였으나 내부 종파투쟁과 암투에 크게 실망하고 그들과 결별한다.

독림운동가로부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향도》 주필 채화삼을 알게 되며 그의 인도로 1923년 여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된다.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첫 조선족이며 또한 동북에서 사업을 개시한 첫 공산당원이기도 하다. 1923년 말에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 이듬해에 동북에 파견되여 당창건사업에 뛰여든다.

심양, 할빈, 치치할 등지를 전전하면서 그는 화가, 미술교원, 사진관의 촬영사, 공원의 감리 등 신분으로 당조직을 발전시키고 공산당원을 발전시켰다. 이로부터 광활한 동북대지에는 한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활활 타올랐다.

1929년말, 당의 부름으로 상해에 돌아온 한락연은 한차례의 행동에서 공산당원의 신분이 탄로되자 당조직의 동의하에 프랑스로 근공검학을 떠난다.

구라파에서 화가, 세계반파쑈투사로 성장

낯설고 물선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한락연은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동서양의 미술에 빠져들었다. 생계때문에 중국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려 팔기도 하였지만 그는 항상 락관적인 모습이였으며 리옹박물관이나 중불대학에 가서 동서양미술에 대한 연구와 탐구를 이어나갔다. 1931년 빠리 루브르미술학교에 입학한 한락연은 서양화를 전공하는 한편 루브르박물관의 고대미술의 걸작들을 걸탐스레 탐독한다. 이 시기에 그의 새인상주의가 점차 틀을 잡게 된다.

루브르미술학교를 졸업한 한락연은 스케치북을 메고 구라파전역을 돌면서 서방문화를 고찰하는 한편 각국의 정세와 로동운동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1936년 그는 에스빠냐인민전선에 합류하여 인민대중의 승리를 이끌기 위한 거대한 변혁을 직접 목격하였다. 하지만 그가 제일 관심하는것은 중국대륙의 정세였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 중국의 정황을 예의주시하였다.

1935년에 그린 자화상.

1937년 로구교사변이 폭발한후 당시 빠리시보의 기자로 근무하던 한락연은 빠리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양호성장군을 따라 결연히 귀국길에 오른다.

8년만의 귀국, 당시 그는 마음만 먹으면 미술대학에 교수로 취직할수도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항일구망총회》의 련락공작에 참가한다. 그는 종군기자의 신분으로 대아장전역과 서주전역에 참가, 전선에서 직접 찍은 사진을 외국언론에 배포하여 국제상에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1938년 한락연은 주은래, 곽말약이 령도하는 중국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에서 조직한 작가, 예술가연안참관단 일원으로 연안을 방문, 연안녀자대학 학생들에게 《항일전쟁시기의 민족예술문화에 대하여》란 유명한 강연을 하였다. 당시 모택동동지가 친히 그들을 접견하였다.

1938년 4월 한락연은 중경에서 기독교청년회 향촌간사로 일하는 지적인 처녀 류옥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는 20대 초반에 최신애와 결혼했고 딸 하나가 있다는 사실도 류옥하에게 알려준다. 조직의 동의하에 그들은 중경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한국림시정부 김구, 뉴질랜드 작가 루이 앨리와 국공량당의 핵심인물들이 참석하였다.

1939년 5월, 한락연은 국민당전지위원회 소장 지도원으로 임명되여 항일선전과 통일전선공작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신분을 리용하여 두차례나 진동남전선에 가서 사회조사를 하고 민심을 살피고 전황을 료해하면서 항일통일전선의 련락공작을 하였다.

1940년 6월, 한락연은 93군과 팔로군전선총부의 련락공작을 하다가 신분이 탄로되여 보계에서 국민당특무에게 비밀리에 체포된다.

옥중에서 한락연은 공산당원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지혜롭게 적들과 투쟁하였다. 당조직의 노력으로 1943년초에 《국민당전지위원회, 동북항일구망총회로 돌아가지 못하며 서북을 떠나지 못하며 그림을 그리되 로고대중의 형상을 그리지 못한다》는 몇가지 조건하에 가석방된 한락연은 화가의 신분으로 통일전선사업에 참여하라는 당조직의 지시로 오래동안 놓았던 붓을 다시 잡을수 있게 되였다.

키질 천불동에서 석굴벽화를 연구

한락연은 출옥한후 섬북, 성도, 감숙일대를 전전하면서 풍경화와 풍속화를 창작하였는데 섬서, 사천일대의 농민들의 형상을 담은 그림도 있었다. 이 시기 그는 훗날 유명한 화가로 된 황주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함께 8백리 진천평원을 누비며 사생하였다.

1944년 한락연은 가족을 이끌고 서북행을 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한편 장치중, 도치악, 조수산 등 서북지구의 국민당 상층인물들과 접촉하면서 통전공작을 하였는데 훗날 광대한 서북지구의 평화적해방에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

일찍 프랑스 류학시절 한락연은 돈황의 벽화를 찍은 우표를 보고 중국에도 이런 위대한 문화유산이 있었구나하는것을 알았는데 이번 기회에 문화유적을 답사하면서 동방의 찬란한 문화보고를 확인하리라 작심한다. 그곳에는 외국사람들에 의해 발굴이라기보다는 도굴이라는것이 더 적절한 발굴작업이 시작된 곳도 있었고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부분들이 더 많았다.

1946년 4월, 한락연은 부인과 딸과 함께 우루무치에 도착, 키질의 천불동에 묵으면서 많은 벽화를 모사하였다. 천불동은 돈황, 룡문, 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로 꼽히는데 벽화가치 역시 으뜸이라고 한다. 기재에 의하면 한락연은 중국을 대표하는 벽화와 서방문화를 결합시켜 예술창작을 한 첫 중국화가로서 그림과 고고학을 융합시켜 고대문명을 보호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비행기사고로 조난

1947년 봄, 한락연은 두번째로 키즐천불동을 고찰하였다. 고찰임무를 완성한후 한락연은 우루무치로 돌아와 그림전시회를 개최하였다. 7월 30일, 한락연일행이 탄 우루무치-란주행 257호 비행기(국민당군용기)는 오후 2시 가욕관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3-4000메터 상공에서 방향을 잃고 선회하다가 기련산에 추락했다.

한락연의 조난소식은 서북 각계를 진동하였다. 그의 조난소식은 국내의 여러 큰 신문은 물론 영국의 타임스지를 포함한 큰 신문들에서도 취급하였다. 주은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건국후 한락연은 혁명렬사로 추인되였다.

1970년대 주은래총리는 한락연의 20여년 지기였던 염보항의 아들인 염명복을 불러 《왜서 한락연을 쓰는 사람이 없소? 그를 잊지 말아야 하오. 참 애석하오.》라고 환기시킨바 있다.

2010년 9월에 룡정시락연공원 공원비에 새겨진 한락연의 략력.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과 전반 동방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공산주의전사로 성장,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 서방예술기법과 동방예술의 정수를 교묘하게 접목시키고 소중한 중화문화를 발굴, 보호하는 사업에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운 인민예술가 한락연,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은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될것이다.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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