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기동인민혁명의 코기러기–주문빈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4월8일 15시29분    조회:395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주문빈

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6)

하북성 소재지인 석가장의 화북렬사릉원에는 화북지구에서 희생된 10명의 저명한 영웅조각상들이 모셔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앞에 모셔진것이 바로 기동인민의 애대를 받으면서 혁명의 코기러기로 불리운 주문빈의 동상이다.

《주문빈, 원명은 김성호, 조선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 사람. 중공당원이며 원 중공 기열변(冀熱邊)특위 조직부장. 항일전쟁이전 로동자운동에 종사. 1944년 가을 풍윤현 양가포전투에서 희생.》주문빈동상 기단에 새겨진 렬사의 략력이다.

주문빈의 본명은 김성호, 1908년 9월 23일 조선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에서 출생했고 1914년 부친을 따라 중국 통현에 자리잡으면서 글공부를 했다.

주문빈의 부친 김기창은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키가 크고 인물들이였다. 맏이 김승호는 조기 공산주의자로서 일찍 조선에서 반일운동을 하다가 일제에게 살해됐고 둘째인 김영호는 중국에 와 중국공산당에 참가한 조기 공산주의자였다.

셋째인 문빈 김성호는 1926년 로하중학교에서 학생때 둘째형님의 영향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 주문빈은 동학들인 강경신, 장학연(일명 장진이라 불렀음), 그리고 동생인 김상호를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고 로하중학교에서 제일 처음으로 된 중공당지부를 설립했다. 이 당지부는 통현의 첫 중공당지부였다. 주문빈동지가 당지부 서기직무를 맡았다.

주문빈은 당원들을 지도하여 국민당의 죄악을 폭로, 규탄하고 당의 혁명주장을 선전했으며 로동자야학교도 꾸리고 교내의 국민당우익분자들을 타격하고 통주남자사범학교와 녀자사범학교의 혁명적 학생들과 밀접한 련계를 맺는 등 사업들을 성과적으로 하였다.

1929년 여름, 주문빈은 북경지구 지하당 기관에 옮겨가서 사업했다. 그는 북경시에서 당의 기층조직을 건립하는 한편 연경대학과 보인대학에서 당원들을 발전시키고 지도했다.

1930년 겨울에 특무의 추격을 받게 된 주문빈은 북경시 교외의 통현, 란현, 풍윤 등 일대를 돌아다니며 계속 당사업을 하였다.

《9. 18사변》이후 그는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보인대학의 공산당원들에게 폭발약과 건전지 등을 시험 제조하게 하였다. 그들은 무기를 만들어 화북인민의 무장투쟁을 지원했다.

1936년 여름, 주문빈은 하북성 당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당산공작위원회 서기로 파견되여 개란탄광로동자들을 지도하였다. 손재주가 많은 주문빈은 무선전 수리소를 운영하면서 이를 은신처로 당의 력량을 확충시켰다. 사실 이 수리소는 로동자투쟁의 지휘소였다.

《7. 7사변》후 그는 《화북에서는 마땅히 유격전쟁을 자기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당중앙의 지시에 근거하여 개란탄광의 수만명 로동자들을 반제투쟁에로 궐기시킬 준비를 다그쳤다.

당시 개란탄광은 영국제국주의가 경영하였는데 《7. 7사변》후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탄압까지 받게 되였다. 개란탄광의 영국자본가는 이른바 《갱내로력공수 기록제》를 실시한다는 포고문을 내붙였다. 광산로동자들의 생사를 무시하고 로동시간을 최대한으로 늘여 로동자들의 고혈을 빨아먹자는 수작이였다. 광산당국의 포고문은 로동자들의 격분을 자아냈다. 주문빈은 이러한 로동자들의 실태를 장악하고 즉시 긴급회를 열고 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1938년 3월 12일 주문빈은 개란탄광의 조각장과 서림, 당가장, 마가구, 당산 등 5개 광산 로동자들을 조직하여 대파업을 시작하였다. 조각장의 파업이 먼저 일어났다. 주문빈은 절진국, 장진원 등 20여명 열성자들을 모집하여 회의를 열고 파업위원회 설립과 로동자 규찰대 조직을 내오기로 하고 22일부터 총파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3만5000명의 로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였고 이들의 영향으로 기타 광산에서도 모두 일떠났는데 4월까지 파업투쟁이 계속 되였다. 5월 4일 영국 자본가는 할수없이 로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16가지 로자협약을 체결하였다.

50여 일간 지속된 대파업은 승리로 끝났다. 파업은 당시 당산시 공작위원회 서기 주문빈의 뛰어난 재능과 탁월한 기여를 보여주었고 기동인민들의 반항투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중공중앙 화북국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모택동동지는《참 잘 지도했습니다. 로동계급의 각성이 높습니다.》하고 찬탄하였다.

 
화북렬사릉원내의 주문빈렬사 조각상

1938년 6월 주문빈은 조각장탄광의 로동자 규찰대 대장 절진국을 중심으로 130명의 로동자항일무장대오를 건립했다. 광부들로 조직된 항일무장대오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거쳐 3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당에서는 이 부대를 기동항일련합군 특무대대로 명명하였다.

일제는 대량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 부대를 소멸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 무장대오는 7000여명으로 늘어났다. 개란탄광로동자들의 줄기찬 투쟁은 기동지구 광범한 농민들의 반제투쟁을 크게 고무했다. 1938년 7월 20일까지 전 기동 22개 현에서 20만 인민이 참가한 대봉기가 일어났다.

1938년 8월, 주문빈이 령도하는 봉기부대의 대표와 팔로군의 등화가 지휘하는 종대의 책임자들이 철창에서 련석회의를 가지고 당중앙의 방침에 따라 기찰열료군구의 산하 4개 군분구를 합병하여 통일적인 군사지휘부를 설립하였는데 주문빈은 기찰열료군구직속 팔로군 기동유격지대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됐으며 1939년에는 중국공산당 기동동부지구 위원회 서기사업을 겸하였다.

기동은 동북과 관내 화북을 이어주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기때문에 그 전략적 지위가 매우 중요하다. 1937년 일제가 전면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발동한 이후 적의 깊숙한 후방, 교통요지에 위치한 기동 항일유격근거지는 더욱 중요하게 되였다.

기동유격근거지를 목에 걸린 뼈처럼 생각한 놈들은 3만여 괴뢰군을 끌어 모아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과 소탕을 감행하였다.

근거지를 확보하려면 적들과 싸워야 했다. 주문빈은 적 치안군을 소멸할 주장을 내세우고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기동의 항일부대를 집중해 적의 치안부대 섬멸전을 조직하였다. 11월 15일 준화 40리포의 첫 전투에서 4백 여명 적들을 소멸하였고 그 후 23차의 전투를 거쳐 유격대는 치안군 2,700여명과 왜병 300여명을 소멸하였다.

1943년 3월에 주문빈은 중국공산당 기동특별위원회 조직부장 겸 중공란중지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7월에 기동특별위원회는 기열변특위로 개칭되고 특위아래에 5개 지구위원회와 5개 전원공서를 두었는데 주문빈은 특위 조직부장으로 선거되여 특위기관을 지도했다. 다년간의 간고한 전투를 거쳐 1944년 20만 민병을 가진 완정한 기열료항일근거지가 형성되였다.

1944년 10월16일 주문빈은 풍윤현 양가포포위돌격전에서 머리에 중상을 입고 장렬히 희생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36세밖에 안되였다. 주문빈동지가 희생된후 류소기는 《문빈동지는 중조 량국인민의 훌륭한 아들이며 우리당 우리군의 용맹한 장령이였다. 그가 일찍 희생된것은 우리 당의 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면서 애석해했다.

중공당산시위 당사연구실에서 편찬한 기동혁명사에는 주문빈을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주문빈,그는 기동항일 폭동과 기동항일근거지 건립, 기동항일전쟁 및 근거지와 기동지방당조직 건설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특히 그토록 잔혹한 투쟁환경속에서도 시종 군중들속에 뿌리박고 기열변구의 인민과 간부들의 애대를 받아왔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ㅡ료녕SK실업부동산개발유한회사 리사장 홍종국씨 “그룹에서 조선족인 저를 이렇게 인정해주고 밀어줄줄 몰랐습니다. 그 기대에 보답하고저 열심히 일하고있습니다.” 패기와 자신감에 벅차있는 홍종국씨(1963년생), 현재 그는 료녕 SK실업부동산유한회사 리사장, 단동SK물류유한회사 총경리를 맡고 단동지역의...
  • 2013-11-19
  • 문주호씨 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진 록강사회구역에 거주하고있는 문주호(45세)씨의 나무뿌리조각이 국내외에서 각광을 받고있다. 나무뿌리조각공예에 남다른 애착심을 갖고있었던 문주호씨는 20년전인 1992년부터 안해 안춘옥(45세)씨와 함께 부지런히 산과 골짜기를 넘나들며 모양이 각이한 여러가지 마른 나무뿌리를 주어...
  • 2013-11-19
  •  연길윈워터전기유한회사 총경리 박무일씨 창업스토리    연길윈워터전기유한회사 총경리 박무일씨는 20년 동안 순간온수기개발에 몰두하여 창업의 희열을 맛보고있는 창업인이다. 1982년 동북공학원(지금 동북대학) 주물전업을 졸업한 박무일씨는 주물에 남다른 흥취가 있었고 매사마다 끈기있게 달라붙었...
  • 2013-11-19
  • ‘예술구국(藝術救國)’. 이 짧은 문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조성환 선생이 독립운동 동지였던 한흥교의 아들인 항일음악가 한형석에게 ‘예술을 통해 나라를 구하라’며 내려준 훈구다. 먼구름 한형석은 한일강제병합이 강행됐던 1910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불운한 해에 태어난 ...
  • 2013-11-18
  •       전통산업의 재발굴과 문화식품 시대를 선도하다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리동춘 사장 “21세기는 문화식품시대이다”라고 고취하는 사람이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의 리동춘 사장이다. 그는 우리민족의 전통식품인 된장과 전통술의 재발견을 통해 ‘오덕 장로주&rsqu...
  • 2013-11-15
  • [화제집중] 장경률 연변일보 론설위원(전 편집국장)과 펼친 담론 장경률 선생은 지난 11월 3일 동포세계신문사를 방문해 본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면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의 존재와 역할을 두고 인터넷상에서 쟁론이 벌여졌다. 이 쟁론에 화두를 던진 장경률 길림성 조선문신문잡지 심열위원 연변일보 론설위원(전...
  • 2013-11-13
  • “나시족은 운룡설산을 자신들의 정신적지주로 생각한답니다. 하늘이 손에 잡힐듯 하지만 하늘대신 산을 품은 나시족의 정신은 만년설만큼 고결해 보였습니다” 길림성 지질국 연변지질 제6조사원에서 니화석 지질학자로 근무했던 김한산(73살)선생이 건네는 첫마디였다. 그는 째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2013-11-13
  • 동항시정기수산물양식기지 오기범총경리의 창업담   관전정기수산물양식장, 동항시정기수산물양식기지 오기범(1966년 생)총경리가 동항시바다가에서 민물고기 양식과 수출로 흥부박을 캐고있다. 연길태생인 그는 지난 1983년에 연변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연길시방직공장에 배치받아 10년간 사업을 해오다가 1993년...
  • 2013-11-12
  •  조선족 미술계 원로 김영호 옹    11월 5일 오후 2시, 기자가 중국 조선족 미술계의 원로이자 거목인 김영호화백(83세)의 저택을 찾았을 때 선생은 한창 래년에 연변대학 미술학원 미술전시홀에서 마련될 수채화 중심의 개인전시회(약 40여폭)에 출품할 작품을 창작중이였다. “오전에는 약 3시간 동...
  • 2013-11-08
  •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새회장에 뽑힌 이건기 싱가포르 한나프레스 사장. "갈라진 한인 언론인 단체 통합에 앞장서겠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현재 전 세계 한인 언론인들의 단체가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세계한언)와 재외동포언론인연합회(재언협)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 2013-11-0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