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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광장의국기게양과 함께 키워가는 "꿈"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4월15일 09시53분    조회: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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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황기연

조선족군악대원 황기연씨
"나라를 대표한다"는것으로 무한한 영광과 긍지 느낀다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무장경찰부대의 계렬에는 천안문광장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오성붉은기를 동반하며 국가를 연주하는 전문문예팀이 있다. 바로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북경총대 군악단이다. 무장경찰부대 다른 총대에도 군악대가 있지만 다르다면 이들은 천안문광장에서의 국기게양식 국가연주를 담당하고있다는것.

사람들은 천안문광장의 국기게양식을 혹은 현장에서 혹은 텔레비죤을 통하여 보아왔지만 장엄한 “의용군행진곡”을 연주하는 그 대오속에 조선족연주가도 있다는데 대해 아는 사람이 몇이 안될것이다.

현재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북경총대군악단 제2대대 대장인 황기연씨는 고향이 연길인 조선족이다. 군에 입대한지 어언간 23년이 되는 황기연씨는 4년뒤인 1993년에 소위계급을 달아서 지난해 12월에는 소좌로 승진했다.

“음악가정”의 트럼펫연주자
일반적으로 음악을 한다면 가족중 꼭 어느분이든 음악과 인연이 있을것이라 여기고 가족사항을 물으니 아니나 다를가 황기연씨의 집은 완벽한 “음악가족”이였다. 황기연씨의 아버지는 연변가무단의 비올라 연주자였고 큰형님은 작곡을, 둘째형님은 바이올린연주자였다. 그러한 음악가정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트럼펫을 곧잘 연주하였다고 한다.

군악대에 입대하기전까지 황기연씨의 꿈과 목표는 중국에서 유명한 상해음악학원이나 중앙음악학원에 입학하는것이였다. 그것을 목표로 자기의 음악재능을 열심히 닦아가던중 운명은 황기연씨와 음악학원 사이를 갈라놓고 그한테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와의 선을 이어주었다. 황기연씨가 열심히 음학학원 시험을 준비하였지만 숙명적인 배치라고 할가 예술학원에서는 트럼펫 지망생을 모집하지 않았던것이였다. 대신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군악단에서 대원모집을 내려왔는데 악기연주, 용모와 키를 비롯하여 까다로운 신체검사 등 심사를 거쳐 황기연씨는 군악대에 입대하였다.

1989년, 그가 10명의 조선족과 함께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군악대의 특별모집에 합격된 그해는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군악대가 설립된지 2년여 되는 해였다. 황기연씨가 군악대에 입대한지 2년만인 1991년 5월 1일부터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북경총대군악단이 국기게양식 연주임무를 정식으로 담당하게 되였으며 황기연씨는 다른 조선족과 함께 름름한 모습으로 천안문광장의 군악대에서 모습을 나타내게 되였다.

“군악대에 입대한지도 어언간 23년철 되는데 당시 주력으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입대초기에는 학원대의 학원병으로 있었다고 한다. 비록 이름은 군악대라고 하지만 입대 초기 3개월 동안은 일반군종 신병들과 마찬가지의 훈련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따분하게 느껴지고 힘들기까지 한 대렬훈련이 하루하루 이어질 때면 군악대를 떠날 생각도 가끔 나군 하였지만 성격이 강인한 그는 끝까지 버텨냈다. 신병훈련이 끝나면 명곡연주를 비롯하여 전문적인 연주훈련이 시작되였는데 워낙 음악에 탄탄한 기초가 있었던지라 그 과정도 무난하게 통과되였다.

황기연씨에 따르면 학원대는 말 그대로 학원생처럼 “졸업”과 같은 고비를 넘겨야 하는데 입대 1년후 악기연주가 뛰여나지 못하거나 양성단계에서 전망성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제대라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황기연씨는 당시 조선족이 10명 입대하였는데 이들은 입대한지 반년만에 전부 하사로 승진하였다며 신병가운데서도 앞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자원제대를 하여 지금은 4명만 남아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연주보다도 더 힘들고 고단한 “보행연습”
중국에 적지 않은 군악대가 있지만 크게 둘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악대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군악대이다. 중국인민해방군 군악대가 외국수반방문 등 국가의 대형행사를 맡고 있다면 황기연씨가 소속한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북경총대의 군악대는 국기게양식, 북경시정부 및 무장경찰부대 총부, 공안부 등의 외사행사에 참가한다.

군악대 대원들에게 있어서 힘든것은 연주보다 “보행기술”이였다. 특별한 엄선을 거쳐 군악대에 들어온 이들이다보니 “조국을 노래하네(歌唱祖国)”나 “의용군행진곡”과 같은 악곡을 연주한다는것은 식은죽먹기였다. 하지만 천안문광장에서 완벽하게 일치한 보행을 완성한다는것은 말이 쉽지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비록 평소에도 엄한 훈련을 거쳐왔지만 완벽한 보행을 위해서는 혹독한 훈련이 불가피했다.

그리하여 이들의 훈련장에는 천안문성루에서 게양대까지 똑같은 거리로 선이 그어졌고 그 선을 따라 혹독한 훈련이 반복되였다.

국기게양식 행사때 천안문성루부터 국기게양대까지는 278보, 한걸음 차이 없이 이 278보를 딱 2분 7초만에 걸어야 했다. 사실 악기를 들거나 품고 연주하면서 걷다보면 행진속도에 대해 고려할 겨를이 없다. 행진속도를 고려하느라면 연주에 지장줄수 있었기에 감각대로, 기계적으로 걷는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감각대로, 기계적으로 걷는 278보를 위하여 황기연씨도 얼마만한 땀을 흘렸는지 모른다.

국기게양식은 듣기에는 간단하게 국기를 게양하는것 같지만 의식자체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 매번 국기는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과 맞추어야 하기에 군악대는 반드시 앞서 도착해야 한다. 날이 밝기전에 일어나야 했는데 가장 견디기 힘든것은 겨울철이였다. 연주에 불편할가봐 너무 두터운 옷도 입을수 없었고 악기 건반이 얼어들가봐 잎김으로 녹이거나 품에 꼭 껴안고 녹여야 할 때도 있었으며 입술이 갈라터져 음식물을 입에 대기 힘들 때도 있었고… 이러한 일은 너무 많아 헤아릴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건국기념, 대형대회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면 훈련강도는 대뜸 승급한다. 5000메터 달리기에서 엎드려 팔 굽혀펴기, 턱걸이, 철봉 등은 “약과”에 불과했고 가장 힘든것은 차렷자세로 서있기였다. 특히 여름철 무더위속에서 차렷자세로 한시간동안 서있는다는것은 어지간한 의지력과 인내력이 없이는 근본 견딜수 없는 일이였다.
한시간만 아니다. 얼마 뒤에는 그 한시간이 두시간으로 이어지고 다시 세시간으로 이어지고…황기연씨는 1999년 10월 1일에 거행된 공화국창건 50돐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그 힘든 과정을 겪어봤고 공화국창건 60돌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열병마을(阅兵村)에서 그 고비를 넘겨보았다고 한다.

“하도 연주하면서 서있으니깐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지만 정립상태에서는 근본 서있을수도 없는 상황이고 때로는 다리가 직선이 되여 굽히기조차 힘든 정도”라며 훈련의 혹독함을 말한다. 훈련을 하다가도 넘어지게 되면 넘어지는 모습은 “쓰러진다”로 표현하지 않는다. “넘어간다”고 한다. 너무 서있다보니 무릎관절이 마비되여 거의 통나무 넘어가는거나 다름없이 그대로 넘어간다는것이다.

특히 황기연씨에게 있어서 가장 잊을수 없었던 나날은 중화인민공화국창건 60돐 기념행사를 위한 훈련 때문에 열병식촌에 3개월간 입주해있을 때란다. 모 부대 훈련기지였는데 체력훈련을 위해 두어바퀴 달리고나면 일반 군부대의 초강도 강행군에 맞먹는다는것. 그 훈련을 “죽을 맛”이라 표현하는 그의 말에서 훈련의 강도를 가늠할수 있었다. 비가 오면 비옷대신 비닐박막으로 대충 가리고 또다시 훈련에 돌입해야 했다. 그때의 훈련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그 훈련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이였는지를 짐작할수 있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무한한 영광
황기연씨가 군악대에 입대한지도 어언간 23년에 달한다. 그동안 군악대에 함께 있던 조선족동료들도 하나, 둘 떠나가면서 이제는 네명만 남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군악대의 수석연주가들이고 전부 소좌로 승진했다.

“사실 군악대에 금방 왔을 때에는 후회할 때도 있었다”는 황기연씨. 하지만 지금은 후회는커녕 무한한 성취감과 영예감을 느끼고있었고 커다란 우월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국기게양식과 국가연주, 말 그대로 나라를 대표하는 일인만큼 나라를 대표한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대단한 영광이라고 자부한다.

비록 생해음악학원이나 중앙음악학원 등 자기의 꿈이고 목표였던 곳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오히려 군악대에서의 생활은 인생에서의 가장 성취감이 있는 나날이라는것이였다.
황기연씨는 그동안 국기게양식뿐만아니라 많고 많은 중대한 행사에 참가하여 자기 인생의 페지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1990년, 북경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릴 때 황기연씨는 군악대와 더불어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각개 국가의 국기를 게양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석달이라는 시간을 들여 38개 나라와 지역의 같지 않은 풍격의 38수의 곡을 익숙하게 연주함으로써 원만하게 임무를 수행하였다.

1991년 5월 1일, 중국은 천안문광장 국기게양식에서 처음으로 의장대와 군악대를 동원하여 성대한 국기게양식을 거행하였는데 그때 황기연씨는 다른 조선족군관 8명과 함께 군악대성원으로 천안문광장에서 20여만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가를 주악하는 행운을 지녔다. 지금까지 이들이 국기게양식에서 국가를 연주한 차수가 얼마인지 상세한 기억이 없다. 단지 있다면 한번 또 한번의 연주 모두가 “나라를 대표한다”는 뿌듯함이였고 영광이였으며 그래서 더더욱 오차없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였다.

황기연씨가 참가한, 그의 인생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사로는 1990년 북경에서 거행된 아시안게임을 비롯하여 공화국 창건 50돐, 60돐 기념행사, 향항회귀 기념행사, 2008년 북경하계올림픽 각개 국가의 국기게양식 등이였다. 지난 “인대회의”와 “정협회의”기간에는 대표, 위원들을 영접, 환송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이밖에 황기연씨와 군악대의 조선족군관들은 국내외적으로 펼쳐진 수많은 대형행사에 참가하여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군악대의 영예와 함께 조선족의 영예를 빛냈다.
현재 이들은 매달 1일 진행되는 국기게양식 연주를 맡고있다. 전에는 매달 1일, 11일, 21일 한달 세차 국기게양식이 있었는데 2004년 6월 1일부터 매달 1일의 의식으로 변했다고 한다.

황기연씨는 군악대의 다른 조선족과 더불어 지난 2001년 군공메달을 수여받았다. 1991년 5월 1일 군악대가 처음 천안문광장에서의 국기게양식에 등장해서 10년만에 있은 일이다. 그리고 지난해 12월에는 중좌로 승진하였다.

황기연씨를 비롯한 군악대내의 조선족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성스러운 일”에 대한 영예감과 함께 사명감을 다져가며 항상 준비되여있었다.


연변일보 전윤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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