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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땅크》전임 공군부사령원 리영태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5월26일 16시35분    조회: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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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영태

 

 

[백년백인21]《공중땅크》전임 공군부사령원 리영태

항미원조전쟁에서 맹호의 기세로 미군비행기 4대를 격추하여 이름을 날린 《공중땅크》 리영태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의 우수한 장군이자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리영태는 1928년 11월 4일 료녕성 신빈현에서 태여났다. 신빈현에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항일유격대의 무기를 보관해준것이 탄로되여 일제놈들에게 붙잡혀 물매를 얻어맞고 불구자로 되었다. 후에 리영태는 부모를 따라 길림성 통화현 쾌대모진으로 이사를 왔다. 성격이 강의한 리영태의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앉은뱅이걸음으로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는 남의 집 어멈으로 들어가 푼돈을 벌었다.

래영태는 소학교 3학년까지 겨우 공부를 하다가 째지게 가난한 살림 때문에 더는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됐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15살에 나는 그는 쾌대모소학교 교장선생의 소개로 위만 통화현병원에 들어가 잡일을 했다.

1945년 8월 일제가 투항한후 병원은 팔로군이 접수, 이해 10월에 17살에 나던 리영태는 분연히 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민주련군에 참가하였다. 1946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있은 《삼하강남 사보림강》 전역에서 동북민주련군은 국민당군 5만여명을 섬멸, 아군도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우리 군에는 약품이 아주 귀했는데 부상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리영태는 료동군구의 명령를 받고 조선을 넘나들면서 약품을 구입하는 임무를 아주 훌륭히 수행해 군구 수장의 표창을 받았다. 초연이 자욱하던 1946년 리영태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9년 8월, 새중국 창건을 앞두고 중앙군위에서는 륙군에서 련, 패급 간부와 각지 군정대학 학원중에서 비행사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료동군구 위생부에서 설립한 안동대약방에서 부기원으로 있던 리영태는 이 소식을 접하고 대담히 모집에 응시, 최종 합격선까지 갔다. 이렇게 되여 소학교 3학년 문화정도밖에 안되는 리영태는 온갖 곤난을 극복하면서 새중국 첫패의 비행사로 되는 영광을 지니게 됐다.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한후 중앙군위에서는 나젊은 새중국의 공군건아들을 파견하기로 결정, 리영태가 소속한 공4사는 1951년초에 항미원조전쟁에 투입되였다.

1951년 9월 25일,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 112대가 조선 신의주 상공으로 쳐들어왔다. 전투임무를 맡은 공4사는 전투기 114대를 선후로 반격에 투입시켰다. 리영태가 거느린 1대대 6대의 전투기는 제3제대로 편성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전투과정에서 리영태는 기타 편대와 련계를 잃고 고군작전하게 됐다. 이때 미군 전투기 4대가 이리떼처럼 리영태의 뒤를 쫓으며 공격을 들이댔다. 리영태가 부상당한 전투기로 간신히 적기를 명중하고 단추를 힘껏 눌렀지만 발포장치가 이미 적기의 포탄에 고장나버리는 바람에 벙어리가 돼버렸다. 급히 철수조치를 취하고 귀항하려는데 뒤에서 또 4대의 적기가 나타나 미친듯이 공격을 들이댔다. 리영태는 침착하고 랭정하게 부상당한 전투기를 조종하면서 끝내 적기를 뿌리치고 기지로 향했다. 무려 56곳이나 손상을 입은 전투기는 활주로를 100여메터나 벗어나서야 겨우 멈춰섰다. 전신에 상처투성인 리영태의 전투기를 보고 쏘련 우군은 《이것이 어디 비행기인가, 분명 땅크지.》 라고 하면서 감탄했다. 《공중땅크》칭호는 바로 이렇게 생겨났다. 전투가 결속된후 공군 수장은 《리영태동지가 30여발의 적탄에 명중된 비행기를 안전하게 기지로 몰고온것을 특별히 표창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항미원조전쟁에서 리영태는 선후로 4대의 미군 비행기를 격추하였으며 1등공 2차, 2등공 1차, 3등공 2차에 조선 자유독립훈장 2급, 국기훈장 3급을 수여받았다.

리영태는 공4사, 공1사, 공14사에서 선후로 비행 퇀장, 부사장, 사장을 담임하면서 각항 임무를 원만히 완수했으며 후에는 화북 모 군 부군장으로 있다가 1975년 7월, 등소평동지가 중앙군위사업을 주관할 때 무한군구 공군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그리고 1982년 11월, 54살에 나는 리영태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부사령원으로 승진하였으며 중장계급을 수여, 우리 군의 공군작전과 후근 및 특별전용기 보장사업을 친히 책임졌다.

1984년 공화국창건 35주년을 기념하는, 그동안 24년동안이나 중단되였던 열병식이 수도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거행되게 되였는데 리영태 부사령원이 공군열병대오지도소조 조장을 맡았다. 10월 1일 오전, 열병식을 거행하는 시각 북경의 날씨는 안개가 자욱해 가시도가 형편없어 여러 기종의 비행기가 동시 비행하기에 더없이 어려웠다. 그러나 공군열병대오는 산전수전을 겪어온 리영태장군의 지휘하에 최종 공중열병임무를 아주 원만히 완수했으며 장정발사령원은 천안문성루에서 전화를 걸어와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아주 만족해한다고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1987년 5월, 대흥안령에서 특대삼림화재가 일어나자 리영태 부사령원은 공군부대의 전화지휘를 맡았다. 그의 지휘하에 공군은 700여대의 비행기를 출동해 6000여명의 소방일군과 소화장비, 구제물자를 화재현장과 재해현지에 소송했으며 12차의 인공강우를 성공적으로 진행해 중앙군위와 국무원의 표창을 받았다.

2013년 4월 24일 화창한 봄날, 북경 공군사령부 영국식저택에서.

85세 《공중땅크》리영태장군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조국의 푸른 하늘이 있다.

1993년 12월, 65세의 리영태 부사령원은 48년간의 군인생활을 마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이라는 새로운 정치려정을 시작했다. 일터가 바뀌고 직책이 바뀌였지만 푸른 하늘을 날며 조국을 위해 혼신을 다하던 마음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8기, 9기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있는 기간에 선후로 20여개의 건의안을 제출했으며 그의 제의로 《중국민용항공법》이 수정, 보충되기도 했다.

리영태장군은 동년과 소년시절을 보냈던 고향 통화에 대해서도 잊지 않았다. 일찍 고향에 조선전쟁에 참가했던 분기식비행기 2대를 보내줘 전통교육에 사용하도록 했으며 통화현조선족중학교와 소학교의 어려운 사정을 접하고 거액의 기부금을 알선해주기도 했다. 2004년, 통화현조선족로인협회가 설립될시 리영태장군은 협회의 요청으로 로인협회 명예회장을 맡는데 선뜻이 동의하기도 했으며 로인협회에서 이런저런 곤난이 있어 힘들어하자 17차 당대회기간 친히 길림성 유관 책임일군을 찾아 도움을 부탁하기도 했다.

《요즘은 중국공산당 제18차 당대회의 보고를 학습하고있습니다. 개혁개방후 30여년 동안의 경제건설을 통해 우리 나라 공군에도 큰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중앙군위 새지도부의 정확한 령도하에 앞으로 공군에 더욱 큰 성과가 기대됩니다.》 85세에 나는 《공중땅크》ㅡ리영태장군의 마음속에는 항상 조국대지의 푸르른 하늘이 있다.


길림신문 리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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