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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의 대명사,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7월22일 09시37분    조회:9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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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정문

ㅇ2006년 3월 7일 길림신문사를 찾은 성인대 전임 부주임 리정문(중간사람).

ㅇ2006년 3월 7일 장백산잡지사를 찾은 성인대 전임 부주임 리정문(중간사람).

ㅇ길림신문 장춘이주 좌담회에 참가한 리정문부주임(왼쪽사람).

리정문 프로필

1940년 5월, 길림성 부여현에서 출생.

1961년 9월-1968년 2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습, 배치를 기다림.

1968년 3월-1978년 8월, 도문시 연변고무공장 로동자, 사무원, 간사.

1978년 9월-1981년 9월, 연변대학 조교, 강사, 조선족력사연구소 문학연구실 주임.

1981년 10월-1983년 10월, 연변대학당위 선전부 부부장, 부장.

1983년 11월-1989년 9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 비서장, 선전부장.

1989년 10월-1992년 12월, 연변주당위 부서기.

1993년 1월-1996년 1월,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비서장.

1996년 2월-2006년 2월,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

2006년 3월 퇴직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전임 리정문부주임은 수십년간 사업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수많은 미담들을 만든 간부로 이름나있다. 기자는 이번 취재에 리정문의 가족과 장춘에서 가까이에서 사업했거나 사업관계로 잘 알고있는분 8명을 만났는데 그분들이 리주임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았다. 그분들이 들려주는 토막토막 미담에서 한 훌륭한 당의 민족간부의 감동적인 모습이 우렷이 떠올랐다.

병환에 계시면서도

얼마전 본사 지도부성원들이 깊은 병환으로 입원중인 리정문을 뵈러 병문안을 갔다. 리주임은 자신이 길림신문 기획기사 《백년백인”에 선정되여 기자가 취재하련다는 말을 듣고 병환으로 말씀하기가 아주 힘들었지만 홍길남사장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해놓은 일이 없고 신문에 낼만한 일은 더욱 없소. 당의 사업과 조선족사회 발전에 응당한 기여를 하지 못한것이 가슴에 늘 걸리오. 나보다 많은 일을 해놓은 훌륭한분들이 많으니 그분들을 취재하오.》라고 하며 취재를 받으시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인물취재가 있을 때면 사회각계에서 리정문을 극구 추천하여 우리가 취재하려 했지만 리주임은 자신에 대한 수차의 취재를 번마다 거절하였다.

기사 풍지진은 이렇게 기자에게 말한다. 《리주임은 병석에서 잃어나지 못하면서도 저를 보고 ‘풍동무 나때문에 고생이 정말 많네. 미안하네. 인젠 그만 쉬게나. 저기 과일도 들라구.’ 하며 배려합니다.》밤중에 그는 옆방 환자의 휴식에 페를 끼친다고 이불을 덮어쓰고 낮게 기침소리를 내려고 안깐 노력을 다한다.

중병을 앓으면서도 이렇게 다른 사람을 우선 배려하는, 한평생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는분이 바로 리정문이다.

문단로장이 쓴 유명한 《석별의 노래》

중국 조선족문단의 거장 김학철, 항간에는 그에게서 칭찬을 받기란, 더더구나 간부가 칭송을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 김학철옹이 1993년 1월, 연변주당위 문교부서기로 있던 리정문이 연변을 떠나 길림성으로 발령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정서사시와 같은 그 유명한 글- 《정문이, 잘 가오”를 써 내심의 아쉬움을 한껏 토로해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그중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 연변에서 한 사나이가 떠나간다.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우리의 선전부장, 문교서기를 10년 동안 맡아보던 리정문이가 떠나간다. 불같은 열변으로 열렬히 부르짖은 사나이, 그 사나이가 떠나간다... 10년전의 궁상스런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이 사나이는 떠나간다... 줄줄은 알아도 받을줄은 모르는 사나이, 달랄줄은 더더구나 모르는 사나이, 그래서 밤낮 구차하기만 한 사나이, 이런 살림살이의 락제생이 떠나간다. 청렴의 대명사 같은 사나이...》

리정문은 김학철선생으로부터 《우리의 미더운 보호산”이라는, 그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은 두번 다시없는 진정어린 평가를 받았다.

《윤동무, 나 공짜밥 한끼를 얻어먹었소.》

1993년 1월, 리정문은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로 오게 됐다. 연변주중급인민법원 윤수범원장도 동시에 길림성인대로 전근하면서 두분은 한동안 숙소에서 한방을 쓰며 장춘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성인대로 온지 얼마 안돼 하루는 리정문이 연길로 갖다 와서 윤수범을 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윤동무, 말을 잘해도 공짜밥을 얻어먹을수 있겠더구만.》사연은 이러했다. 리정문이 연길로 출장갔다가 장춘으로 돌아오는 도중 안도현 경내에서 기사와 함께 아침식사를 잠간 하게 됐다. 한참 먹고있는데 다른 길손이 들어와서 또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리정문을 바라보던 그 손님은 《정말 반갑습니다. 저 이전에 리서기가 선전부장으로 계실 때 리서기의 보고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정치보고인데도 어찌나 감칠맛나게 하던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근데 성으로 전근했다면서요. 정말 아쉽습니다. 제가 한번 사게 허락해주십시오. 우리 조선족들에게 리서기와 같은 훌륭한분들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무조건 자기가 산다고 딱 잡아뗐다.

《리정문부주임은 복무원이였습니다.》

길림성인대에서 리정문은 선후로 비서장과 부주임사업을 했는데 함께 사업했던분들마다 리정문의 말만 나오면 이구동성으로 칭찬한다.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판공청 부주임, 래신래방국장을 지내다가 퇴직한 왕국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리주임은 성인대에서 비서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자신을 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자신을 낮췄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여러 부문을 련결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인대 임직원들의 뒤근심을 덜어주는 복무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비서장 자리에 있으면서도 인대에서 그 누가 일이 있으면 언제나 자기 일처럼 달려가서 도와줬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더욱 존경하였으며 우러러 봤습니다.》

《항상 겸손하신 고급간부입니다》

리정문의 겸손함은 남영전 전임 《장백산》잡지사, 길림신문사 사장을 통해서 잘 알수 있다.

어느 한번, 문학시상식 석상에서 자리배치를 놓고 고려하던중 남영전은 리정문을 모실 자리에 성정협 류희림부주석을 모셨다. 관례에 어긋나는 좌석배치에 리정문의 비서가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했다. 남영전이 리정문에게 원인을 간단히 설명하고 량해를 구하자 그는 연신 이렇게 말했다. 《동무네들이 참 잘 생각했소. 응당 이래야 하오. 류희림주석은 한족으로서 《장백산》잡지사를 위해 공로가 큰분이니 우리가 잘 모셔야 하오.》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는 학습형의 령도간부입니다.》

리정문의 신변에서 비서로 있은적 있는 우평은 이렇게 말한다. 《리주임의 학습능력은 정말 탄복해야 합니다. 같이 출장나가는 길에서 우리는 언제나 문제를 둘러싸고 사업토론을 했습니다. 문제가 떠오르면 리주임은 즉석에서 메모지에 적었으며 이것이 모여 하나의 좋은 대책이거나 한편의 훌륭한 문장이 나왔지요.》

《리주임은 또 가장 진실한 정황을 료해하려고 어디서나 노력했습니다.》어느 한번 비서 우평은 리정문을 따라 백성지구로 갔다. 도중에 그들은 그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고 차를 멀리쯤에 세워놓고 자신이 맡은 련계촌인 진래현의 한 마을에 들어섰다. 그는 촌민을 만나 이 마을에서 생활이 제일 어려운 집 3가구를 알려달라고는 그들을 한집한집 찾아 200원씩 건네면서 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수 있기를 바란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중에야 촌지서를 찾아 마을 정황을 알아봤다. 장춘에 돌아와서 우평이 그 600원을 결산해주려고 하자 그는 《내 개인의 명의로 드렸는데 그럼 안되지.》라고 하면서 되려 그를 교육하고 나섰다.

《리주임은 고생을 사서 하는분입니다.》

풍지진은 1993년부터 20년 동안 줄곧 리정문의 기사로 일해왔다. 한번은 리주임이 안질환때문에 북경으로 혼자서 치료받으러 떠났다. 이만한 위치에서 다른이들 같으면 앞뒤에 수행인원이 모시고 전용차나 비행기로 가련만 그는 침대표는 고사하고 좌석표도 없이 서서 가는 표를 겨우 사서 홀몸으로 렬차에 올랐다. 사평까지 서서 가는데 한 대학생이 리주임을 알아보고 왜 이렇게 서서 가시는가고 의아해서 물었다. 그래서 그가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하니 대학생은 편찮으신 몸으로 이거 너무 한거 아니냐며 렬차장을 찾아가 사연을 말해 자리를 구해드렸다.

《리주임은 휴식일이나 명절 같은 때 저를 쉬라고 절대 부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일이 있으면 택시를 리용했지요. 글쎄 저 정도로 심하게 아프시면서도 저보고 되려 미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보고 인젠 좀 휴식하라면서, 탁상우의 과일이랑 음료랑 들라면서 말입니다. 리주임은 정말 조련찮은분이십니다.》

《아버지는 하늘같은분이십니다.》

리정문의 아들 리무림은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감개무량해한다.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둔 그는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한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옛날에 어디로 출장가면 얼마 안되는 돈을 절약해서 저희들한테 꼭꼭 선물을 사오는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좀 철이 들자 아버지는 사람은 도리와 정 그리고 행동이 따라가는 인간이 돼야 한다고 항상 가르쳤지요. 커오면서 아버지가 저희들에게 야단치는것을 한번도 본적 없습니다. 언제나 인자한 모습으로 차근차근 도리를 일깨워줬지요.》

딸 리해단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으신지 새벽에 제가 일어날 때마다 탁상등을 켜놓고 앉아서 뭘 쓰기도 하고 조용히 사색에 잠겨있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글을 다 써놓고 가끔 어린 저와 ‘해단아, 제목을 이렇게 달면 좋을가, 아니면 다른걸로 바꾸는것이 나을가, 네가 생각하기엔 어떠냐.’ 이렇게 물어보시기도 했습니다. 어린 제가 뭘 안다고...저의 아버지는 이렇게 인자하고 상냥한분이랍니다.》

《여보, 우리도 한번 잘살아봅시다.》

《우리 집 량반은 전혀 손을 내밀줄 모르는 사람이랍니다. 우리는 쭉 가난에 습관된 생활을 해왔지요.》리정문의 부인,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한학급 동창인 한금옥은 남편을 이렇게 말한다. 6남매중 맏이로, 리정문은 관직이 어느 위치에 있든간에 자녀와 부모, 동생들을 위해 조직과 다른 사람들에게 단 한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남의 일에는 발벗고 나서는 그였지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도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일가친척에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찾아온 문상객들까지 합해 20여명 정도였다.

리정문은 자신의 생일도 딱 안해와 자식들과 함께 이렇게 조용히 한끼 식사로 끝마치는것이 전부다. 안해가 롱담삼아 《여보, 우리도 좀 당신을 믿고 잘살아보면 안될가요.》라고 말을 꺼내면 리정문은 정색해서 《우리가 막 나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소. 여러 사람들이 나를 믿고 이런 직위에 올려놨는데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실망해하겠소. 그래서야 어디 되겠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청렴의 대명사와 같은 사나이 리정문, 그는 바로 이런 한점 부끄럼 없는 사나이다. 그러기에 민족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리정문을 더더욱 탄복해하고 존경한다. 그야말로 청렴하고 정직하며 렴결봉사하는 당의 훌륭한 간부이며 훌륭한 민족간부이기에 손색이 없다.

/사진 신승우기자 찍음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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