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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음악의 정초자 정진옥과 불후의 명곡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7월30일 09시31분    조회: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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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정진옥

당대 중국조선민족음악의 정초자의 한사람인 작곡가 정진옥을 사람들은 천재적인 음악가라고 부른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들은 우리 민족 음악사의 영원한 멜로디로, 그가 남긴 음악주장은 후세대의 앞길을 비춰주는 불멸의 등대로 오늘도 찬연한 빛을 뿌리고있다.

전투장의 군악대 대장

정진옥은 1926년6월 조선경상남도 통영의 한 가난한 어부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어릴적 정진옥은 늘 먼 바다로 나간 아버지의 어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바다가에서 그물 뜨는 녀인들이 부르는 남도민요를 유심히 듣고 따라 불렀다. 어찌나 신통히 부르는지 오가는 어른들이 치켜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신동》이라 치하들 하였다.

어린시절 그는 통영바다가에서 리순신장군이 거북선으로 왜적들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으며 민족영웅에 대한 숭배로 가슴 부풀었다. 일제놈들의 수탈에 소작료를 물지 못한 아버지는 물매를 맞고 밤도와 가족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료녕성 무순탄광에 등짐을 풀었다.

 

1953년 제1차동북3성문예콩클에서의

녀성표현독창 《처녀의 노래》.

열세살나던 해 보통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는 우연히 공연을 관람하게 되면서 바이올린에 매료된다. 그러나 가정형편때문에 바이올린을 배울수 없게 되자 직접 외국인바이올린교수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여 학비도 없이 바이올린을 배워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독학으로 가요창작, 편곡법, 화성학, 복성학, 악기편성학, 악기특성 등을 정통하게 되며 열여덟살에는 봉천방송국 악사로, 무순협화악단 지휘자로 활동하게 된다.

 

1946년2월 정진옥은 참군하여 리홍광지대 (조선의용군제1지대, 동북민주련군 독립4사, 중국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선전대에 편입되 면서 군악대 대장, 음악고장, 선전대연구원을 맡고 총탄이 비발치는 전선에서 작곡가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이 시절 작곡한 《리홍광지대 노래》(집체 작사, 1946년. 3월), 합창《지뢰수 조성두용사》(왕자인 작사), 연극음악《민주련군 오는 날》(최정연 대본) 등 작품으로 전사들의 가슴에 멸적의 기세를 북돋우어주고 승리의 신념을 안겨주었다. 그는 대공 1차, 소공 3차 기입받는다.

1949년 7월부터 조선전장에 나선 그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 군악대 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작곡가로 근무하면서 3년간《자동차운전사의 노래》,《우리님 영웅 되셨네》등 우수한 작품을 작곡하여 세번이나 국기훈장을 수여받았다.

조선족음악의 세계진출에 첫문을 열다

정진옥은 몇년간 전선에서 야외천막과 습기찬 갱도에서 생활하면서 관절염과 페염, 기관지염 등 고질병에 걸려 1952년 후방으로 돌아왔다.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영화음악 《향토를 보위하는 사람들》과 같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면서 기량을 펼치던 그는 10월경 연변가무단으로 전근해왔다.그는 아픈 몸을 돌보지도 않고 연변가무단의 창립과 발전을 위해 로심초사하였다.

그는 선후로 음악교원, 부단장, 단장으로 사업하면서 본격적인 창작단계에 들어섰으며 민족전통음악이 존중받는 정진옥시대를 연다. 1953년 봄, 전우였던 최정연과 함께 불타는 창작열을 안고 이불짐을 싸지고 연변의 첫 새벽집체농장으로 간다. 거기서 지룡순이라는 처녀를 모델로 판소리형식을 현대판으로 개편하여《흰버선에 코신을 신고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를 받쳐입은, 갑사댕기 드리우고 봄나비처럼 춤추며 노래부르다가 익살꾸러기 총각흉내를 내는》신선한 예술형상을 수립한 《처녀의 노래》를 탄생시킨다.

1953년 여름, 동북3성문예경연대회에서 《처녀의 노래》(최정연 작사, 김인숙 노래)는 창작 1등상, 노래 1등상을 받았고 레코드에 취입되며 노래집에 실려 전국 나아가 외국에까지 소개되였다.

 

정진옥, 그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또 하나의 리정비적 작품이 있다. 중국조선족음악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인 교성곡《장백의 노래》는 조선족음악이 세계로 나아가는 첫 문호를 열어제낀 거작이다.

 

《장백의노래》는 1956년 김철시인과 합작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조선민족의 백년사, 폭넓은 투쟁의 력사적화폭을 추상적인 음악에 담아 표달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서 작사자와 작곡자의 공동한 형상체험은 아주 중요하다고 김철시인은 말한다.

제1장 첫머리에서《구름을 휘감아 몇천리/ 백설을 이고 몇만리/ 만리창공에 우뚝 솟은 장백산》 이 대목은 작사자와 작곡자가 함께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장백현으로 갈 때 서강이라는 고원에서 바라본 숭엄하고 신비로운 장백산의 형상으로서 둘은 거의 동시에 가사와 곡을 창작하였다고 한다.

안국민선생은《장백의 노래》의 음악형상에 대한 분석에서 《장백의노래》를 성공시킨데는 정진옥선생이 해방전쟁과 조선전쟁을 몸소 겪어왔으며 또 장백산지구의 항일근거지에 직접 내려가 진지하게 생활을 체험하는가운데서 민족의 력사에 대하여 , 인민의 투쟁에 대하여 심후한 감정과 불타는 격정을 지니게 되였기때문이라고, 또한 배우들과 연주원들에게도 그 진지한 감정과 격정을 전수하고 격발시키기에 큰힘을 기울렸기때문이라고 한다 .

1956년 7월 북경천교극장에서 열린 전국 제1차음악주에서《장백의노래》를 공연하기 직전 정진옥선생은 전체 공연자들에게 격정에 넘치는 선전고동연설을 하였다. 《우리의 성악배우와 연주원들은 비록 수자는 적지만 우리는 이제 백여만 중국조선족을 대표하여 그들의 고난사와 투쟁사를 노래하게 된다. 이 시각 우리 연변주의 지도자들과 인민들은 우리 공연의 성공적인 소식을 기다리고있다! 》

 
1956년 7월 전국 제1차음악주기간 천교극장에서 공연한 연변가무단의 교성곡 《장백의 노래》.

막이 오르자 전국 각지에서 온 음악가들앞에서 지휘자(박우), 배우(무대절반도 안된 30여명)와 연주원들은 작곡가가 심어놓은 감정세계와 완전 일치된 상태에서 고난에 시달렸던 인민들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렸고 전쟁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대신하여 웨쳤으며 해방된 인민들을 대신하여 환호하였다.

배우들 자신도 어디서 그런 함성이 터지는지 알수 없었다.그들은 모두가 눈물을 좔좔 흘리며 우뢰와 같이 노래를 불렀다. 청중들도 그 격정에 휩싸여 배우들과 같이 눈물을 흘렸다. 실로 예술의 힘은 무서웠다. 배우들은 자기가 배우라는것을 완전 잊은채 마치 장백고원에서 싸우고 승리하는 항일전사마냥 흉금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정서로 청중들을 매료시켰던것이다.

합창《장백의 노래》는 1956년 7월 제1차전국음악주에서 북경무대를 들썽케 만들었다. 단연 1등의 보좌에 올랐을뿐더러 중국조선족을 전국, 나아가 전세계에 널리 알리였다. 1957년 8월, 연변가무단은 중국을 대표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세계청년예술축전에 참가하였고 교성곡 《장백의노래》와 표현독창곡《처녀의 노래》(방초선 노래)로 은상을 수상하면서 중국조선족음악의 세계진출의 첫걸음을 떼였던것이다.

민족전통예술에 깊이 뿌리를 박고

정진옥선생은 연변가무단의 창립초기 배우들을 물색하기 위해 농촌에 직접 내려가 배우들을 물색하였고 중학교를 찾아다니며 졸업생들을 만나보았으며 그들에게 음악기초지식을 가르쳤다. 《예술은 불타는 정열의 산물》임을 그는 행동으로 가르쳤다.

그는 《민족음악은 인민들속에서 배워야 하며 우리 음악은 우리 풍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또 이를 창작주도사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해방전쟁시기부터 민요채보를 계속해왔는데 조선족마을에 찾아가 오락회를 하다가도 로인들이 부르는 민요를 채보하였으며 민요수집을 위해 집집마다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1963년 연변가무단 합창대와 함께 있는 정진옥단장(세번째줄 오른쪽 네번째)

그는《우리 민요는 선률이 맑고 은은하며 류창하고 사색적이며 다양한 민족의 심미심리가 반영되여있다》고,《세계명곡이 아무리 좋다 해도 우리 민족들속에서는 우리 민요를 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50년대초로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연변가무단에 있는 14년간, 그는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모방을 회피하면서 신선한 선률로 다양하고 특색있는 수많은 우수한 작품, 리정비적 작품을 내놓았다.

1963년 8월 제1차장춘음악주에서 공연한 교성곡 《싸우자 흑인형제들》도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고있다. 교성곡 《싸우자 흑인형제들》은 《장백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공연내내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자아내였다.

림성호가수는 그 작품의 창작과정을 돌이키며 정진옥단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너는 흑인령수야. 흑인분장을 하고 로동자옷을 입고 고실고실하게 머리를 하고 … 제2부는 〈가고싶은 고향》인데 모닥불 피워놓고 북을 치며 쟈즈음악절주에 맞춰 야이! 야이! 하면서 엉뎅이춤을 춘다. 요구라면 노래도 잘 부르고 랑송, 표현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그러나 제일 중요한것은 감정이야! 》《감정이야!》를 천천히 발음하면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던 그 눈길을 그는 언제까지도 잊을수 없었다.

 
1963년 8월 《장춘음악주》에서 공연한 《싸우자 흑인형제들》합창장면.

당시는 마침 모주석께서 미국 인종차별을 반대하여 싸우는 흑인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때라 공연이 끝나자 심양음악학원 원장 리겁부는 주간신문에 특별히 평론글을 내였다. 《이 작품은 또 하나의 거작이다. 60년대 시대성이 선명하고 예술조예가 깊고 높은 이런 작품이 창작된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이런 작품은 중국합창예술사에 영원히 남을 걸작이다…》

당시 대학교를 갓 졸업한 나어린 남저음가수 림성호가 주역을 맡았다는것은 인재양성의 주된 표현이 아닐수 없었다. 림성호선생은 인재를 발견하고 양성하기에 깊은 중시를 돌린 정진옥단장을 그리면서 연변가무단에서는 당시 젊은 청년예술인들을 용약 심양음악학원, 중앙악단 독일관현악지휘훈련반, 쏘련합창지휘반으로, 중앙음악학원, 상해음악학원, 조선류학을 보내 연변음악예술계의 일익을 담당하는 중견들로 키워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걸출한 작곡가 정진옥, 40년 가까운 창작생애서 그는 인민대중이 즐기는 다방면의 제재와 쟝르의 리정비적 음악작품을 남김으로써 중국조선족음악발전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박해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1981년 그는 55세를 일기로, 간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돐 기념 헌례도서 《우리 민족의 걸출한 작곡가 정진옥》)

길림신문 김청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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