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우리 민족사회에 길이 남을 소중한 문화유산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8월6일 09시36분    조회:1056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삼명

-우리 민족이 낳은 우수한 음악가 최삼명선생 그리고 작품들

위대한 시인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이 감동을 전해주는 시라면 위대한 음악가들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선보를 그려주는 아름다운 선률이다.

사람들속에 익숙히 알려져있는 《논물관리원》이나 《내고향 오솔길》은 문화부 대상, 전국소수민족 회보공연 우수상을 받은 아름다운 선률인만큼 지금도 대중들속에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노래의 작곡가는 국가1급 작곡가인 최삼명선생이다. 퇴직한지 오래되지만 최삼명선생은 지금도 《음악창작》특약편집위원,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회장,연변문련예술위원회 위원, 연변피아노협회 명예회장 등 사회직무를 짊어지고 여생을 뜻깊게 보내고있다.

음악을 즐기던 농가소년에서 체계적인 음악인으로

최삼명선생(81세)은 흑룡강성 밀산시 대성촌 태생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던 최삼명선생은 동명촌문공단이 설립되자 어린 나이에 촌문공단의 독창가수 겸 합창지휘로 활약하면서 의용군, 독립군과 팔로군의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참가한다. 1947년 동북민주련군에 입대한 최삼명은 부대의 행사 때마다 무대에 올라 바이올린 등 악기로 음악반주를 하여 인기를 모으게 된다.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인차 발견되여 1949년 17세의 나이에 당시 중국에서 유명한 로신문공단 제2단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관악대 튜바연주자로 되었다.

2012년《최삼명작곡선집》출판기념회에서의 최삼명선생.

1950년 1월, 로신문공단에 있던 28명 조선족예술인들이 연변문공단과 합병하면서 최삼명은 연변문공단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원으로 있으면서 음악조 행정분조장, 악대분대장으로 활약하였고 동시에 악대를 위하여 편곡도 하였다. 이 시기 그의 처녀작인 동요 《병아리》가 연변인민출판사의 《아동가곡집》에 발표되고 가요 《쇠목차간의 노래》가 무대에서 공연되는 등 18살 어린 나이에 작곡가의 싹수를 보였다.

그러던 그한테 출국류학의 기회가 생겼다. 조직의 파견으로 최삼명선생은 1955년 8월부터 1959년 8월까지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였는데 해방후 처음으로 서양 음악리론과 조선전통음악을 체계적으로 장악한 음악인이였다. 류학기간 그는 조선민요도 배웠고 조선민족 전통음악인 판소리도 배웠다. 특히 그가 창작한 교향시 《해란강》, 현악4중주 《행복》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공연되고 《해란강》은 조선중앙방송에 방송되였으며 바이올린독주곡 《목가》 및 몇수의 노래가 조선의 음악출판물에 실리기도 했다.

음악을 위해 내린 결단

1959년 10월 조선류학을 마친 최삼명선생은 귀국후 선후하여 연변예술학교 작곡교연실 주임, 연변가무단 창작평론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900여수(부)의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는데 그중 남고음독창곡 《물길따라 천리길》, 《친선의 물결》, 《사과배 따는 처녀》는 60년대 최삼명선생이 작곡한 대표적작품이였으며 이런 노래들은 대중들속에 널리 알려지고 지금도 불리워지고 있다.

최삼명선생은 원래 지독한 애연가였고 술군이였다.

《나는 선생의 집에 가서는 그의 담배통에 버릇없이 손을 대군 했다. 그때 그는 담배를 피우고 술도 굉장히 마셨으며 최주정뱅이란 별명도 달고 있었다.》이는 리상각시인이 최삼명선생과의 인연을 이야기 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듯 술담배를 즐겼던 최삼명선생이였지만 음악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과감히 포기할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나이였다. 1970년 병원으로부터 간경화복수와 신염복수라는 무서운 진단을 받게 되자 최삼명선생은 자기를 반성했다. 나라의 덕분에 류학까지 갔고 그토록 음악에 애착을 갖고 있는데 건강을 해치는 술담배 때문에 음악의 길을 접고싶지 않았다. 최삼명선생은 아예 술담배와 담을 쌓고 병치료에 전념하는 한편 건강에 도움되는 낚시 등 취미운동으로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때는 분재에 재미를 붙이고 근예작품이 될만한 나무뿌리를 찾아 산에 자주 오르고 낚시하러 저수지를 자주 찾군 했다.

음악에 대한 집착과 이를 위한 건강찾기로 최삼명선생은 왕성한 창작활동을 맞이하게 된다. 그중 특기할 작품이 아마도 당시 노래할줄 아는 연변사람들이라면 한두번쯤은 다 흥얼거렸던 노래 《내 고향 오솔길(황상박 작사)》, 《두루미(리상각 작사)》, 《왜 물어보나(김태갑 작사)》, 《눈이 내리네(김동진 작사)》 등 다수의 작품일 것이다. 이런 노래들은 폭넓은 대중성으로 하여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음은 물론 지금도 널리 불리워지고 있다.

가극창작의 리정비적 작품 《아리랑》

최삼명선생의 60년 음악인생에는 대중가요뿐만 아리나 교향곡, 무용곡, 대합창조곡 등 예술성, 대중성, 민족성이 짙은 력사적, 시대적인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가극 《아리랑》은 《우리 나라 가극창작의 리정비》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아리랑》에는 당시 연변가무단 창작평론실 주임이였던 최삼명선생을 비롯한 우리 민족 음악인, 예술인들의 정성과 심혈이 그대로 담겨져있다. 최삼명선생은 안국민, 허원식, 최창규 등 작곡가들과 함께 세번 실패끝에 이 작품의 음악창작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제2회 전국오페라견학공연에서 유일하게 우수상을 수상했고 중국문화부 제1회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2012년《최삼명작곡선집》출판기념회에서의 최삼명(오른쪽 두번째)선생.

그동안 최삼명선생은 선률이 아름답고 민족풍격이 짙으며 시대특징이 짙고 민족 심미감에 맞는 수많은 음악작품들을 창작해내였다. 그는 선후하여 교향시 《해란강》 C대조 바이올린협주곡, 관현악조곡 《장백봉화》등 기악곡, 《장백의 봉화》, 《아리랑》(합작) 등 가극, 《친선의 물결》(집체창작), 《양금월》등 가무극, 《형제봉의 노래》(합작) 등 무용극, 《심청전》등 연극음악, 《첫봄》, 《민들레》, 《아리랑》 등 영화, 텔레비죤드라마 음악, 《모택동송》 등 대합창 및 《홍매송》, 《논물관리원》, 《삼천리강산》, 《눈꽃》 등 무용곡을 비롯하여 《조국은 어데가나 살뜰하였네》, 《사과배 따는 처녀》, 《물길 따라 천리길》, 《두루미》, 《왜 물어보나》, 《내고향 오솔길》, 《눈이 내리네》 등 예술가곡을 포함한 900여수의 가요를 창작했다. 이같은 작품들 가운데는 국내외콩클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도 수십편 된다. 그는 또 《내 고향 오솔길》, 《최삼명작곡집》도 펴냈다. 최삼명선생은 1991년 길림성정부로부터 대공을 기입받았고 1999년에는 중국세기예술금상 평의위원회로부터 유일한 조선족음악인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80세를 넘긴 최삼명선생, 최삼명선생이 작곡한 더욱 많은 노래들을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최삼명선생이 남긴 음악작품들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문화자원으로 문화유산으로 길이길이 빛을 발할것이다.

참고문헌: 《문화시대》2012. 2월호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대학에서 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공기를 마시고 살지만 선생은 연변대학, 연변조선족을 호흡하며 사는구나…》 이는 한국의 중국통 동훈선생이 박문일교수의 80세 생일에 보내온 축사의 한 구절이다. 외유내강형의 평생교수로 불리는 박문일교수는 연변대학의 전임교장으로 중국의...
  • 2013-07-01
  • [고마운 한국인] (주)국제 미다스 스포츠 유승호대표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 유승호대표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압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잘 알기때문에 가능한거지요. 때문에 남을 위하는 일은 돈도 돈이겠지만 우선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주)국제 미다스 스포츠 유승호 대...
  • 2013-07-01
  • 《학급에 가족사랑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몇몇 있어요. 한 학생은…》 말을 채 잇지 못한채 김옥란선생님은 한창이나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학교와 학생들을 항상 첫자리에 놓는 그는 언제 어디서나《학생들의 일이 가장 큰 일, 중요한 일》이고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숙사로 이사와 ...
  • 2013-06-30
  • 혼례는 인생의례의 일종으로 신랑, 신부가 사랑의 백년가약을 맹세하는 신성한 자리이다. 사회의 변혁속에서 우리 민족의 혼례는 새로운 변화양상을 보여왔는데 그중 주목해야 할 변화가 결혼사회자의 출현이다. 요즘 행사 사회자를 보는 연변전통례절문화원 홍미숙원장의 시각은 남다르다. 1990년, 도문시가무단에서 공연...
  • 2013-06-28
  • -길림신문 오기활기자와의 인터뷰   오기활 략력 1947년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달라자촌 출생 1974년 연변농학원 축목수의학부 졸업 1986년 연변대학 정치학부 졸업(통신학부) 1974~1984년 도문시 홍광향축목수의소 소장, 홍광향 당위 선전위원, 조직위원, 경제위원회 부주임, 도문시당위 정책연구실 연구원 1984~20...
  • 2013-06-28
  •      여기, 고래희의 문인 한분이 있다. 본명인 림국웅보다는, 시인 한춘이나 평론가 산천으로 더 익히 알려진 그는, 중국 북방조선족문단의 태두요 중국조선족시단의 현대시 기수이다. 담배와 술과 사랑과 문학만을 고집하며 70 평생을 살아오신 그는, 요즘 암투병 중에도 시집과 수필집을 북경에서 펴내는...
  • 2013-06-28
  • 프로필: 1964년 길림성 사평시 리수현 리수농장 출생, 1988년 동북사범대학 졸업후 심양대학 배치, 공안사업에 대한 애착으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동북사범대학 공안교육학 석사학위 전공, 졸업후 특수인재 신분으로 중국형사경찰학원에 전근, 2003년 공안부에서 주최한 전국경찰실무전술훈련반 참가, 2003년 향항에 가...
  • 2013-06-28
  • 박규찬은 연변대학의 제2임 교장이다.   1955년 5월, 주은래총리는 박규찬을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그의 령도재능에 대한 충분한 긍정이고 금후 대학사업에서 더욱 큰 공헌을 할것을 바라는 신임과 기대였다. 박규찬은 연변대학의 교학사업과 연구사업에 모든 심혈을 기울인 교육자였다. 박규찬은 조선...
  • 2013-06-28
  • 건축업으로 번 50만원 예술단 창단과 운영에 투입   진달래예술단 총감독 채규억 《저분이 예술에 투자하는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라오. 정말 보통사람이 아니라니깐…》 훈춘사람들은 채규억(62세)씨를 놓고 이렇게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채규억씨가 바로 2010년 10월에 훈춘시진달래예술단을 창단하고...
  • 2013-06-27
  • #1. 걷기가 목적이 된 시대를 산다   지금 있는 자리와 가서 닿으려는 자리의 간격, 그곳으로 가야 하는 목적이 있을 때 비로소 걷는다. 오랜 역사 동안 걷기는 수단이었다. 걸어가서 말하고 걸어가서 전한 것들이 모여서 세상을 움직였다. 세상은 빠르고 편해졌다. 두 다리를 쓰지 않아도 당신을 저 먼 곳으로 데려다...
  • 2013-06-2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