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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녀》, 해변가에 진달래로 피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0월4일 23시00분    조회:9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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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방화

—조선족작곡가 방화에 대한 이야기

 

 
작곡가 방화
아름다운 해변도시 대련에는 우리 민족의 문화예술사업을 위해 혼신을 불태우는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대련 금주신구조선족문화예술촉진회 회장직을 맡고있는 조선족작곡가 방화(方华)녀사이다.

망망한 바다 저 멀리에

갈매기 한마리 날고있네

파도치는 물결 헤가르며

몽롱한 어둠속을 뚫고나가네

찬바람도 폭우도 헤아림없이

어제도 오늘도 힘차게 날고있다네

힘차게 앞으로 날고있다네.

삶의 역경을 헤쳐나갈 굳은 결의로 충만된 이 노래는 방화녀사가 작사, 작곡한 노래 《갈매기 한마리》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꿈을 키운 《봉천녀》

방화(원명 방명옥)는 1949년 12월 29일 심양에서 태여났다. 도문에서 심양으로 출장갔다가 업고온 귀여운 손녀에게 그의 할머니는 《봉천녀》라는 애명을 달아주었다.

봉천녀는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류달리 우렁찼다. 소학교 1학년때 선생님이 배워준 《아가야 나오너라》라는 동요를 선생님의 풍금반주에 맞춰 불렀는데 어찌나 잘 불렀는지 전 학급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동년시절 방화는 부모를 따라 길림성 서란현, 흑룡강성 녕안현(현재 해림시), 길림성 영길현, 흑룡강성 오상현 등지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식구까지 많다보니 생활이 째지게 가난하였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우수한 학생으로 소문높았다.

녕안현건설소학교 4학년때 음악선생님이 《방명옥학생은 장래에 꼭 훌륭한 인민의 음악가가 될거예요》라고 한 칭찬은 나어린 방화의 심령속에 음악의 씨앗을 깊이 묻어놓았다.

오상현 향양중학교를 다닐 때 그가 문오위원을 맡은 5반은 전교에서 문오우수학급으로 소문이 났었다. 그는 과외시간을 리용하여 동학들을 이끌고 피리, 하모니카, 얼후 등 악기연주법을 배웠다. 집이 학교와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방화는 매일 아침 일찍 학교로 떠났는데 방과후 집으로 돌아오면 늘 어두운 밤이였다. 왕복 36리길을 걸어다니면서 학교로 오갔지만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종래로 지각이나 조퇴를 한적이 없었고 힘들다고 투정부린적은 더구나 없었다.

마음씨 착한 방화는 집과 이웃들의 생필품 사는 심부름은 자기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교에서 과당시간이면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강의를 열심히 듣고 점심시간이나 방과후시간을 리용하여 동네 심부름을 하였다. 그는 늘 많은 짐을 지고 라림하 강변길을 따라 노래를 부르면서 귀로에 올랐다. 이웃들은 《명옥이는 참말로 사막에서 짐 나르는 즐거운 락타로구나!》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말이면 그는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 팔아 학교의 식사비를 해결하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방화는 자기를 학교에 보내주는 부모에게 너무나 감사했고 그만큼 배움의 기회를 소중히 여겼다. 환경이야 어떠하든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쁨이 넘쳐났다. 그는 늘 학교를 가면서도 코노래를 흥얼거렸고 기분이 좋으면 목청을 돋구어 자기가 부르고싶은 노래를 불러대군 하였다. 등하교길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전선줄이 내는 잉-잉 바람소리거나 수림속 상공을 스쳐지나는 윙-윙 바람소리는 그에게 한수의 아름다운 노래로 들렸다.

아름다운 꿈은 늘 그를 스쳐갔다

그무렵 방화의 일생에 아픔으로 남은 몇가지 일이 생겼다.

1964년 겨울, 방화는 오상현 중소학생노래시합에서 《모주석의 빛발》과 《누구나 자기 고향을 좋다 하네》라는 노래를 불러 두각을 나타내게 되였다. 몇달후 현과 성의 해당 부문 책임자들이 향양중학교에 왔는데 방화는 그들 앞에서 가극 《류호란》의 삽곡과 《누구나 자기 고향을 좋다 하네》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이튿날 그는 《할빈의 여름음악회》 대원으로 선발되였다는 정식 통지를 받았다. 그가 이 기쁜 소식을 부모에게 알렸지만 당시의 세속적인 관념과 가정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특수한 가정환경때문에 부모의 반대를 받았다. 음악재능을 마음껏 꽃피울 꿈은 이렇게 깨지고말았다.

1966년 5월, 방화는 오상현문교국과 향양중학교의 추천으로 중앙음악학원 부속중학교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였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이 일을 알게 된 음악교원 려조빈(呂兆斌)은 적은 월급을 타면서도 량표 8근을 꺼내 방화에게 주면서 공부를 잘하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기회는 늘 방화를 빗겨갔다.

가정의 전통적인 관념과 가정경제생활의 어려움, 거기에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이런저런 력사적인 문제로 아버지가 조사를 받게 되자 그는 부득불 음악의 꿈을 꽃피울 절호의 기회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 일은 방화에게 평생 유감으로 남았다. 지금도 그의 책상서랍에는 색바래고 구겨진 입학통지서가 정히 보관되여있다.

1966년 겨울, 심양군구에서 향양무장부에 와 녀병사를 모집하게 되였다. 그때 방화는 학교에서 성립한 《문예선전대》 대장책임을 맡고 선전대를 이끌고 경상적으로 하향하여 《충성무》를 보급하고 모택동사상을 선전하는 등 빈하중농을 위해 공연하면서 모주석의 훌륭한 전사로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연고로 남먼저 녀병사합격자 명단에 들었던 방화는 또 가정의 《력사문제》때문에 락방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69년 8월, 오상현문화관의 책임자와 성문예부문의 책임자 및 연변예술학원의 전화자선생님 등 4명의 전문가들이 특별히 향양공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사처에 수소문한 끝에 끝내 편벽한 두메산골에 있는 한족소학교에서 여름방학 당직을 서고있는 방화를 찾아내였다. 그들이 온 목적은 연변예술학원 성악계 학생모집판공실을 대표하여 일부러 방화를 찾아 면접하고 학생모집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방화는 이미 결혼한 몸이였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지난 8월 25일, 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려주고있는 방화녀사.

음악창작의 길에 들어서다

방화의 첫 음악작품은 1967년 봄, 모내기철에 창작한것이다. 그해에 혹룡강조선말방송국과 할빈시조선족문화관은 공동으로 문예선전대를 성립했다. 선전대는 26명으로 무어졌는데 전 성 농촌이나 공장, 탄광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연하였다.

당시 흑룡강조선말방송국 리갑송국장이 선전대 대장을 맡았고 리승권선생이 연출을 맡았다. 오상현 민락, 배음하(背阴河) 등 지역에 하향했을 때 공연이 끝난후 촌에서는 녀성들을 동원하여 찰떡에 국수를 장만하고 막걸리로 선전대를 대접하였다.

석도산아래 라림하의 물이 어미지향을 적셔 흐르는 그림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리갑송대장이 여러 대원들에게 각자 장끼를 발휘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할것을 창의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에 매혹된 방화는 격정이 솟구쳐 그 자리에서 《라림하, 고향의 강》이란 노래를 쓰게 되였다.

몇달간의 《문예전사》 생활을 마치고 방화는 다시 두메산골에 있는 한족소학교에서 민영교원사업을 계속하게 되였다. 그 시절에는 음악교과서를 구하기 힘들어서 그는 자기절로 노래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배워주었다. 《초원의 어린이들》이란 노래는 그때 보았던 영화 《룽메이와 위룽》을 본후 감동되여 가사를 쓰고 곡을 달아 만든것이다. 이상 2수의 노래는 그 당시 발표하지 않았지만 후에 재수정하여 1995년 첫 작품집(88수)을 출판할 때 함께 수록하였다.

방화의 업여창작생애가 시작된 곳은 흑룡강성 오상현이다. 그는 지금도 늘 고향의 산과 물, 일초일목에도 감사의 마음을 품고있으며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정을 금할수 없다고 한다. 오상현문화관의 오요증(吳耀增) 등 명문음악학교를 졸업한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과 영향하에 그는 날따라 창작수준이 제고되였다. 문화관에서는 해마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문예양성반을 꾸리고 또 《오상문예》월간을 꾸렸는데 양성반의 통지를 받으면 아이를 업고 산 넘고 강을 건너 걸어서 다녔는데 비오는 날이면 맨발로 20리 길을 걸어다녔다.

음악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그는 할빈, 연변, 상해 등 지역의 음악창작양성반에 다니면서 《인민음악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편달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편도선수술을 받은후 성대가 상해 더는 노래를 부를수 없게 되였다. 방화는 가수의 꿈을 접고 가곡창작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는 전문가들과 직접 대면하여 강의받는 수업반과 통신교육학습을 결합하는 두가지 방식을 취하여 밤에 낮을 이어 고심히 음악창작에 달라붙었다. 그는 1982년 길림성예술학원연변분원 대학졸업증을 취득하였다.

1988년, 방화는 《하해》하여 대련개발구에 있는 료녕성대외무역수출입회사 한국부 부장으로 사업하다가 1992년에 보세구풍예경제무역유한회사를 설립하였다. 1998년에 그는 모든 자금을 중한합작회사 《무기도료》생산공장에 투자했다.

금방 대련에 갔을 때만 해도 동산소구역과 신교(新桥)소구역 부근에 점차적으로 주민아빠트가 건설되고있었다. 방화는 여러가지 난관과 애로를 헤쳐나가면서 마침내 자기에게 속하는 사업과 경제적 공간을 마련할수 있었다. 교육사업으로부터 자주창업에 이르기까지 배역은 바뀌였지만 친히 겪은 인생에서의 실패와 성공, 사업경영중에서의 가늠키 어려운 풍운조화속에서 그는 인생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견정한 의지를 굳히게 되였다.

사업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음악창작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줄 몰랐다. 개발구에 금방 와서 맞는 겨울의 어느날 저녁무렵이였다. 창밖에서 푸실푸실  함박눈이 내리고있었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를 보면서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잠겼다. 그는 즉시 종이에 그 감수를 적고 거기에 곡을 붙였는데 몇십분사이에 《눈꽃련정》이란 노래가 완성되였다. 이 노래도 후에 수정을 거쳐 1995년에 출판된 88수 노래집에 수록되였다. 이 노래는 2012년 초겨울 연변텔레비방송국(김선희가수의 독창) 매주일가로 방송되여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는 노래로 되였다.

방화의 노래에는 분발하고 진취하게 하는 힘이 들어있다. 《남극용사의 노래》는 박춘미(방화의 딸)가 작사하고 방화가 작곡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여러차례 겨울철 극한에 도전하여 세계기네스기록을 세운 남극용사 왕강의(王剛義)를 위하여 2001년에 창작한 노래이다. 이 노래에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에피소드 하나가 들어있다.

2001년 12월 22일, 방화는 왕강의의 위탁을 받고 대오를 거느리고 《겨울철한강횡단》행사를 기획하고 조직하였다. 왕강의는 수영도중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때 대련에서 간 응원팀이 《남극용사의 노래》를 방송했다. 왕강의는 이 노래를 듣고 순간적으로 힘을 얻고 끝내 도전에 성공했다. 당시 한강의 물온도는 1도, 바깥기온은 령하 8도, 헤염거리 1200메터, 강물지속시간은 27분 23초였다고 한다.

사회활동과 음악창작의 쌍풍수를 거두며

방화는 자주창업으로 기업을 경영하면서 일정한 경제토대를 마련하게 되였다. 그는 네 딸의 뒤바라지를 하느라 많은 지출이 늘어났지만 자신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였다. 그는 1992년부터 현재까지 대련시 조선족문화예술관, 조선족학교, 로년협회, 개발구 각 로년협회, 원 개발구조선족친목회, 금주신구조선족문화예술촉진회 등 단체에 아낌없이 자기가 땀 흘려 번 돈과 퇴직금을 협찬했다.

특히 가슴 아팠던 자기의 이야기가 다시 재연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기로 작심했다. 그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대련민족학원의 어려운 학생들을 후원했다. 후에는《방화장학금》을 설립하여 해마다 15명(그중 조선족학생 8명)의 학업과 품성이 우수한 학생(가정경제상황이 어려운 대학생)을 후원함으로써 그들이 역경중에서 분발할수 있도록 떠밀어주었다.

방화는 특히 문화사업에 많이 협찬했다.

1996년 대련시 문화국, 문련, 무용협회와 공동으로 주최한 《방화컵》 소년아동무용콩클과 1999년 대련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주최한 《방화컵》 조선족청년가수콩클을 협찬했고 1997년 9월, 중국음악가협회,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와 공동으로 송일, 김영철, 림정 등 5명으로 구성된 《국제국내조선족수상자 독창독주음악회》의 협찬과 천명의 관중을 조직하는 등 모든 행사를 조직했다. 1997년 《연변불로송예술단》의 대련개발구에서의 공연을 협찬하고 천명 관중 공연관람을 조직했다...방화녀사가 민족문화발전사업에 협찬한 차수와 현금액수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퇴직후 방화녀사는 문화예술단체를 조직, 많은 사회활동에 참가하여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 2008년과 2009년, 선후로 대련개발구조선족로년협회의 위탁을 받고 협회의 예술단을 함께 령솔하여 한국 서울국제로년문화예술제에 참가하여 은상과 인기상을수상했다. 2009년에는 대련개발구조선족문화예술활동쎈터를 설립하여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2011년에는 활동쎈터의 예술단을 이끌고 료녕성조선족로년문예회보공연에 참가하여 은상을 수상했고 2012년 9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국제로년문화예술제》에 참가하여 《대련아리랑》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방화녀사는 교육사업과 문화사업에서 열심히 땀을 흘린 보람으로 많은 영예를 받아안았다. 일찍 오상현 《3.8붉은기수》, 전 현 녀성사업《선진개인》,《송화강지구선진문화사업자》 등 영예를 지녔다.대련지역에서 문화사업과 사회기여 면에서 따낸 영예는 또 헤아릴수 없이 많다.

《대련시민족문화특수공헌상》(1996년), 대련시 제4차 조선족민속절 민족문화사업특수공헌상(1996년), 대련시 우수공산당원(1995년, 1996년), 대련시 10대 우수공산당원(1996년), 대련시 제4차 민족단결진보 선진개인(1998년), 중국 주한국 대사관의 중한문화교류우호사절(2001년)...

방화녀사는 음악창작에서도 풍성한 성과를 따내였다.

1967년에 첫 작품을 발표해서부터 1970년도-1989년사이에 《흑룡강노래》, 《은하수》, 《송화강》, 《로년생활》, 《오상문예》 등 각급 간행물에많은 음악작품을 발표하였고 1990년부터 현재까지 중국국제방송국, 흑룡강조선말방송, 연변인민방송, 연변텔레비죤방송 등 미디어를 통해 많은 작품들이 방송되였다. 지금까지 그가 창작한 음악작품은 200여수에 달한다.

1995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첫번째 작품집《방화작곡집》(88수)을 출판하였고 이듬해에는 길림민족음악영상출판사에서 방화작곡집(18수 가곡테이프)를 출판했다.

1997년 《작은 조가비의 노래》가 중외아동합창가곡정선(精選)에 수록되였고 《어머님의 사랑》이 전국소수민족라지오텔레비방송 가곡 2등상을 수상했다. 《심산속의 오두막》은 제3차 전국조선말방송텔레비죤우수프로 2등상을 수상했다. 《남극용사의 노래》는 2001년 흑룡강방송 가곡창작 1등상을 수상했으며 《시내가의 고운새》와 《비둘기》는 2005년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주최한 중국조선족동요창작대잔치에서 금상과 2등상을 수상했다. 2013년《조국의 영원한 부강을 위하여》는 문화부소속 중국대중음악협회의 《2013년 아름다운 중국-대형음악전시공연활동뭇별성전(盛典)》에서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지녔고 노래 《저녁노을》은 중국아동음악협회의 《중국을 감동시킨 새창작가곡가사평선활동》에서 우수상 수상했다…

2012년 12월 중국문련출판사에서 출판한 두번째 방화작곡집

2012년 12월, 210수의 노래를 묶은 두번째 작곡집《방화작곡집》을 중국문련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작곡집에는 조선말노래 150수와 한어노래 60수가 수록되였다. 평론가 최삼명선생은 이 작곡집 머리말에서《…조선에 녀류작곡가 문경옥이 있으면 중국엔 조선족 녀류작곡가 방화가 있다… 그는 대련상공에 높이 떠 반짝이고 지지 않는 새별마냥 밝은 빛을 뿌리고있다》고 평가하였다. 중국조선족 저명한 작곡가인 동희철선생은 방화의 첫번째 작곡집 머리말에서 《방화의 한어말음악작품들은 곡조의 진행으로 보나 격식에서나를 막론하고 빈틈없이 째인 작품들이 대다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국가1급 작곡가이며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회장인 장천일선생도 《방화의 음악작품은 부드럽고 우아하여 사람들을 매료시키며 비교적 강한 감화력이 있다. 그는 음악창작면에서 매우 실력있는 작곡가이다》라고 평가한바 있다.

2013년 1월 18일,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흑룡강조선말방송국, 료녕성조선족음악연구회, 대련시조선족문화예술관, 대련금주신구당공회위원회선전부, 교육문화체육국, 문학예술련합회, 대련금주신구조선족문화예술촉진회의 공동주최로 《방화음악작품콘서트》가 대련신구개발구 대극장에서 성공리에 개최되였다.

2013년 1월 18일에 개최된 《방화음악작품콘서트》의 한 장면

중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이며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리사, 료녕성조선족음악연구회 부회장, 중국문화예술협회 대련금주신구영화텔레비죤예술가협회 고문으로 일하는 방화녀사는 현재 대련 금주신구조선족문화예술촉진회 회장, 금주신구조선족문화예술단 단장 등 직책을 맡고 민족의 문화사업을 위해 열심히 황혼의 빛과 열을 다 바쳐가고있다.

길림신문 글/사진 김태국기자, (룡정)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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