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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 울려 퍼진 가극 ‘아리랑’, 항일의식 고취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1월18일 12시49분    조회: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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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한유한

‘예술구국(藝術救國)’. 이 짧은 문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조성환 선생이 독립운동 동지였던 한흥교의 아들인 항일음악가 한형석에게 ‘예술을 통해 나라를 구하라’며 내려준 훈구다. 먼구름 한형석은 한일강제병합이 강행됐던 1910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불운한 해에 태어난 그의 삶은 청소년문화예술운동에 100년의 가교를 놓았다. 그것은 한일병합의 역사가 짓이겨놓은 식민지 조선의 삶을 극복해가는 과정이었다.

 

   
▲ 한형석 젊은 시절
한형석(韓亨錫 1910∼1996) 선생은 ‘먼구름’이라는 보기 드문 한글 호를 쓴 일제 강점기 광복군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예술가였다. 중국 국민당 군대의 장교로 전투에 참전하고 광복군으로 한미합동 OSS 특수공작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아리랑>을 작곡했고, 항일운동을 위한 군가를 만들어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압록강 행진곡>을 남기기도 했다. 문화예술투쟁에 독보적 존재였던 것. 해방 후에는 부산의 자유아동극장 등의 예술교육을 통해 청소년 예술교육의 터전을 닦은 문화예술혁명가였다. 그는 부산 최초 국립극장인 문화극장 등을 세우고, 문화예술 교육에 이바지했다. 아울러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장개석을 비롯한 대만정부 수립 인사들과 교류한 국제적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한형석의 생애
한형석은 1910년 부산 동래군 동래읍에서 한흥교과 이인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흥교는 일본에 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진보적인 중국 유학생들과 함께 중국에 가서 손문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선진적인 활동에 종사했다. 중국국민당원에 가입했고, 경사전용병원의 의관으로 있으면서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경제지원을 했다. 한형석은 5살 때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한흥교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가 그 뒤 3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예술을 통한 구국활동을 펼쳤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학공부를 하라고 했으나 당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조성환과 상의하고 상하이신화예술대학교 예술교육학과를 1931년 졸업했다. 이후 당읍현 무훈중학교의 음악교원 겸 영어교원을 배치 받았다. 이 학교는 농촌에 있는 중학교였는데, 얼마 후 산동행정인원훈련소 교감 겸 산동성립여자사범부속소학교 교원으로 전근했다. 그는 여자사범부속소학교에 아동극장을 창설하고 진보적인 예술활동을 펼쳤다. 이때 한형석은 이름을 한유한이라 고쳤다. ‘한국을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은 ‘한유한’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그는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거쳐 한국광복군 제2지대(지대장 이범석 장군)에서 활동했다. <광복군가집> 1·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1944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작곡과 가극활동을 계속하여 침체된 무장항일투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45년 8월 11일에는 김구 주석, 지청천 총사령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서안에 왔을 때 그가 작곡한 가극 <동포들은 우리를 기다린다>를 공연해 환영을 받았다. 이후 1945년 9월부터 1946년 1월까지 광복군 제2지대 산동 제남지역 특파원으로 파견돼 일본군 투항군 가운데 한국인 인수와 교포 보호사업을 맡았으며, 1946년 2월부터 1948년 7월까지 산동대학 예술지도로 근무했다. 광복 후인 1948년 한국으로 돌아온 한형석은 부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중국에서의 활동은 함구한 채 1996년 부산 부민동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형석은 숨을 거둘 때까지 아버지 유품이었던 태극기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가슴 벅찬 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 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우리는 한국 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 ‘압록강 행진곡’

 

   
▲ 광복군 제2대대 단체사진
이 노래는 박영만 작사 한형석 작곡의 ‘압록강행진곡’이라는 독립군가이다. ‘압록강행진곡’은 눈물이 핑 도는 가슴 찡한 노래로 도탄에 빠진 동포와 형제를 구하기 위한 광복군의 바람이 담긴 진중가요로 빼앗긴 조국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광복군의 기상이 진하게 배어 있다. ‘압록강 행진곡’이라는 독립군가가 현재 초등학교 4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은 독립군가보존회의 노력 덕분이다. 독립군가보존회는 독립군이었던 남편 박노일 씨(76년 작고)의 유지를 이어 곽영숙 회장은 독립군가 발굴과 보존에 평생을 보냈다. 곽 회장은 후손들에게 애국애족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독립군가 보존에 힘써 왔는데 2001년부터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압록강행진곡’ 수록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여 2003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음악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고 한다. (‘독립군가보존회 본회 연혁’에서 발췌)

한국 최초의 오페라 ‘아리랑’


   
▲ 한형석이 작곡한 첫오페라‘아리랑’의 서곡 악보. 수익금은 광복군의 여름군복 장만에 썼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가 무엇인가?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950년에 만들어진 현제명의 <춘향전>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학계에서도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학생들도 그렇게 배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보다 10년 앞선 1940년에 이미 제작된 오페라가 있었다. 그 작품이 한형석이 만든 오페라 <아리랑>이다. 1940년 5월15일 중국 시안 남원문 가설극장. 아리랑산에 사는 목동과 시골처녀의 사랑이야기가 무대에 올려졌다. 결말은 비극적이다.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렇다. “때는 40년 전 늦은 봄. 평화로운 한국 ‘아리랑산’에서 목동과 시골처녀는 사랑을 나눈다. 이들은 곧 결혼해 부부가 되지만 일제 침략으로 금수강산은 피로 물들고 아리랑산에는 일장기가 꽂힌다. 5년 후 목동과 처녀는 조국 독립을 위해 부모와 생이별하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향한다. 조국을 떠나면서 아리랑을 부른다. 이후 한국혁명군에 입대해 맹렬히 싸운다. 압록강 부근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한 지 오래. 시간이 흘러 35년 후 목동과 시골처녀는 노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광복을 위해 싸운다. 비록 이들은 적군포화 속에서 장렬히 전사하지만 마침내 태극기가 아리랑산 정상에 게양돼 펄럭인다.” 이후 아리랑은 광복 전까지 중국에서만 20여 회 공연됐으며, 수익금은 한청 피복비로 사용했다. 당시 중국 언론과 음악계는 새로운 형식의 가극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중국 신문은 “아리랑은 한국 민간의 유명하고 비장하고 웅장한 가곡이다. 줄거리가 매끄럽고 촘촘하다”고 평했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에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망각 속에 잊혔던 민족의 선율


   
▲ 한형석 선생
오페라 <아리랑>은 중국 서안 공연 당시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과 그의 아내 송미령도 관람했고,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임정 요인들도 감격해 마지않았다. 오페라 <아리랑>은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중국에서만 20여회 공연되었으나 악보가 유실돼 해방 후 정작 국내에서는 무대에 한 번도 올지지 못했다. 1948년 부랴부랴 귀국한 한 선생 보따리에는 아리랑 악보가 들어 있지 않았던 것. 다행히 서곡, 간주곡 등 기악부 친필 악보는 챙겨 왔다. 이후 당시 기억을 더듬어 아리랑 제작노트를 중국어로 남겨 놓았다. 한형석은 귀국 후 중국에서의 40여년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2004년. 중국 근대음악사 석학 베이징(北京) 중앙음악학원 량마오춘(梁茂春) 교수가 중국근대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친 한형석의 자취를 찾아 부산대에서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아리랑 작곡연도가 1939년으로 한국 최초 오페라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 앞서 1997년 중국의 한 음악 잡지에는 “한유한,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한국인 작곡가를 애타게 찾는 글을 실었다. 글쓴이는 중국 최고의 음악사학자로 알려진 중국 중앙음악학원 량마오춘 교수. 그는 1940년대 음악 잡지에 소개된 작곡가 한유한과 그의 음악에 주목했다. 그가 남긴 100여곡이 하나같이 음악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량마오춘 교수가 발표한 글을 계기로 ‘한유한 찾기’가 시작됐다. 급기야 이런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한유한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주인공은 바로 한형석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음악가였던 것. 량마오춘 교수는 한형석과 한유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부산을 찾았을 때 이미 고인이 된 후라서 많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해방 후 문화예술활동 전념, 청소년 교육 헌신


   
▲ 오페라 '아리랑'을 작곡한 한형석 선생.
1953년 6월, 부산 서구 부민동 산비탈에 예닐곱 장정들이 땀을 흘리며, 목재로 된 벽을 세우고 있다. 한형석과 뜻을 같이한 이들이 한국 최초의 어린이 전용극장이자 야학교를 세우는 모습이다. 이날 사진 위에 먼구름은 “우리 힘으로 세우자!”란 글귀를 힘 있게 적었다. 한형석은 1950년 6월 18일 수백만 원의 빚까지 내가며 부산문화극장을 열었다. 연극에 갈증을 느꼈던 부산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였지만 한국전쟁이 터져 개관 공연만 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문화적 사업을 위해 일어섰다. 항일음악가였던 그에게 한국전쟁은 또 다른 책무를 부여했다. 1953년 8월 15일 전쟁통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부산 서구 부민동 변전소 옆에 목조 단층의 자유아동극장 겸 색동야학원을 열었다. 이는 우리나라 문화예술교육의 효시다. 창립취지서는 “거리에서 방황하는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에 대한 정서함양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나서야 할 일이지만 마냥 그때를 기다릴 수 없다”고 천명했다. 자유아동극장에서는 명작동화를 각색한 영화와 아동극, 인형극, 그림연극이 공연됐다. 2년 동안 500여 회 공연에 11만 8천여 명이 찾아올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자유아동극장은 밤이 되면 색동야학원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어쩔 수 없이 2년 만에 자유아동극장의 문을 닫았다. 한형석의 부인 강호전 씨는 “당시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던 백색전화기 한 대를 시어머니로부터 받아 땅 사는 데 쓰고, 친구들로부터 돈을 일부 후원받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NM

뉴스메이커 신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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