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그림세계에 있는 한 기인(奇人)의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5월4일 08시46분    조회:833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경모





   로인의 세계는 고작 2,30평 크기의 작업실이 전부였다. 로인은 날마다 그곳에서 동쪽에 뜨는 해를 맞았고 또 날마다 그곳에서 서쪽에 지는 해를 바랬다. 아니, 언제 해가 뜨는지 또 언제 해가 지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로인은 날마다 눈만 뜨면 선지(宣紙)에 쉼없이 붓을 달렸다. 그림 그리기는 밥을 먹고 잠을 자는것처럼 로인의 삶의 일상으로 되고 있었다.

  작업실에는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아히 높은 히말리아 산이 있었고 천리 고비사막이 있었으며 뉘엿한 황토고원이 있었다. 벽에 줄느런한 거폭의 그림들은 중국의 대표적인 산과 강, 사막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림에는 “중화강산도(中華江山圖)”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완성된 그림은 거의 다 궤에 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걸어놓을 자리가 너무 부족해서요.”

  작품은 내년말까지 완성될 예정이며 최종 2,000m에 이른다고 한다. 정말이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희대의 작품이였다.

  로인의 작업실에는 시도때도 없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뉘라고 할것없이 거창한 “중화강산도”의 앞에서 감탄은 물론 무서운 전률을 느낀다. 미상불 그림의 어마어마한 량도 그렇거니와 전문가들을 놀래는 독특한 그림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 우리 인간이 그림에서 나타낼수 있는 극치의 미를 보는것 같아요.”
  “그래요, 화단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할 작품이 아닐까요?”
  정작 그림의 주인인 김경모는 도를 닦는 수행자처럼 언제나 고요한 모습이다. 실제로 그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장장 10년을 하루같이 작업실에서 고독한 수행자로 보냈다고 한다.

  “원자탄”을 만든 그림소년

  어쩌면 진부한 얘기가 아닐지 한다. 성공한 예술인이라면 응당 그러하듯 김경모 역시 그림을 굉장히 즐겼던 그림소년이였다.

  김경모의 말을 그대로 빈다면 그때는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담이나 벽, 문짝 등 그림을 그릴만 한 곳이면 곧바로 화판이 되였고 연필이나 분필 지어 숯도 그림을 그리는 붓으로 되였다. 그 시절 그림책에서 접할수 있었던 군함이며 대포, 병사와 장수 등이 다시 소년의 “화판”에 등장하여 일장 “전투”를 벌였다.
  초중에 다닐 무렵 김경모는 동북로신문예학원의 미술반 초선(初選)에 선정되는 기쁨을 부모에게 선물한다. 이 문예학원이 바로 훗날의 유명한 로신미술학원 전신이다. 그런데 식구들은 이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한숨을 톺아야 했다.

  “면접을 가야 했는데요, 도무지 차비를 만들수 없었습니다.”
  이때 일반 로동자의 월급은 20~30원, 10원이면 쌀을 80근이나 살수 있었다.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게 없는 살림형편에서 차비 10원은 아름찬 액수였다. 나중에 김경모는 고중에 입학한후 인차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을 찾기에 이른다. 그때 학교의 추천으로 흑룡강성지질국 산하의 흥안령지질대대에 배치, 이어 감숙성지질국 산하의 주천(酒泉)지질탐사대 대원으로 전근되였다.

  김경모는 입사한 첫날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만든다. 화강석의 이야기가 나오자 오히려 화강석이 뭔가 하고 반문했던것이다. 기실 화강석은 굳어진 모양이 바위나 산봉우리를 이루고 있어서 평소에 흔하게 볼수 있는 암석이다.

  그때부터 김경모는 몇해동안 짬만 있으면 표본실에서 광물 기초지식을 닦았다. 휴일에도 고향 할빈에 돌아가지 않았다. 땀의 결실이 있었다. 썩 뒤의 이야기이지만, 그는 지질탐사대에서 지질학과 관련한 저서를 여러 권 펴낸 몇몇 사람의 하나로 되였다. 그래서 지난 세기 80년대 김경모는 감숙성지질국 제1진 공정사의 명단에 이름 세 글자를 당당하게 기록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지질탐사대에서 김경모가 긍지를 느끼고 있는 성과는 이 일이 아니다. 1955년부터 중국에서는 비밀리에 핵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원자탄을 만들려면 단연 우라늄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지질탐사대의 작업은 우라늄광석을 탐사하는데 주목표를 겨냥하고 있었다.

  “극비 작업이라서 탐사대원 1명에 해방군 병사 2명이 근접수행을 했어요.”

  그때 탐사작업은 주요하게 지표의 방사성 이상현상을 발견하고 추적수색을 진행하여 진상을 밝히는것이였다. 솔직히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따분한 작업이였다.
  행운은 노력하는 사람을 비켜가지 않았다. 김경모가 감숙성 경천현(涇川縣) 일대의 산골에서 사암형(砂巖型) 우라늄광석을 발견했던것이다. 그때 그 고장의 사람들은 우라늄성분이 들어있는 바위로 담을 쌓고 지어 집을 짓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방사성의 영향을 받아 이름 모를 병을 앓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수명이 별로 길지 않았지만 무슨 원인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각설하고, 김경모의 감숙성 최초의 우라늄광석 발견은 지질국을 들썽하게 만들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 서부의 고비사막에 솟아오른 버섯구름의 아래에는 그렇게 그림소년이 하나 서있었다.

  그림세계에 떠오른 ”청산의 매”

  1979년, 공화국 창립 30주년에 즈음하여 감숙성정부는 김경모 개인에게 우라늄광석의 발견 공적을 치하하는 표창장을 내렸다. 감숙성 방송과 신문 등 언론매체는 다투어 김경모의 사적을 실었다.

  이때 언론매체는 하나같이 “청산의 매”를 제목으로 만들었다. “청산의 매”는 그 무렵 김경모가 연변에서 출간한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지난 세기 60~70년대 러시아와 중국의 분쟁을 배경으로 지질탐사대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삼고 있다. “청산의 매”는 초판인쇄가 무려 6천권, 그 시절 조선족문단에서 소문을 놓은 몇몇 소설의 하나로 되었다. 어쨌거나 중국의 산하를 매처럼 넘나든 탐사대원 김경모에게 “청산의 매”라는 이름이 적격으로 되고 있었던것이다.
  기실 김경모는 예나제나 다름없이 그냥 선과 색채의 그림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소설의 상상세계도 그의 그림세계의 여정에 잠깐 등장했을 따름이다. 수자와 화학부호의 론리세계는 더구나 멀리 떨어진 다른 세계였다.

  “부끄럽지만요, 저는 저의 핸드폰 번호도 제대로 기억을 못해요.”
  실제상 그가 지금까지 내놓은 지리학 저서도 그림과 한데 이어져 있다. 1983년 그와 동료가 공저로 지질출판사에서 펴낸 학술저서는 “야외지질스케치(野外地質素描)”이며 1984년 과학출판사에서 출판한 그의 학술저서는 “그림으로 읽는 지모류형(地貌類型圖說)”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땅이 어떤 모습인지 그림으로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가지각색의 지모(地貌)는 모두 그에게 얻기 힘든 그림 소재로 되였다. 김경모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화첩을 펼쳐들었다. 황토고원 그리고 고원을 흘러 지나는 황하, 구렁이처럼 산마루를 기어가는 장성… 차창 밖을 스쳐 지나는 경물 모두가 고스란히 그림으로 남았다. 어느덧 김경모의 그림재간은 동네방네 파다히 전했다. 그때 그 시절 주천지역의 최대의 모택동 화상(畵像)도 김경모의 작품이였다.

  놀랍게도 김경모는 그림세계에서 스승이 없는 독학의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그림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일부러 미술전시회에 참석한적 있다. 안해가 살고 있는 료녕성 무순시에 전근했던 지난 세기 80년대의 일이였다.

  “저의 작품이 전시회의 1등과 2등, 3등을 석권한겁니다. 그때부터 그림에 자신감을 얻었고 더는 전시회에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전시회에 출품한 그림은 유화였고 훗날 그리기 시작한 “중화강산도”는 수묵화였다. 수묵화는 김경모가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시도한 화법이다. 그는 여러가지 착상을 시험하던 끝에 2000년도에 비로소 자신만의 풍격을 찾게 되였다. 그는 이번에는 수묵화 작품의 완성도와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북경 “인밀일보 신주서화원(神州書畵院)”을 찾았다. 그러자 서화원의 원장이 직접 특약화가 초청장을 들고 김경모를 찾아왔더라고 한다.

  이때부터 김경모는 작업실에 “은둔”하고 오로지 “중화강산도”을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중화강산도’는 단시간의 완성이 절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이 때문에 잡념이 섞이면 잘 그릴수 없습니다. 물욕에 젖으면 마음이 들뜨니까요.”

  은둔자의 빛을 보는 그날은

  어쩌면 “은둔자”의 신분으로 될 운명이 아닐지 한다. 김경모는 일명 당안(檔案)이라고 하는 개인의 인사 기록부마저 분실했다고 한다. 지난 세기 80년대, 김경모는 료녕성 무순시에 전근한후 탄광개발을 청부했다. 그런데 얼마후 정부 부서의 개입으로 계약해지를 당한다. 3년후 사건이 해결되였지만 이 과정에서 인사 기록부가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던것이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김경모는 오갈데 없는 사람으로 되였다. 이때 그의 마음에 버팀목으로 된것이 바로 그림이였다. 결국 그림소년으로부터 지질학자, 소설가, 정부관원 등 과정을 거친후 순수한 화백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마냥 그림을 그릴수 있을지 장담할수 없었다. 월급이나 년금보장이 없는 생활이였기 때문이다.

  “마침 구경꾼가운데서 제가 시작한 ‘중화강산도’를 보고 지원자가 나서더군요.”
  김경모가 작업실을 차린 송장(宋庄)은 북경 통주에 위치한 유명한 화백마을이다.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거개 예술인이거나 예술에 취미를 갖고있는 사람들이며 통상 예술작품 감상수준이 상당히 높다. 와중에 김경모의 그림을 보고나서 지원자로 나선 사람들이 무려 100명으로 헤아리고 있단다. 그들은 십시일반으로 지금까지 김경모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작업실 임대료의 대여, 선지와 물감의 제공은 물론 김경모가 입고 있는 옷도 지원자들이 산것이라고 한다. 또 김경모의 건강을 념려하여 무료검진을 다녀간 의사도 있었다.

  “저분이 남들의 승인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기뻐요.” 안해 안진영이 인터뷰 도중에 이렇게 그간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어냈다.
  “인제야 저분이 하고 있는 작업의 의미를 알것 같구요. 함께 보람을 느낍니다.”
  솔직히 안진영은 그림세계에 파묻혀 살고 있는 남편이 때때로 야속스럽기도 했단다. 그런 남편때문에 안진영은 결혼후 장장 40년동안 거의 혼자서 가정을 꾸려야 했던것이다. 실로 성공한 남편의 뒤에는 안해가 서있다는 속담을 상기하게 했다.



  김경모는 두루마리 그림 “중화강산도”를 완성하는대로 전부 사회에 기부할 예정이다. 일부 전문인 지원자들은 벌써 “중화강산도”를 영구전시하기 위한 문화광장의 설계와 기획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김경모의 그림 작업은 이로써 끝이 나는게 아니었다. 그는 얼마전부터 조선반도의 대표적인 풍경을 하나로 집대성한 작품을 계획하고 있다. 백두산과 금강산, 한라산 등 명산을 포함, 최종 80m 길이의 두루마리 그림을 완성하는것. 조선반도 3천리 강산이 인제 대형 화폭으로 재현되게 되는것이다.
  정말이지 기인(奇人)의 그림세계의 여행은 끝이 없는것 같았다.*

로년세계 2014년 5월호
(편자주: 본문은 원문 전문입니다.로년세계잡지에서는 편폭을 절반 정도 줄여서 편집되어 나갔음을 알려드립니다.-조글로미디어 편자주)
 

파일 [ 6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해마다 5월에 열리는 칸 영화제는 세계적으로 가장 명망이 높은 영화제의 하나다. 레드카펫을 밟으며 등장하는 배우들의 드레스 또한 80년 력사를 가진 칸 영화제의 볼거리다. 지난해 5월 12일 열린 칸 영화제는 좀 특별했다고 말하고 싶다. 최아자 (본명 최옥)양이 조선족 인터넷스타 최초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
  • 2019-08-05
  •     (흑룡강신문=하얼빈) 류설화 기자 = 료녕성안산경제개발구에 위치한 안산신자전자유한회사, 부지면적이 24000평방미터에 달하며 년매출액 1억2천만원을 돌파한 본 기업은 2003년에 설립하여서부터 오늘날까지 신재생에너지업계에서 굳건한 립지를 자랑하고 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과감히 창업에 뛰여들어 오...
  • 2019-08-05
  • 최동단 변강 도시에서 태어난 조선족 소설가           (흑룡강신문=하얼빈) 김련옥 기자 = 흑룡강성 동북부에는 가목사라는 조그마한 소도시가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인 하바롭스크와 비로비잔과 린접해 있는 변경도시이기도 한 이곳은 특별한 력사배경하에 항일전쟁 정신이 형성되고 계승된 곳이였...
  • 2019-08-05
  •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미용기술원 원장 한다 메구미(半田 惠)씨 인터뷰  한다 메구미(半田 惠)씨 분위기 좋은 재즈음악이 흐르는 신쥬쿠의 한 우아한 커피집에서 한다 메구미(半田 惠)씨를 처음 만났다. 차분하면서도 여성미가 넘치는 세련된 패션, 처음 만났는데 달콤한 향기처럼 부드럽게 다가와 편안하게 이야기를...
  • 2019-08-03
  • [국경 70돍 특별기획]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14)     제1자동차공장 로일대 건설자 채동휘로인 1953년 장춘에서 제1자동차공장이 일떠선 후 3년간의 노력을 거쳐 1953년 7월 13일 드디여 우리 나라에서 생산한 첫 패 트럭이 생산선에서 내려왔다. CA10형이라고 명명한 이 트럭은 당시 쏘련의 150형 트...
  • 2019-07-31
  • 번숙근이 세운 상해지식청년진달래무용단 민족문화예술의 전파자로 상해지식청년진달래무용단의 성원들 두터운 민족문화감정을 잊지 못해 저절로 어깨춤이 흘러나오는 흥겨운 가락과 함께 신들린 듯 우아하고 절주감이 넘치는 춤사위, 거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대복장에까지 눈길을 빼앗기다보면 저도 몰래 엄지손가락을...
  • 2019-07-29
  •     랑시주식유한회사 신동일 회장   (흑룡강신문=하얼빈) 김호 기자 = 중국조선족기업 가운데서 제일 처음, 중국 녀성 고급 의류 브랜드 가운데서 가장 먼저 상장한 랑시주식유한회사 신동일(47. 사진) 회장은 늘 이런 말을 한다.   “랑시는 의류 브랜드로 자기 패션문화 정립과 함께 중국문화를 계승하...
  • 2019-07-29
  • 진달래 고향에서 키운 꿈을  사쿠라 나라에서 펼쳐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부회장이며 농학박사인 최우림씨 인터뷰 최우림 박사 프로필 1984.7월 연변농학원 (지금의 연변대학농학원)졸업 1991.7월 길림농업대학 석사연구원 졸업 1995.7월 북경농업대학 (지금의 중국농업대학) 박사연구생 졸업 ...
  • 2019-07-27
  • 전임 연변대학 농학학부 김수철교수에 대한 이야기 편집자의 말: 연변대학이 올해 학교창립 70돐을 맞이했다.연변지역 최고학부로서의 연변대학은 그동안 수많은 우수한 민족인재들을 양성해 조국건설과 사회번영을 위한 사업에 적극 기여했다. 오늘날 그 인재들을 키운 연변대학의 원로 교수님들은 자랑찬 연대인들의 빛나...
  • 2019-07-26
  •          최윤갑(崔允甲),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학창시절 때의 교재들, 책장에 꽂힌 우리말 도서, 신문잡지에서 본 문장, 대학입시때 작성한 답안지...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의 기틀을 마련한 선배가 바로 최윤갑 연변대학 원로교...
  • 2019-07-25
‹처음  이전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