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근 반세기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교육자ㅡ리희일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6월4일 09시41분    조회:597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희일

《리희일선생님께서 혁명에 참가하신 이후의 경력은 기본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빛나는 력사와 일치되는바 혁명사업의 수행과정에 표현된 높은 정치적 안목, 풍부한 리론실천적 경험 및 고상한 인간적덕성은 우리 모두가 따라배울바이다. 특히 리희일선생님은 우리 당의 훌륭한 교육가이며 어문사업지도일군으로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교육사업과 어문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혁혁한 기여를 하시였다. 리희일선생님은 신념과 지조의 화신이다.》

- 장덕강 《신념과 지조의 화신 – 리희일선생님》에서

1997년 11월 6일

 

정협 전국위원회에 참석한 리희일선생(1987년 향산호텔에서)

 

리희일선생은1918년 1월 12일, 조선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풍애라는 두메산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둘째아들로 고고성을 울린다.

그로부터 11년후 리희일선생은 어머니와 형님과 함께 7년전에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 중국 할빈으로 들어온다. 어렵사리 아버지와 만난 그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12살에 화피전자에 금방 선 조선족소학교에 입학하여 가, 갸, 거, 겨와 1, 2, 3, 4를 배운다. 비록 늦깍기 학생이였지만 어려서 고향의 락동강에서 쏘가리, 뱀장어를 잡을 때보다도 더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지만 계속 부모를 따라 떠돌다보니 열다섯살에야 할빈 도리에 있는 할빈 금강소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을 마치고 《9.18》사변후 일제가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꾸린 《안전농장》 하동 11계의 6년제 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보습과까지 마치고나니 어언 열여덟살이 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후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그는 심양에 가서 대만측량학원에 입학한다. 졸업때 학교에서 소개해준 직업ㅡ일본군통역을 단연히 거절하고 하동에 돌아와 측량사, 가게, 책장사를 시도했으나 다 실패하고 다시 농사일에 들어선다. 이런 역경속에서도 그는 공부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의 교육학강의록을 받아서 열심히 자습한다. 스무살나이에 아이 하나까지 딸려가지고 이렇게 자습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때의 정신세계를 그는 이렇게 개괄한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ㅡ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

이러한 그였기에 급기야 교원시험에 합격되여 1939년 9월부터는 주하현 모아산국민학교에서, 1년후에는 하동국민우급학교에서 우수교원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1945년 3월 그는 졸업생들에게 마음이 바른 사람으로 되라는 뜻에서 자기의 반신사진 뒤면에 붓으로 마음 《심(心)》자를 써서 한장씩 나누어주었다. 그해 8월 일제가 망하자 위만시대 6년간의 그의 교원생활은 끝을 보게 되지만 미래의 훌륭한 교육가로서의 기반은 이미 다져지기 시작했고 성숙의 발걸음은 빨라지게 된다.

그는 8월말부터 하동조선소학교를 회복시키라는 과업을 맡고 반달여의 고심과 노력끝에 9월 15일에 6년제 12개 학급에 학생은 500여명, 교직원은 10여명, 교장은 리희일이 하동조선소학교를 정식으로 창립한다.

《그때로부터 혁명에 관한 서적들을 학습하면서 차츰 눈을 뜨기 시작한》 그는 《조선독립동맹》에 가입하며 동맹 하동총지부의 조직위원, 주임위원(서기)직을 맡고 이듬해에는 상지현 조선학교 교원련합회의 주임까지 하면서 2년 남짓 하동조선소학교에서 사업하다가 북만의 유일한 조선족중학교인 상지조선중학교에서 조선어문교원을 담임하고 불철주야로 일한다.

 

리덕수동지께서 리희일선생께 쓴 제사

 

1948년 6월 그는 여덟식구(어머니, 안해, 아이 다섯)를 거느리는 무거운 짐을 안해 량순희에게 맡기고 할빈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로 가게 되며 거기서 처장인 주덕해동지를 처음으로 만난다. 교육간사직을 맡은 그는 《북만지구조선인간부훈련반》에서 배운것을 밑천으로 조선인간부학교에서 《사회발전사》를 강의하면서 주덕해동지의 신변에서 사업하다가 이듬해에는 아예 주덕해동지를 따라 가족을 여직 상지 하동에 남겨둔채 연변으로 아주 온다.

리희일선생이 간사로 배치받은 중공연변지위 선전부는 시초에 인원이 셋이였는데 부장에 항일간부인 최채동지였고 배재화동지가 선전과장이였다. 줄곧 로농간부문화교육사업을 책임졌던 그는 1951년에 지위선전부 간부교육과 부과장을 맡으며 그해에 동북국당학교에 가서 1년간 학습한다.

드디여 1952년 9월, 5년간이나 갈라져있던 가족들을 조직의 배려로 연길로 데려오는 일로 바삐 돌다보니 연변조선족자치구 창립경축대회에 참가할수 없었던 평생 유감을 남기기도 한다.

1952년 10월 리희일선생은 《연변일보》의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전신은 원래 동북에 있은 <길림일보>, <신민보>, <단결시보> 등 세개 조선문신문이다) 》에 제3임사장으로 부임된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4 세. 1954년 5월, 리희일선생은 신문사업경험을 총화하고 금후 신문사업을 강화할 대책을 강구하는것을 중심의제로 한 제2차전국선전사업회의에 참가하여 모주석, 류소기 등 중앙지도자들을 만나고 그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다. 약 5년동안 신문사업을 하는 사이에 리희일선생은 주당위의 여러 가지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한편 중요한 원고를 심열하고 중요 론설문도 써야 했는데 그가 심열한 중요원고는 1000여편, 친히 쓴 론설문은 100여편에 달한다.

1956년 주당위에서는 리희일선생을 훈춘현 당위서기로 내정하고 훈춘에 보내기로 하였지만 년말에는 그를 다시 주당위 문교부장으로 배치하였다. 1년후에는 문교부와 선전부를 합친 새 선전부가 나오고 리희일선생은 선전부장 책임을 지고 3년동안 연변의 정치사상사업과 문화교육사업을 주관한다.

 

조남기동지께서 리희일선생께 쓴 제사

 

1963년, 리희일선생은 예전에 주당위 조직부, 성당위 조직부에서 받던 임명장과는 달리 중앙조직부에서 보내온 연변대학 당위서기 임명장을 받아안는다. 그가 연변대학에서 제일 처음으로 부딪친 문제는 졸업생을 배치하기 어려운것이였다. 전국의 여느 대학과 다를바 없는 이것은 대학의 전공이 사회수요와 맞지 않기때문이였다. 그는 우선 학교지도자들이 조사연구를 한 기초에서 학교의 성격과 방향을 바로잡기 시작한다.

1964년 4월 1일 그는 건교 15돐경축대회에서 개혁방안에 관한 보고를 하였는데 이 개혁방안은 학교 제6차당대회에서 대회결의로 채택되여 실시하게 된다. 1966년부터 그는 학교사업을 좀더 잘해보려고 학생숙사에 내려가 그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생활하였으며 그해 여름에는 사무실 한구석에 침대를 놓고 자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하지만 결국 문화대혁명에서 전 5년은 《주자파》, 《그물에서 빠진 우파분자》, 《민족주의분자》, 《조선특무》, 《주덕해의 결사적인 보황파》란 죄명을 들쓰고 주덕해, 요흔, 전인영 등과 같이 《조리돌림》을 당하며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인인 부인을 잃고 가정이 사분오렬되는 처참한 《검은무리》생활을 하고 후 5년은 《시집살이》를 하며 옹근 10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된다.

1976년 10월 《4인무리》가 타도되고 10년대란이 끝을 보게 되자 리희일선생은 다시 연변대학의 당위서기사업을 맡게 된다.

10년 내란후 리희일선생은 내란기간에 파괴된 연변대학을 춰세우고저 무진 애를 쓴다. 그는 학교의 규모를 확대하고 학부도 증설하여 민족의 발전과 사회주의건설에 절박히 수요되는 각 방면의 인재를 양성할수 있는 민족대학을 영위할 장기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고저 헌신적으로 분투한다.

원래 성소속인 연변대학을 중앙소속으로 되게 하려고 그는 10년간 전국정협위원으로 있을 때 정협회의에 제안을 써내고 흑룡강성과 료녕성의 민족사무위원회와 교육청을 쑤셔 성원서까지 중앙에 올려보내게 한다.

연변대학의 기본건설을 위하여 자치주정부, 성정부, 국무원의 해당 지도자들을 여러번 찾은 끝에 구락부, 도서관, 체육관을 지으며 2000평방메터에 달하는 숙사와 1만 2000평방메터에 달하는 학교청사도 짓기 시작한다.

이 노력과 성과들은 후날 연변대학이 명실상부한 민족종합대학으로, 《211공정》학교로, 교육부와 성에서 합작운영하는 대학으로, 와룡산기슭에 남부러워하는 새 캠버스를 앉히는 등 휘황한 발전일로를 걷는데서 불가결의 요소로, 든든한 밑거름으로 된다.

압록강수력발전소에서 부인과 함께 (1990년)

갖은 풍상고초를 겪고 파란만장한 세월과 동무하면서 근 반세기동안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리희일선생은 1984년 9월부터 연변대학 고문으로 계시다가 1986년 9월 20일 68세에 아주 리직휴양하게 된다.

리희일선생은 리직휴양후에도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의 편찬사업을 주관하셨고 1991년부터 연변대학 후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길림성교육위원회 후대관심사업위원회 위원, 연변조선족자치주 후대관심사업위원회 고문으로 계시다가 2001년 1월 18일 페암으로 별세했다.

신념과 지조의 화신이며 혁명의 영원한 불사조인 리희일선생은 당과 인민에게 유익한 사업에 여열을 쏟아붓는것으로 혁명자의 청춘은 영원한것이라는 진리를 실천하셨다.

리희일 프로필

1918.1 조선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출생

1928년 말 중국 흑룡강성에 이주

1939.5 – 1945.8 주하현 모아산국민학교, 하동소학교 교원

1945.9 – 1947.11 하동소학교 교장

1947.12 – 1948.6 상지조선중학교 교원

1948.7 – 1949.3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교육간사

1949.4 – 1951.8 중공연변지위 선전부 간사, 간부교육과 부과장

1952.10 – 1956.12 동북조선인민보사 사장 겸 주필

1956.4 중공연변주위 제1기위원

1957.1 – 1960.6 중공연변주위 문교부장, 선전부장

1962.11 중공연변주위 제2기위원

1963.7 – 1966.8 중공연변대학 당위서기

1971.12 – 1972.4 연변자치주 로임개혁판공실에서 사업

1972.5 – 1974.6 중공연변대학 당위부서기 겸 혁명위원회 부주임

1974.7 – 1983.11 연변대학 혁명위원회 주임, 중공연변대학 당위서기

1978.11 중공연변주위 제4기위원

1978 – 1988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5기, 제 6기 전국위원회 위원

1983.12 – 1986.8 연변대학 고문

1986.9 리직휴양

참고문헌: 《숨차게 걸어온 길》 리희일 저


길림신문  량은실견습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경쟁은 한국인끼리 했나요. “아닙니다. 그 사업은 주로 이탈리아 계 이민자들이 했습니다. 다만 이탈리아 출신 사장 밑에 한국인 영업사원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무척 고전했지요. 나중...
  • 2005-11-23
  • 연해주 고려인 중 최고 갑부 텐 알렉산드르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에서 건설업과 유통업 등 10여 개 기업을 운영해 고려인 중 최고 갑부로 이름난 텐 알렉산드르 하리또노비치(한국명 정일) 연해주 고려인 재생기금 회장. ⑥연해주 고려인 중 최고 갑부 텐 알렉산드르 (우수리스크=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텐 알렉산드르 하...
  • 2005-11-23
  • [원제: 힘들지만 보람있는 삶 엮는다] 1급지체장애인 리광수 고선옥부부 자식 위해 리광수(46살), 고선옥(38살) 부부는 1급지체장애인이라는 아픔속에서 남편은 안해의 눈이 되여 주고 안해는 남편의 다리가 되여주면서 자식을 밝게 키워 미담을 엮고있다. 멀리 흑룡강에서 혈혈단신으로 연변에 시집온 리의경학생(화룡시 3...
  • 2005-11-23
  • 미국의 국제교육연구소가 미국내 전 대학의 외국인학생과 미국출신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있는 학생들 현황을 종합해 일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 류학중인 조선국적의 학생은 2004~2005학기에 총 219명을 기록, 2003~2004학기(174명)보다 25.6%가 증가됐다. 2001~2002학기에는 113명이였다. 조선국적의 미국류학...
  • 2005-11-22
  • 《인젠 손뗄수 없어요》 장백현에 거주하고있는 올해 57세나는 한족 퇴직로동자 장집림은 지난해부터 조선어를 자습하기 시작, 신문을 읽을수 있고 간단한 조선어를 한어로 번역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장집림은 퇴직한후 마작놀이나 트럼프놀이보다는 뭔가 의의있는 일을 찾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끝에 그는 장백...
  • 2005-11-22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북한 ‘삼흥코스트 그룹’의 노동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천용수 회장. 그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1992년, 북한에서 만난 일본의 유력 일간지 기자와 대북사업에 관해 인터뷰했다가 ...
  • 2005-11-22
  • 우수리스크시 최연소 의원 발레리 강 지난해 26세의 나이로 우수리스크시 시의원에 당선된 발레리 강. 1978년생인  그는 고려인 중 최연소 시의원이고 25명의 시의원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다. 시의원으로 당선되기 전 미하일로프군 군수에 출마했다 낙선했던 강 의원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정치를 한...
  • 2005-11-22
  • 프랑스 유학을 떠나다 1929년 여름 한낙연은 몇 년 만에 상하이에 도착한다. 하지만 상하이는 예전의 활력에 넘치는 도시가 아니었다. 상하이에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미 지하로 숨어들어 은밀하게 활동하던 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그로서는 더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만나기로...
  • 2005-11-22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1980년대 초, 제약회사 세일즈맨으로 승승장구하던 청년이 맨손으로 호주에 왔다. 챙겨주는 이 없는 남의 나라에서 23년 만에 12개 알짜 기업을 일궜다. 한순간도 조국을 잊지 못한 사내는...
  • 2005-11-21
  • 리완빈부자 도보로 홍군의 장정코스를 다녀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 제5차반포위토벌전역에서 실패한 중국로농홍군은 1934년 10월부터 1936년 10월까지 남방근거지로부터 섬북근거지에로의 전략적 전이를 하게 된다. 당시 세상을 놀래웠던 이 장거가 바로 그 유명한 2만 5천리 장정이다. 새 중국이 창건된후 특히 개혁개방...
  • 2005-11-2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