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태양신”의 이름을 찾은 사람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6월11일 16시15분    조회:718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장헌규


구룡침을 한묶음 들고 있는 장헌규
 


도통 믿기 어려운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녀인의 왼쪽 옆구리를 찔러 들어간 은빛의 침은 그의 오른쪽 옆구리로 비죽이 나오고 있었다. 침의 길이가 무려 60㎝나 된다는 얘기가 실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솔직히 방금전까지 허풍을 치는 의사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고 말하니 장헌규는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다.

“저는 아직도 감히 이 침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못 찌르면 장기를 다칠 수 있으니까요.” 침구를 배우고 있던 김씨 성의 수강자가 침묵하는 스승이 못마땅한 듯 이렇게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골(整骨) 센터에는 한순간 한약재의 은은한 냄새와 더불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길 시가지 남쪽에 자리 잡은 장헌규의 이 센터에는 명문대의 의학교수와 현지 병원의 의사도 자청해서 그의 독특한 침구(鍼灸)를 배우고 있었다.

장헌규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이 침은 일명 “구룡침(九龍針)”으로 특허를 취득, 현재로서는 중국 대륙에서 실제 사용되고 있는 제일 긴 침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검처럼 기다란 이런 침은 “망침(芒針)”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옛날부터 전승되고 있다. 망침은 특제한 긴 침으로 통상 가늘고 탄성이 있는 불수강 철사로 만든다. 그 모양새가 흡사 보리 수염 같다고 해서 망침이라고 불린다. 망침은 중국 고대 아홉 침의 하나인 “장침(長針)”이 발전한 것으로, 그 길이가 5치, 7치, 10치, 15치 등으로 부동하다. 임상에는 일반적으로 5~8치의 침이 많이 사용되며 8치 이상의 침은 화석처럼 아주 희소하다.

장헌규는 그제날 부친이 마을에서 이웃의 병을 보면서 이따금 놓던 장침이 바로 8치(24㎝)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침은 망침이 아니라 조선반도의 옛 조상으로부터 장장 몇십대를 이어 받은 전통의술이었다.

용의 뼈를 잠근 사람
 
어느 날 왕실의 누군가 야외에서 수렵을 하다가 낙마를 했다. 측근이 부축을 하려고 하자 왕족은 단박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허리뼈가 삐끗 어긋났던 것이다. 다들 어쩔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누군가 마침 부근 마을에 신의(神醫)로 불리는 장씨 성의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윽고 장씨 의사가 부름을 받고 천방지축 달려왔다. 그는 왕족의 허리에 기다란 침 몇 대를 꽂아 넣더니 지압으로 척추를 이곳저곳 눌렀다. 통증은 금세 바람처럼 사라졌고 왕족은 다시 말 잔등에 올라탔다. 왕족은 대단히 기뻐하며 의사에게 이 신기한 의술의 이름을 물었다. 이때 장씨 의사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지를 빛낸다. 왕족의 용골(龍骨)을 이어 맞췄다는 의미로 용(龍)자를 넣어 “쇄룡골(鎖龍骨)”이라고 멋진 이름을 지어 올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쇄룡골”이라는 이 치료법의 이름은 동네방네 널리 전해졌다.
 
이 일화는 조선 세조(世祖, 1417~1468) 때 생겼다고 장씨 가문에 전한다. 훗날 장헌규는 이 “쇄룡골”의 이름 의미를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해 “쇄룡정골(鎖龍正骨)”이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출원했다. 중국말 “정골(正骨)”은 바로 우리말 한자의 “정골(整骨)”이라는 뜻이다.

각설하고, “쇄룡골” 치료법에 나오는 “장침”이 도대체 얼마나 길었는지는 현재로선 잘 알수 없다. 다만 장헌규의 조부 때에 이르러 후손에게 물려준 제일 긴 장침이 8치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침은 조선민족 의술의 정수이지만, 희소한 의술인 장침을 놓는 사람은 아주 적다. 인체의 수백개의 혈위는 그렇다 치고 어려운 해부학을 손금 보듯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침을 놓을 때는 손가락의 힘과 손목의 힘을 이용하여 장침을 누르고 비비며 살갗에 번개같이 뚫어 넣어야 하는데 웬만한 의사는 아예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
실제로 장헌규는 가문에서 전하는 의술을 배우다가 도중에 포기한적 있다고 한다. 1983년, 장헌규는 군부대에서 퇴역하고 고향마을에 돌아와 호미를 잡고 있었다. 의술은 땅을 떠나 천하를 주름잡고 싶은 그에게 지팡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부친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쇄룡골이라는 게 뭔지 딱딱하고 재미가 없었어요.”

장헌규는 의술이고 뭐고 팽개치고 무작정 산해관 너머 소림사로 떠났다. 워낙 군부대에서 특수요원으로 있었던지라 무술에 남다른 흥미가 있었던 것. 1984년, 장헌규는 소림사(少林寺)에서 스승을 모시고 무술을 배운다. 스승은 또 그에게 정골(整骨)과 침술도 가르쳤다. 정골과 침술은 무술 수련자에게 필수품처럼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장헌규는 또 무당산(武當山)에 올라가 도사를 모시고 주역을 읽으며 태극권을 시작한다.

10년 후 귀가한 장헌규는 언제인가 눈과 마음이 열린 자신을 문득 발견한다.

“1년이 12달이듯 흉추가 12개 마디이며 1년이 24계절로 나뉘듯 늑골이 24개이고 하늘에 태양이 떠있듯 저골(骶骨)이 있으며 달이 떠있듯 꼬리뼈(尾骨)가 있다…”

난해한 범문(梵文)처럼 들리던 “쇄룡골”의 구구절절이 말 그대로 뼈 속 깊이에 파고들었다. 부친이 환자의 몸에 찌르는 침의 “경로”가 인제 투시라도 하듯 눈앞에 사진처럼 환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은 공해가 많고 또 약을 많이 쓰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침의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장헌규는 어느 정도 침술에 숙달하자 침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침을 놓는 방법을 모색했다.

미구에 몸을 6개의 각도, 3개의 방향으로 찌르는 “구룡침”이 그렇게 나왔고 침 3,5대를 일시에 머리에 연속 찌르는 “포마침(跑馬針)”, 젖샘 치료 등을 일원화한 “삼합일(三合一)” 치료법도 그렇게 나왔다. 장헌규는 또 과민성 습진을 치료하기 위해 습침(濕針) 치료법을 만들기도 했다.

장헌규의 독특한 침구술로 중국침구지압협회의 이사로 당선되었으며 중화의학전승의 선두주자 인물로 되었다. 얼마 전에는 또 스리랑카 국제의과대학 민족전통의학 박사 칭호를 받았으며 북경중의중약전승학원 객좌교수로 초빙되었다.
 
고향의 산과 물의 향기를 찾는 사람

센터의 벽 아래에 두꺼비 한 쌍이 웅크리고 있었다. 주먹처럼 툭 튀어나온 눈알이며 꾹 다문 길쭉한 입, 그리고 땅을 짚고선 짤막한 다리… 누가 선물한 나무뿌리 조각인지 진짜 대단한 작품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장헌규는 조각물의 작가가 화제에 오르자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뭘요, 제가 언제인가 강가에서 주은 뿌리를 직접 조각한 겁니다.”

그러고 보니 센터에는 적지 않은 뿌리조각이 있었다. 조각은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의료용품 가운데서 각별한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장헌규는 바쁜 일상에서 평정한 마음을 얻기 위해 자주 시골에 내려간다고 한다. 골짜기를 파고 내리는 시냇물은 그동안 쌓였던 번뇌를 깨끗이 씻어주었고, 울울창창한 수풀은 신선한 공기를 꽉 막힌 폐부에 시원하게 불어넣었다.

연길의 부르하통기슭에 누워있던 나무뿌리가 그렇게 조각품으로 나타났고 왕청의 가야하기슭에 뒹굴고 있던 돌덩이가 그렇게 고운 무늬의 수석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핏줄처럼 나무의 결이 거미줄처럼 엉켰고 인간의 골격처럼 줄기가 똬리처럼 돌돌 감겨있었다. 장헌규는 혈에 침을 꽂아 경락을 뚫듯 조각칼로 나무를 이리저리 잘라 뿌리의 원형을 드러냈던 것이다. 수석에 피어난 무늬도 그의 손길을 거쳐 초가, 농부의 모습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었다.

고향의 산과 물의 향기는 뿌리조각과 수석에 한껏 피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하늘과 땅, 강, 짐승, 사람… 모두가 나무뿌리에 녹아있는 것 같아요.”

그럴지라도 보는 눈에 따라 보이는 실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탁자 부근에 놓은 나무뿌리 조각이 바로 그러했다. 조각물은 분명 하나이지만 왼쪽에서 보면 두루미요, 오른쪽에서 보면 부엉이였고 뒤에서 보면 돌조각을 입에 문 고대 원시인이었다. 한두 발자국 물러서 보면 조각물은 물을 헤가르는 한척의 용선(龍船)을 방불케 했다.

원리를 깨치면 하나를 안후 열을 안다고 했다. 정골센터의 벽에 걸려있는 서예작품도 단연 일품, 이 역시 장헌규의 솜씨라고 한다. 뿌리조각처럼 스승을 모시지 않고 홀로 닦은 기예였다.

“어느 수련이든지 끝이 없어요. ‘집’에 몸을 가두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네요.”

장헌규는 공기를 마시듯 자연과 자유롭게 교감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도호(道號)”인 장룡비(張龍飛)라는 이름처럼 하늘을 날면서 새롭게 거듭나고 싶다는 것. 그는 현재의 자기는 아직 탈피를 채 하지 못했다고 곱씹어 말한다.

이때 따라 그가 입구에 놓은 나무화석이 새삼스러웠다. 수천년 동안 땅에 고이 묻혀있던 이 화석은 바로 석탄으로 굳어지기 직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장헌규는 그가 얼마 전부터 비로소 시작한 큰 작업이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조의(朝醫) 쪽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조의는 “조선족의학”이라는 말로, “조선족의사”로도 통한다. 조의는 2,3년전 비로소 국가의 인정을 받은 의학류형의 이름이다. 중국에는 장족의학, 몽골의학, 묘족의학 등 여러 소수민족 의학류파가 있다. 장헌규는 현재 연변조의분회 회장 직무를 맡고 있다.

장헌규는 그가 늘 중의(中醫)라고 불리지만 정확한 신분은 바로 “조의”라고 특별히 힘을 주어 말한다.
 
조의(朝醫)의 모습을 그린 사람

“제가 중국의 스님과 도인에게 의술을 많이 배운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맥을 이은 것은 분명히 우리가문에서 전하는 전통적인 조선민족 의술입니다.”

조부는 조선의 평양에서 원근에 의술로 풍수로 이름난 명의였다. 어느 날 그는 야밤에 솔가 도주하여 연변의 안도에 이주했다. 조부가 연변으로 이주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조부는 한일합병 후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 부상자들을 의술로 치료했고, 일본인들이 함부로 조선의 땅에 길을 내고 터널을 뚫을 때 조선인의 기맥이 끊긴다고 반기를 들고 나섰다. 결국 그 때문에 일본 군경의 감시를 받았고 나중에 일가족을 거느리고 안도 지역에 은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변이 일본의 치하에 들어간 후 일본군경에게 잡혀가 그길로 실종되었다. 그는 집을 나서기 전에 자식들에게 쇄룡골 의술을 꼭 전승할 것을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런 가문에서 나서 자란 장헌규는 나이를 먹을수록 조선민족 전통의학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조선족들은 아직도 조의라는 이름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어요.” 장헌규의 말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은 아예 “조의”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현 주소이다. 그런데 온라인에는 벌써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의라는 이름의 닷컴의 등록을 완료한 상태라고 한다.

“이러다간 우리 이름을 우리가 쓰지 못하게 되는 현상이 빚어질 수 있어요.”

장헌규는 지난해 11월 서둘러 “연변조의(ybchaoyi.com)”라는 닷컴을 등록했다. 비록 조의라는 이름의 닷컴을 전부 등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선족의 고향인 “연변” 성씨의 닷컴을 만들게 되었다는데 작은 안위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장헌규가 만든 닷컴의 메인 페이지에는 태양과 그 속에 있는 조의라는 이름이 나란히 꽃구름처럼 떠있다. 태양신은 조선민족의 주되는 숭배의 신이다. 그러고 보면 장헌규에게 조의는 다름 아닌 태양신의 이름 그 자체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호림/중국민족잡지 3호


파일 [ 3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24엑스포재팬주식회사 조송천회장을 만나다 조송천회장 《사람에겐 사람이 필요하다》 이는 인도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데 큰 공헌을 한 19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자타코르의 명언이다. 사람에게 또다른 사람이 필요로 한것은 서로의 발전을 위해 사랑과 지혜를 나누고 절망과 고...
  • 2015-09-29
  • ㈜카와(스튜디오아키라)사장 변소화와의 인터뷰 변소화사장 성공은 일종의 습관이다. 《성공한 전문가는 태여나는것이 아니라 선택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성공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는 로씨야 문학가 똘쓰또이의 명언이다. 지난 6월 28일, 필자를 마중한 ㈜카와 변소...
  • 2015-09-29
  • 열창하고있는 최수려양 “동방의 정-최경호음악회”가 9월 24일 저녁 7시 30분 북경 21세기극장에서 성황리에 막을 올렸다. 이번 공연에는 최경호 가수의 딸이자 중국가극무극학원 연극배우인 최수려양도 함께 무대를 빛냈다. 최수려양은 아버지 최경호와 함께 , 를 선보였고 독창 을 열창했다. 공연을 앞두고 기...
  • 2015-09-28
  • 일전에 있은 “제4회 심양국제가구박람회”에서 료양화려공예품공장(华丽工艺)은 43종 불단(佛龛)을 전시해 3일간 수십만원 상당의 판매계약을 체결했다. 이 회사 사장 오정상(59세)씨의 조선족 신분이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1956년 청원현에서 태여난 오정상씨는 5살때 가족따라 료양으로 이사, 1975년 고중학...
  • 2015-09-28
  •  상해동화대학교 장순애교수 《옛날 부자집에서 녀성을 위해 한곳에 산과 들을 가둬넣은게 바로 정원이죠.》 그녀는 정원의 시원을 이렇게 해석하고있었다.   정원은 정자와 루대, 집의 전후와 좌우가 건물이거나 담에 에둘린 장소를 말하는데 중국 대륙에서 천년을 이어 전승되고있는 독특한 건물양식이다. 선민...
  • 2015-09-25
  • 북방지역 벼재배전문가인 부친 최죽송 탄생 100돐을 맞으며 글: 최광철 저자 최광철씨가 옛집이 있었던 자리를 가리키며 소개하고있다.(사진 김태국기자) 금년은 나의 부친 최죽송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부친의 생일이나 제사날이면 부친의 생전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지군 하였지만 금년에 들...
  • 2015-09-25
  •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의 김영근(59) 사업이사는 재미동포 출신이다. 1980년 성균관대 졸업 후 대기업에 잠시 근무하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 수도 워싱턴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면서 미주한인회 사무총장, 세계한인네트워크 상임대표를 지냈다. 언론사 워싱턴 특파원들은 그가 살 집도 구해주고 자녀학군도 알아봐주...
  • 2015-09-25
  •   -연변팀 손군선수(33번)의 부친 손덕호 아들의 성장기를 말하다     26라운드 경기까지 15승 9무 2패, 54점, 현재 순위 1위. 연변장백산축구팀은 갑급리그 2015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해가고있다. 팀의 출중한 성적에는 외적선수 3인방의 돋보이는 배합 하모니가 큰몫을 하고있다. 동시에 연변팀 본토 선수들...
  • 2015-09-24
  • 일본 려행호텔전문학교 언어학 전임강사 방정화와 만남 지난 6월 21일 《예쁜 녀자되기》클럽에서 조직한 《와인》주제모임에서 일본의 모려행호텔전문 방정화원장  학교 언어학전임(專任)강사 방정화(42)를 만났다.   《예쁜 녀자되기》 클럽은 방정화가 13년간 교직사업에서 비축한 체험과 꿈으로 《나부터 이쁘...
  • 2015-09-23
  • 흑룡강조선어방송국 국장 (하얼빈=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에 위치한 흑룡강조선어방송국의 허룡호 국장. 흑룡강조선어방송국은 중국 내 성(省)급 방송국 중 유일한 우리말 방송국이다. 2015.9.20 okko@yna.co.kr   허룡호 흑룡강조선어방송국 국장 '전국 조선족 어린이...
  • 2015-09-20
‹처음  이전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