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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에 영혼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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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서영근
손글씨에 영혼을 담다

-서예학박사 서영근의 성공스토리

이화진(동북아신문 편집국장)

1. 젊은 도전, 실패는 두렵지 않다

<하면 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一切唯心造>) 이것이 서영근의 첫 번째 좌우명이다.

사범대학 재학시절부터 이런 좌우명을 갖고 열심히 달린 서영근은 끊임없이 남들이 상상도 못하는 불가능에 도전하였다.

1996년 4월 14일, 연변대학 예술학원 미술관 앞에는 100여명의 서예가와 취재진, 관계자들이 모여 <연길시조선글서예가협회>창립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25세의 젊은 나이의 서영근회장이다. 소학교 서예교원으로 재직 중이던 서영근은 뜻이 같은 서예가들을 모아 중국에서는 최초로 되는 한글서예가협회를 창립한 것이다. 협회창립과 더불어 제1회 회원서예전을 개최하였다. 개성 있는 젊은 서예가들의 서예작품은 많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후로 <‘정음상’전국조선글서예공모전>을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으며, <연변청년5인전>, <연변서예탐색전> 등 각종 서예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1998년부터 한국 광주시의 무등한글서예연구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해마다 서예교류전을 개최하여 올해로 제16회를 맞이하였다. 제11회부터는 주제를 갖고 전시회를 준비하였는데, <먹빛으로 밝히는 새 아침>전, <묵향으로 맺어진 형제의 정>전, <국제한민족 한글서예한마당>, <별의 시인, 윤동주의 시와 서예의 만남>전 등 참신한 서예전을 개최하였다. 특히 올해는 중한수 22주년과 제1회 중국조선어문자의 날을 기념하여 8월 28일에 <아름다운 우리글서예의 화려한 외출>전을 청년광장에서 개최할 예정으로, 흑백예술인 서예를 디자인과 결부하여 새로운 칼라예술로 승화시키고, 밀폐된 전람관에서만 전시하던 서예작품을 밖으로 끌어 내와서 많은 시민들과 가까이하여 우리글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알리고,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중한문화교류를 촉진하며, 한글서예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하고자 노력하다.

2008년 8월 1일, 서영근은 또 하나의 사단법인체인 <연변문자예술협회>를 창립한다. 한국민족서예인협회, 재일 고려서예연구회 등과 자매 결연을 맺고 중국은 물론 일본, 한국에서 <국제한민족서예교류전>등 굵직한 서예전시회를 해마다 개최하였다. 올해 9월 초에 한국에서 중조한일 4개국 서예전람을 개최할 계획이다.

그는 또, 2012년 3월 30일에는 한국에 체류 중인 동포들과 한국인들을 결집하여 <한중동포서예협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한중 문인 시서화 연합전>, <국제 시서화 명인 교류전> 등 한국에서의 각종 서예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2014년 6월에는 다시 <연길시서예문화원>을 창설하여 후진양성과 우리글서예의 보급, 발전에 매진하고 있다.

우리글 서예의 저변확대와 회원 양성을 위해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2. 배움에는 끝이 없다

 

<삶에는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다. (學海無涯)> 이것이 서영근의 두 번째 좌우명이다.

1989년 9월, 서영근은 중등전문학교인 연변대학 사범분원에 입학한다. 중학시절 반장을 지내면서 학습성적이 최상위권이였지만 가정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사범학교에 입학 한 것이다. 그러나 서예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바로 사범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사범학교에는 <서예>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 평소 경필글씨를 잘 썼던 그는 서예에 남다른 애호를 갖고 열심히 배웠다. 1991년부터 각종 서예대회에서 수상하였으며, 1993년 3월에는 졸업을 앞두고 개인서예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졸업 후 연길시공예상표공장 디자이너를 거쳐 중앙소학교 서예교원으로 재직 중이던 서영근은 서예가협회를 창립하고 각종 서예활동을 개최하다가 한국으로 초청되었다. 그 기회에 그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어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1997년 3월에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한 후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2년간 수학하여 2002년 12월에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경남 마산의 한 대학교 교수로 초빙 되어 한국에서의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그의 배움의 열망은 계속 되었다.

2003년 9월 국립 경상대학교 국어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2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수료 하였다. 수료와 동시에 원광대학교에 서예학 박사과정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박사과정에 등록하였다. 직장과 대학의 거리가 멀어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왕복 6시간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2년 반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다. 2008년 2월 그는 드디어 원광대학교 제1호 서예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는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그 어디에도 없는 최초의 서예학 박사학위인 것이다. 물론 서예가가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경우는 많지만 대부분 문학박사나 철학박사, 미술학박사 등 다른 분야의 학위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고 하여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중국조선민족서예사>, <설문해자 부수 형의고찰>, <성구 속담 그리고 서예>등 저서와 <우리글판본체>, <우리글궁체> 등 교본을 출판하고 논문을 발표하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3. 재능기부, 무료서예교실 운영

<더불어 살자>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좌우명이다.

20여 년간 시간과 정력과 자금을 투자하여 서예를 연마하여 끊임없는 노력으로 정상에 오른 서영근은 결코 자만하지 않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남을 비웃지도 않았다. 그는 늘 후학을 고무격려하고 챙겨주었다.

그의 교학 방식은 <선 칭찬, 후 지적>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속담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순서에 따라 듣는 사람의 기분이 다르게 된다. 먼저 칭찬을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주는 반면, 먼저 잘못을 지적하면 <나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포기할 수도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 할 수 있다. 서영근은 이런 교육철학을 갖고 1993년부터 후학을 지도하였다.

특히 시장경제가 도입됨에 따라 많은 서예가들이 중도에서 서예를 포기하고 돈벌이에 나섬에 따라 조선족 서예계는 급격히 저조기에 접어들었다. 이를 직시한 서영근은 2004년부터 10년간 이른바 재능기부를 하였다.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고 가족이 중국에 체류하고 있었기에 그는 방학기간은 중국에 체류하였다. 소년궁 서예교원으로 재직 중인 선배의 협조를 받아 매년 방학마다 <무료서예교실>을 운영하였다. 그렇게 양성한 회원이 100여명에 이른다.

2008년 경기도 의정부로 상경한 그는 재한동포들 중에서도 서예에 관심이 는 사람이 있겠다는 생각으로 한마음협회, 다문화협회 등 여러 단체들과 접촉하여 서예반을 개설할 의향을 내비쳤다. 2010년 4월 한마음협회의 협조 하에 한국에서의 첫 서예교실을 오픈하였다. 처음이라 협회 임원들 외에는 다소 호응도가 낮았다. 2012년에는 <한중동포서예협회>를 창립하고 각 언론사의 도움을 받아 공식적으로 회원 모집에 나섰다. 처음에는 영등포의 한 서예학원에서, 다음에는 마포의 한 단체의 사무실에서, 지금은 대림동주민자치위원회의 협조 하에 <대림동주민 사랑방>에서 무료서예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20여명이 수강 중이다. 회원들은 사정이 있으면 지각하거나 결석하기가 보편적이다. 그러나 지도교수인 서영근은 매주 일요일 두 시간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결석 한번, 지각 한번 하지 않고 무보수로 강의하다.

무료로 가르친다는 말에 모두들 이해 못하는 눈치다. “왜 돈을 벌 수 있는데 무료로 가르치냐?”는 것이다. 그런 말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놀면 재미없기에 같이 놀려고 그럽니다.” 서로 같은 취미를 즐기면서 더불어 사는 재미를 알기에 무료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4. 민체의 매력이 빠지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不狂不及)>이것이 서영근의 네 번째 좌우명이다.

서영근은 서예에 미고, 민체에 미쳐있다. 한글 서체에는 궁체, 판본체, 민체, 청봉체, 간도체가 있다. 이 중에서 제일 매력적인 것은 바로 민체이다. 민체는 궁체나 판본체와는 달리 어떠한 규칙이나 틀이 없이 자유로운 서체이다. 즉 작가의 감성과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서체이기에 쓰는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된다.

1994년에 연변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아름다운 한글서예 중한연합전>에서 생전 처음으로 궁체와 판본체 등 전통서체를 접한 서영근은 고민에 빠졌다. 중국에는 궁체나 판본체를 가르쳐줄 선생님도 없고 교재도 없는데 어떻게 배울수 있을가? 고민끝에 그는 작품집에 수록된 한국서예가들 중 저명한 한글서예가 30명을 엄선하여 편지를 보냈다. 어떻게하면 궁체와 판본체를 배울 수 있고, 교재를 구할수 있냐는 내용이였다. 달포쯤지나 편지와 소포들이 육속 도착하였는데 대부분이 좋은 교재와 자료들을 보내왔다. 그중에는 직접 서신으로 궁체와 판본체를 배워주겠다는 분도 계셨다. 그리하여 서영근은 산돌 조용선, 장성연, 현병찬 등 유명한 스승들을 모시고 2년간 전통서예를 공부하게 된다.

그 후, 1997년 제주대학교 재학시절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서영근은 책을 정리하다가 한글고문서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춘향전, 심청전, 구운몽 등 한글 고문소설 필사본이 수 백 권이 꽂혀있었는데 모두가 이른바 보기 드문 민체였다. 그는 특이한 서체들을 일일이 복사하고 틈이 나면 임서를 하면서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여름, 전국에서 100여명의 저명한 서예가, 화가들의 모임에 초대되었다가 “민체의 아버지” 여태명 교수를 상봉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여교수의 문하에서 서예학 박사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종국에는 제1호 박사학위를 수여받기에 이르렀다. 여태명교수는 그 유명한 <1박2일> 글씨의 주인이며, <부산국제영화제>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오래전 한 영화제작사에서 도용한 <축제>에 대해 저작권 소송을 제기해 한 글자에 1천만원의 손해배상을 받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민체>도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민체의 매력에 빠진 서영근은 민체의 대가 여태명교수한테서 서예를 배웠지만 그의 서체를 그대로 따라 쓰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살려 썼다. 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글씨를 그대로 쓰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또 스승들도 당연히 본인의 글씨를 가르치지만, 여태명교수는 그렇지 않았다. 스승의 사상은 물려받되 글씨는 자기 나름대로 써야 가보치가 있다는 주장을 한다.

민체는 이른바 손글씨의 기본서체이다. 각종 간판, 제목, 표지, 상표 등에 민체가 사용되면서 서영근도 할 일이 많아 졌다. 여러 기업이나 출판사, 개인 등에서 부탁을 받고 많은 손글씨를 써주어,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조선족서단의 주류는 청봉체라고 불리는 조선의 서체와 그 변형인 간도체(연변서체)이다. 전통서체인 궁체는 199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여 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판본체의 첫 보급자는 당연 서영근박사이다. 그는 일찍 한국의 서예가를 통하여 전통 궁체와 판본체를 배운 서영근은 1994년부터 3년간 흑룡강신문에 <서예교실>란을 개설하고 매달 1회씩 논문과 궁체, 판본체 등 서예실기를 가르쳤다. 그는 이미 궁체와 판본체로 교재를 편찬하기까지 하였다.

장장 17년 고향을 떠나 먼 한국 땅에서 공부 또 공부 그리고 교육과 봉사로 쉴 새 없이 뛰어온 서영근박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 교수 직업도 내려놓고, 지난 1월 귀국하자마자 <연길서서예문화원>을 설립하고 쉴 틈도 없이 또 서예의 보급과 발전에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야 말로 최고의 직업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하기에 힘들어도 행복하다. 그래서 서영근은 행복한 사람이다.

 

못 할 것이 없다. 하면 된다.

서예에 미쳐서, 손글씨에 영혼을 담고 사는 서영근이 또 한 번 큰 사고를 치기를 기해보며, 그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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