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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로큰롤(摇滚)의 창시자 — 최건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2월2일 13시23분    조회:7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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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최건



조선족 로큰롤(摇滚, 록이라고도 함, )가수 최건은 1986년 북경 로동자체육관에서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一无所有)》를 불러 전 중국을 뒤흔들었다. 

28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지금 매일 신인가수들이 등장하고 매일 새 노래가 울려퍼지며 매일 새로운 진전이 있는 가운데 최건은 여전히 로큰롤의 대표가수로 시대와 함께 흐르는 정신을 유지하고있다. 그의 노력으로 그는 줄곧 시대의 최전방에서 달리고있다. 지난해에 있은 최건 음악회에서 53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최건의 노래는 당년과 마찬가지로 10대 소년에서 70대 로인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여전히 관중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으며 여전히 관중들로 하여금 음악회장을 들끓게 했다.

기자는 북경에 있는 지인들을 통해 최건의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게 되였고 어렵사리 최건의 매니저(经纪人)우우(尤尤)와도 련계를 가지게 되였다. 우우한테 기획보도《백년백인》을 설명해서 얼마 안지나 기꺼이 취재를 접수했다. 



영화 《블루 본즈(蓝色骨头)》와 그의 일본새

지난해 최건은 새 앨범 출판준비를 하고 순회공연을 하는 외 자기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영화를 시장에 내놔 새로운 도전장을 내걸었다.

최건은 음악에서 영화에로 뛰여넘어 직접 씨나리오를 쓰고 직접 연출을 맡고 영화 《블루 본즈》를 찍었다. 2014년 10월 17일부터 전국 원선(院线,영화발행업종의 독점성 경영체제) 상영을 했다. 《블루 본즈》란 영화이름은 2005년에 발행한 최건의 5번째 개인앨범 《 당신한테 본때를 보여줄터(给你一点颜色)》중의 동명노래에서 따온것이며 다년간의 준비를 거쳐 대중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블루 본즈》속의 남주역인 네트워크 해킹이자 음악인인 종화가 최건의 대변인으로 볼수 있는가는 물음에 최건은 《그렇다, 완전히 나의 대변인이라 할수 있다》고 확고하게 말한다.

《블루 본즈》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음악영화이다. 한 가족 세식구가 각자 부동한 시간과 공간에서 겪은 이야기 줄거리를 상호 보충하고 상호 결합시켜 만든 영화이다. 근 10년 동안 중국 원선상영에서 가장 앞장에 서고 가장 대담하게 찍은 영화로 불리우기도 했다. 영화는 《문화대혁명》시기부터 지금의 현시대로 끌어올렸는바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는데다 정보량이 밀집되여 조금만 다른 곳에 정신을 팔기만 해도 영화 서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최건은 《블루 본즈》를 통해 인간성, 자유, 리성 등 다년간 하고싶었던 많은 일들을 표달하려 했다고 한다.

북경영화학원의 교수이며 중국의 제 4대 연출인 사비는 《영화는 독특하고 많은 생각을 가지게 했다. 최건이 말하고싶은 부분을 잘 알수 있다》고 했고 영화촬영을 맡은 두가풍은 자기를 례로들면서 《많은 풍격은 착오에서 오며 마음가짐에서 온다. 최건이 영원히 앞으로 나아갈수 있는것은 그가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추었기때문이다. 최건은 줄곧 로큰롤영화를 만들고싶어했다》고 소개했다.

최건의 매니저(经纪人) 우우는 《최선생은 언제나 완벽함을 요구하고 최고를 추구하며 자신에 대한 요구를 낮춘적이 없다》며 최건의 일본새를 소개한다.

영화《블루 본즈》포스터(海报)를 찍을 때이다. 여러 번 판면을 만들었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싶으면 가장 좋은 판면이 아니다며 새로 판을 짜는 최건이다. 《그는 영원히 무궁무진한 생각이 있고 영원히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미흡한 점이 있으면 그냥 지나쳐버리는 성미가 아니다.》이렇게 말하는 우우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느 한번 중요한 공연이 있었다. 공연 전날 저녁에 시연했는데 무대가 최건이 생각한것보다 5센치메터에서 10센치메터 가량 높았다. 최건은 무슨 방법을 대서라고 마음에 들도록 하려 했다. 우우는 《그럴때마다 힘들기는 해도 그런 그였기에 공연이 잘되면 마음이 뿌듯하고 보람도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일에서 최선생의 고집이 맞다는것을 증명한다》며 최건의 일본새를 탄복했다.

우우에 따르면 영화《블루 본즈》의 촬영을 마친 다음 최건은 2년여 시간을 들여 영화몽타쥬(剪辑)를 했다. 우우는 영화제작실에서 몽타쥬할때의 자세로 잠이 든 최건을 늘 보아왔다고 한다.

올해 80세 나는 최건의 어머니 장순화는 최건은 생김새나 성격이 아버지를 닮은데가 많다고 얘기하면서 《어릴때부터 한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하고 마는 성미였다. 말이 적고 세심하고 약간은 급한 편이며 아무 일을 하나 열정적이고 완벽하게 하려한다.》고 자랑했다.

우우는 《최선생은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하다. 공연이 끝나서 저녁 11시, 12시가 되여도 그는 꼭 걷기를 한다. 그 시간대는 그한테 있어서 그날의 총화이기도 하다》고 밝힌다.

최건은 늘 이런 말을 한다. 《자기의 신조는 언제까지나 일하는것이다. 일하고 또 일한다. 하는 일도 없으면 인간이 돼야 한다. 인간도 안되고 하는 일도 없고 하면... 》.

 


영화 《블루 본즈》상영에 따른 순회공연에서 / 촬영 송효휘

한 세대에 영향 준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

1986년 5월 9일 북경 로동자체육관에서 국제평화의 날을 기념하는 대형 음악회 《사랑으로 넘치는 세계— 100명스타가수음악회》가 있었다. 그 음악회에서 최건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를 불렀다.

거의 무릎까지 닿는 홑두루마기를 입고 한쪽 바지가랑이는 걷어올리고 무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체면이 서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말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휘파람소리가 사처에서 들려왔고 노래가 끝나자 관중들은 흥분된 나머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후로 중국의 젊은이들은 교정에서, 숙사에서, 커피점에서 기타를 타며 최건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오래동안 단일하고 메마른 생활을 해오던 중국인들이 개혁개방을 맞자 마음속의 감정을 토로하려 갈망하고있을 때이다. 당시 90% 되는 대륙 가수들이 향항, 대만의 노래를 불렀는데 사람들에게 신선하다는 감은 주었지만 자기들이 말하고싶은것은 아니였고 또 자기가 부르기싶은 노래는 더더욱 아니였다. 그래서 관중들은 숨김없이 드러내고 석쉼이 섞인 고함지르는듯한 최건의 노래에 감화된것이다. 물론 최건의 노래는 신변에서 발생한 일이고 또 신변 사람들의 마음속의 이야기이기에 삽시에 전국을 석권했던것이다.

류강이라 부르는 최건의 팬은 1986년에 처음 최건의 노래를 들은 후로 최건이 북경에서 공연한다 하면 모든 음악회에는 다 가봤다 한다. 지어 새벽 4시에 표사러 간적도 있었다며 당시 되거리로 표값을 20원할때도 있었는데 이는 로임의 4분의 1이 된다 한다.

최건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를 쓸 때 그냥 간단한 기분으로 썼다. 사랑의 노래라고 생각하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이 노래는 단지 나의 노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노래임을 알게 되였다》고 말한다.

최건의 어머니 장순화는 《1986년 북경 로동자체육관에서 있은 음악회는 당시 동방가무단의 단장으로 있은 왕곤이 퇴페적인 음악이라는 압력을 맞받아 가면서 반대의견이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서야 최건이 무대에 설수 있었다》고 말한다.

음악계에서는 왕곤단장의 주장이 있었기에 중국 본토의 로큰롤의 첫 고함소리가 울려퍼지게 됐다고 왕곤을 높이 평가하고있다.

최건과 그의《아무것도 가진게 없어》는 언녕부터 력사의 부호로 찍혔고 한 세대의 기호로 남아있다.

28년간 최건과 그의 악대성원들의 발자국은 중국의 곳곳에 남겨있을 뿐만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찍혀있다. 최건은 1000여차 되는 개인음악회를 가졌으며 그의 공연 또한 시들지 않는 권위적인 보류종목으로 되였다.

1989년 최건은 그가 말하는 첫 앨범 《새장정 길에서의 로큰롤》을 출판했으며 그후 륙속 《해결》, 《붉은기 아래에서》, 《무능의 힘》, 《당신한테 본때를 보여 줄터》란 이름의 앨범을 출판했다.

《새장정 길에서의 로큰롤》은 대만 쌍백음반 금상, 향항 백음반 금상을 받았다.

청년평론자 소일은 이렇게 최건을 평가한다. 《중국 로큰롤의 리정표식의 인물인 최건은 신화의 부호가 된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일언일행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초점으로 되였으며 따라서 시대와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감정과 태도에 투입되고있다. 》고 인정했다.

소일은 《최건의 성공은 집체주의 흐름에 밀려드는것과 개인, 자유 추구 사이의 대중들의 몸부림과 분규를 구현한데 있다. 1986년 최건은 국가체제하의 혁명적인 상상으로 새시대의 사회의 문을 두드렸다. 로큰롤을 운용하여 홍색미학에 대한 아이러니(反讽)도 좋고 홍색미학에 대한 모방이라 해도 좋고 홍색미학은 최건의 음악사상을 부각시키는데 공을 세웠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의 순회공연은 물론 최건은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딸리아, 단마르크,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 나라에서도 여러 번 순회공연을 했다. 서방나라에서는 최건을 엘비스 프레슬리(猫王),밥 딜런(鲍勃·迪伦),존 레논(约翰列侬)과 같은 음악가로 인정하고있다.

 


북경 수도체육관에세의 공연/ 촬영 송효휘

《라이브(真唱)운동》발기

2002년 8월 7일, 최건은 음악계에서 나타나는 립싱크(假唱)행위를 상대하여 북경에서 《라이브운동》을 발기했다.

최건은 문예종사자로서 직업적 량심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가수들이 최건의 라이브운동에 동참하였으나 적지 않은 가수들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건은 3년 동안 여러 가지 방식으로 《라이브운동》을 추진했다. 그가 라이브운동을 개시해서 3년만인 2005년에 문화부는 《영업성공연관리조례》와 《영업성공연관리조례 실시세칙》을 발표했다. 이로 립싱크문제에 대해 명확한 처벌규정을 내렸다.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2009년 음력설문예야회부터 라이브로 노래하게 했다.

2005년 문화부의 조례가 발표된 후 최건은 《라이브운동이 8년에서 10년이 걸릴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해결될줄을 몰랐다》며 《라이브운동》을 마치면서 다른 가수들과 함께 무료로《라이브운동》고별공연을 했다.

지난해 영화《블루 본즈》를 상영할 때이다. 모 도시에서 입장권을 무료기증하면 안되겠는가는 물음에 최건은 관중들이 얼마있으면 있는그대로 상영하란다. 그는 예술이 금전에 오염되는것을 용납할수 없고 예술이 오락에 포장되는것도 받아들일수 없다는것이다.

최건은 《블루 본즈》의 개봉과 함께 흥행수입이라는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예술은 상업적인 인정을 받아야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한 상업이 아니라 상업과 예술의 결합에서 《정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제 《블루 본즈》의 원선(院线)상영을 마친 지금 《블루 본즈》의 흥행수입이 같은 상영시간에 상영한 일부 영화보다 많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네티즌은 《<블루 본즈>는 최건의 처녀작이다. 세속과 관중들의 비위에 맞출 필요없이 관중들에게 자기가 표달하고싶은것을 펼쳐보인것이 바로 그 영화이다. 그런 최건이기에 나는 영화를 봤다》고 말한다.

다른 한 네티즌은 《취미성과 관련없이 영화는 나라의 력사와 개인 운명을 줄거리로 과거를 돌이켜 보게 했다. 비록 완미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 빛이 나는 점이 존재하는 문제를 충분히 덮을수 있기에 영화가 눈부실수 있다》고 실토정한다.

중학교 시절의 꿈 실현

최건은 최웅제(고)와 장순화(80세) 사이의 맏아들로 1961년 8월 2일 북경에서 태여났다. 이들한테는 최건보다 7살 어린 둘째 아들이 있는데 현재 일본에서 생활하고있다.

최건의 아버지는 부대 악단의 트럼펫 연주자였고 어머니도 조선족으로서 중앙민족가무단의 무용배우로 있었다. 최건은 14세에 트럼펫을 배웠고 20살에 북경교향악단에서 프럼펫연주자로 입단했다. 최건은 비틀즈, 밥딜런, 사이먼앤 가펑클 등의 영향을 받아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1984년 관현악 단원 6명과 함께 칠합판(七合板)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팀을 무어 북경시내의 호텔 등을 전전하며 서구 팝송(서양 류행 대중가요) 연주생활을 했다. 중국 최초의 그룹사운드(악기 연주하면서 노래부르는 팀) 구성을 갖춘 악단이다. 1984년에 이들의 첫 앨범인 《류랑자는 돌아온다(浪子归)》를 출판했다. 수준미달의 앨범이지만 음악에 대한 최건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1986년 5월 9일 동방가무단 왕곤단장의 추진하에 최건은 국제평화의 날을 기념하는 100명스타가수음악회에 참가하여 일거에 이름을 날렸다. 1987년 최건은 철밥통인 북경교향악단을 나왔다.

최건의 어머니 장순화는 《최건은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노래하기 좋아했고 아버지를 닮아 목소리가 좋았다. 최건이 6살때인가 함께 뻐스를 탔는데 뻐스안에서 최건이 < 뢰봉을 따라배우자>를 높게 불러 승객들의 귀여움을 받은적이 있었다》고 최건의 어릴적 일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부대울안에서 자랐는데 친구끼리 늘 전투놀음을 했고 자기보다 이상인 친구가 있는데도 왕노릇한 최건이다고 말한다.

장순화는 《최건은 우리 말을 할 줄 모르지만 식습관은 우리와 같다. 랭면을 좋아하고 된장국, 김치도 즐긴다. 책 보기를 즐기는데 특히 문학서적을 보기 좋아한다》며 최건의 남동생은 한국 류학을 했는지라 우리 말을 괜찮게 한다고 덧붙인다.

최건의 어머니에 따르면 최건이 일본이랑 한국에 공연하러 갈때면 어머니를 모시고 가며 한국에 가서 시간이 있으면 어머니와 함께 외가집에도 들른다 한다.

《매주 일요일을 나와의 만남의 날로 규정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1주일에 3, 4차례는 전화를 걸어온다. 집에 와서는 설거지도 해주고 간혹 몸이 아프면 병원시중도 잘해준다. 》장순화는 최건이한테  21살 나는 딸이 있는데 키도 크고 이쁘기도 하다며 손녀 자랑을 늘여놓는다.

《최건이 중학교를 다닐 때이다. 앞으로 자기는 큰일 해서 아버지, 어머니한테 효도하겠다고 한적이 있는데 나이도 어린놈이 큰소리 한다고 속으로는 웃었다. 그런데 정말 큰일을 할줄 몰랐다》, 《2006년에 최건의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는데 지금 계신다면 아들의 효도를 받으며 얼마나 좋아하실가.》장순화는 남편이 자기보다 최건을 더 잘 안다며 아쉬워 한다.

《이제 최건이 새 앨범을 출판하고... 내 걱정은 말고 최건이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말이다.

 

열정에 넘치는 공연 장면 / 촬영 송효휘

최건의 주요 수상 경력

1989년 2월《새장정 길에서의 로큰롤》대만 쌍백음반금상, 향항 백음반금상 수상

1989년 3월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는 인민일보, 중국국제문화교류중심에서 소집한 새시기 10년금곡상과 우수가수상 수상

1992년 텔레비죤뮤지컬(音乐片)《눈우에서 마음껏 놀아라》가 미국서 3가지 대상 수상 국제 MTV대상 수상

1997년 《YMC》지존순위 총선에서 《97중국추천 지존남가수》영예 획득

2001년 《인터내셔널 창의특별성과상》수상

2001년 12월 주중국 화란대사관에서 발급한 크로스친왕상 수상

2003년 제 1기 중국경음악학회 《로큰롤음악공헌상》수상

2004년 9월 미국 샌프랜시스코서《세계평화음악대상》수상

2004년 10월 광주시정부에서 주최한 제 1기 《아세아에 울려퍼져라—록음기술과학문화제》에서 《작은 도시이야기》가《우수로큰롤음악록음상》수상

2006년 7월 《중국어음악매스미디어(传媒)전당음악가》로 수상

2006년 12월 《중국음악(로큰롤) 10년 걸출공헌상》수상

2013년 10월 이딸리아 최고 영예음악상인 Premio Tenco 음악상 수상

2013년 11월 영화 《블루 본즈》제 8기 로마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로부터 특별지명상 수상

2014년 8월 영화《블루 본즈》제 10기 한국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평심위원회 대상 수상

2014년 4월 영화 《블루 본즈》중국영화연출협회 년도평심위원회서 특별표창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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