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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전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4월9일 08시38분    조회:7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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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이민
90세 전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88여단 전사 이민

고층건물에 에워 쌓인 단독주택이었다. 철문을 지나 뜰에 들어서자 금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주택을 두른 회색의 담에는 글귀를 새긴 대리석이 광고판처럼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읽어보니 전부 항일연군과 관련된 시구와 노래, 이야기였다. 동북의 산과 들에 울렸던 항전의 총성은 이곳에 얼음처럼 굳어져 있는 듯 했다.
정말이지 수십보 정도 상거한 도심의 번화가는 적어도 이 주택에서 수십년이나 떨어진 다른 세계로 되고 있었다.
단독주택의 주인 이민은 개인비서와 함께 응접실 어구에서 우리 일행을 마중했다. 그녀는 선후로 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과 정협 부주석으로 있은 고위관료이다. 작고한 남편 진뢰는 한때 흑룡강성 성장으로 있었다.
아흔 고개의 이 노인은 아무런 부축도 받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빗보지 않았는가 하는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녀의 목에 두른 목도리가 섭씨 영하 8도로 떨어진 할빈의 추운 날씨를 새삼스럽게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기실 목도리보다 머리에 얹어 쓴 모자가 더 유표했다. 국방색의 이 모자에는 빨간 오각별이 달려 군모를 방불케 했다. 전장의 자욱한 포연을 상기시키는 ‘전사’라는 단어가 저절로 입 밖에 튀어나오게 하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동북항일연군 장령들의 사진과 설명이 벽 전체를 도배하고 있었다. 말이 응접실이지 이름 그대로 전시관 그 자체였다. 김일성, 양정우, 주보중, 이조린, 이홍광, 조상지, 최용건, 허형식, 김책, 마덕산… 동북 항일역사의 이름이 쟁쟁한 인물들이 시공간을 헤가르고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민은 70년 전에 이런 인물들과 더불어 동북의 임해설원(林海雪原)을 헤집고 다녔다. “우리 항일연군의 생존한 조선족 전사는 지금 세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3명의 노전사는 이민을 포함하여 모두 아흔 고개를 넘은 할머니이며, 각기 북경과 할빈에 있다고 한다.
동북의 항일부대는 선후하여 항일연군 제1군으로부터 제11군으로 편성되었다. 항일연군은 인수가 제일 많을 때 액 3만 명에 달했으며, 와중에는 조선인 지휘관을 망라하여 1만 5천여 명의 조선인 전사들이 있었다. 이민이 소속된 군단은 제3군단이었으며 군단장은 바로 동북항일연군의 유명한 장령 조상지(1908~1942)였다.
 
장군의 혈흔이 남은 탄자
“이건 조상지 장군의 두골을 보관했던 골회함이지요.” 이민은 응접실 모퉁이에 놓인 도자기단지를 특별히 소개했다.
단지의 몸체에는 ‘항일민족영웅 조상지 장군’이라는 글자와 화상이 있었고, 머리 부분에는 국방색 모자 모양의 덮개가 씌워있었다. 이민은 장군의 골회함을 직접 북경에 가서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한다.

이뜰에 항일가사와 시구들이 걸려있다.

조상지는 동북항일연군의 주요한 창시자와 지휘관이다. 그가 직접 인솔한 군단의 6천명의 인마는 ‘만주국’의 일본군과 괴뢰군의 악몽 같은 존재였다. 당시 ‘만주국’의 신문은 늘 “비적 조상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지면에 올렸다고 한다.
1942년, 조상지는 경찰분주소를 습격하려다가 대오에 잠입한 특무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으며 이어 일본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다. 일본군은 나중에 그의 머리를 베어낸 후 몸체를 송화강의 얼음구멍에 던져 넣었다. 당시 관할 경찰서의 일본특무는 상부의 공록을 받기 위해 조상지의 두골을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가져갔다. 이때로부터 조상지의 두골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행방불명이 된다.
조상지 수하의 제3군단 전사로서 그의 유골을 찾는 건 이민의 지울 수 없는 숙원으로 되었다. 사실상 조상지는 이민에게 일개인의 형상을 떠나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전쟁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이민은 온갖 기회와 방법을 대어 조상지의 두골을 찾으려고 했다. 오랜 곡절 끝에 이민은 조상지의 두골이 장춘의 반약사(般若寺)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2004년, 조상지의 두골이 마침내 장춘에서 발굴되며, 또 공안국의 전문가들에 의해 그 화상이 재현되었다.
이민은 조상지가 희생 직전에 총격을 당했던 곳을 선후로 다섯 번이나 찾아갔다고 한다. 당시 중상을 입은 조상지는 민가에 들려갔다가 체포되었는데, 민가의 여주인은 그때 그가 누워있던 탄자와 물을 마시던 사발을 감춰두고 있었다. 피를 흘리는 장군에게 선뜻 내놓은 탄자는 실은 그녀의 소중한 혼수예단이었다.
“여주인은 당시 21살이었는데요, 조상지가 유명한 장군인 줄 알고 있은 거지요.”
2007년, 여든 고개의 여주인은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예감하고 조상지의 혈흔이 남아있는 이 탄자와 사발을 이민에게 증송했다. 장군의 이 귀중한 유물은 응접실의 자물쇠가 달린 유리함에 특별히 보관되고 있었다.

저택 응접실에서 취재를 받고 있는 이민

꿈과 같은 옛 기억은 금세 둑이 터진 봇물처럼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2살 때 북만주의 심산에 들어가서 항일연군에 입대하던 이야기, 유격구의 피복공장에서 밤을 패며 군복을 만들던 이야기, 짚신의 풀을 삶아먹고 벌레를 잡아먹던 이야기, 산을 톺고 강을 건너 적의 이중삼중의 포위를 뚫고 나오던 이야기…
 
낙하산 훈련을 받은 여전사

1940년 초, 동북의 유일한 항일무장을 보존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은 전략적인 전이를 단행했다. 일부 부대가 동북에 남아 전투를 견지하고 대부분의 부대는 육속 소련 극동지역에 철퇴했으며 야영(野營)을 설치하고 정비와 훈련을 진행했다.
1942년 8월, 극동 경내의 동북항일연군이 확충되어 구성된 교도여단이 하바롭스크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 극동방면군 독립 제88보병여단이라는 소련군 번호를 수여받는데, 대외번호는 8461보병특별여단이었다.
이 무렵 이민도 기타 전사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 극동에 간다. 이때 그녀가 배운 첫 러시아말은 “네뜨, 네뜨”였다고 한다. 그때 강기슭에서 그들을 마중한 소련군이 검은 빵과 절인 물고기를 배분하더란다. 일본군의 연일되는 토벌 때문에 오랫동안 배를 곯았던 전사들은 눈 깜짝할 새에 음식을 삼켜버렸다. 소련군에게 다시 손을 내미니 그들은 빈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없어요, 없어다니까.”하는 의미였다.
초기의 야영 생활은 한마디로 이 ‘네뜨’였다. 검은 빵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전선부대에 배급량은 빵 800그램이었고, 항일연군의 배급량은 빵 600그램이었다. 시일이 좀 지나자 일부 전사는 음식량이 적고 밥이 없다고 부르튼 소리를 했다.
그때마다 “남의 땅에 와서 이 정도면 정말 괜찮아요.”라고 하면서 그들을 달래는 여전사가 있었다. 훗날 조선의 주석으로 있은 김일성 대위의 아내 김정숙이었다. 당시 김정숙은 이민이 소대장을 맡은 통신소대의 전사였으며 이민과 함께 한 텐트에 기거했다고 한다.

장군의 혈흔이 남은 탄자 조상지 열사가 임종전 누워있던 탄자를 들고 있는 이민, 그의 뒤로 조상지 두개골을 보관했던 도자기골회함이 보인다.

“그녀는 참으로 따뜻하고 조용한 온정의 여인이었지요. 날씨가 추우면 밤중에 자주 일어나 다른 전사들의 이불을 여며 주었습니다.”
이민의 남편 진뢰는 또 김정숙의 남편 김일성과 더구나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 시기 진뢰는 김일성이 대대장을 담임한 88여단 제1대대 정치교관으로 있었던 것이다.
전사들은 적후 유격전쟁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 낙하산 투하 훈련도 했다. 사람마다 2천미터의 고공에서 낙하산을 타고 여러 번 공중투하를 했다. 기내 바닥의 작은 문이 열리면 그 옆에 교관이 서서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고 이때면 무조건 뛰어내려야 했다.
“정말로 물만두를 가마에 던져 넣듯 툭툭 밖으로 떨어졌지요.” 이민은 이때 일부 남전사도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서더라고 회억했다.
이민은 가슴 밑바닥에서 떠오르는 공포감을 누르고 백길 나락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고향에 돌아가는 길은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적후에 투하하는 길이 유일했다. 이 시기 그들은 군부대의 비밀유지를 위해 상부의 명령이 없이는 수림 속의 숙영지를 한발자국도 떠날 수 없었다.
부대는 또 바위 타기, 수영, 폭파 등 여러 가지 전투기능을 훈련했다. 와중에 이민은 부대에서 실시한 스키시합에서 단연 1등을 한다.
그리운 고향은 바야흐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 했다.
 
실종된 6년의 전쟁

사실상 그들은 단지 고향과 떨어져 있는 것만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이 만든 이 항일무장부대는 일찍 1936년부터 당 중앙과 연계가 두절되어 있었다. 항일연군은 내외의 각종 경로를 통해 중앙과 연계를 달려고 했지만 전부 실패로 끝났다.
이 무렵 항일연군에는 내지의 홍군과 다른 특이한 군모가 나타난다. 이민의 회억에 따르면 군모는 상부에서 내놓은 양식에 따라 만들었다고 한다. 모자는 여섯 조각으로 이뤄졌고 모자챙이 있었으며 모자 앞에 붉은 오각별을 달았고 모자 꼭대기에는 혹 모양의 빨간 덩어리를 달았다. 소련홍군의 양식을 모방한 군모였던 것이다. 적후에서 중앙과 연락이 끊어진 고독한 상황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항일연군은 홀로 적후에서 막강한 일본군과 사투를 벌였다. 흑룡강성항일전쟁연구회의 통계에 의하면 동북항일연군은 선후로 일본군과 약 10여만차의 대소 작전을 진행했다. 이 전쟁에서 동북항일연군은 군단급 이상의 간부가 30여명, 사단급 이상의 간부가 120여명 희생되었다. 기타 희생된 일반 전사는 숫자로 이루다 통계하기 어렵다.
나중에 항일연군을 확충하여 설립한 88여단이 하나의 사례가 아닐지 한다. 1945년 8월, 88여단은 2백여명 정찰인원을 동북에 파견하는데 대부분은 희생되었고 생존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또 이 선견인원들이 떠나간 후 항일연군의 전투인원은 불과 4백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항일연군은 그야말로 뿌리를 깊이 내린 칡덩굴처럼 질긴 생명력을 과시했다. 동북의 흑토에서 완강하게 진행한 14년의 항전은 최종적으로 그들이 중국과 조선 그리고 러시아에서 응분한 명예와 지위를 얻게 했다.
사실상 해방(8.15) 후 그들은 한 단락의 아픈 역사를 상처로 남기고 있었다. 오랜 기간 정상적인 대우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기 상당수의 항일연군 노전사들이 ‘소련특무’, ‘토비’, ‘반역자’라는 억울한 감투를 썼다. 이민도 이때 무함을 받고 외양간에 갇히며 또 5년 동안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민은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시종 지울 수 없었다. “왜서 다들 ‘8년 항전’이라고 말하지요? 중국의 항전은 마땅히 14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항일전쟁의 불길은 일찍 1931년 동북에서 지펴졌다. 이해 9월 18일, 심양에서 일본 관동군이 중국군을 무장 진공한 사건이 발생, 이로써 일제의 중국 동북에 대한 대규모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적후에서 수십만 명의 일본군과 장장 14년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옛 전우들과 만나 항일연군 군모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민 (왼쪽 첫 사람)

이민은 옛 전우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그들과 함께 격정 높이 불렀던 항일가곡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항일가곡은 그때 그 시절의 전쟁의 정경을 재현하는 무형의 캐리어였다. 이민은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항일가곡을 익혔고 또 고향 탕원현에 공산당인들이 세운 학교에서 많은 항일가곡을 배웠다. 입대한 후 부대 선전대에서 많은 신, 구 항일가곡을 불렀던 것이다.
1991년 이민은 드디어 403수의 항일가곡을 선정, 편집하여 《동북항일연군 가곡집》을 출판한다.
 
항전의 옛 기억을 찾는 노전사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항일연군의 전사가 아닌 조선 독립가 안중근(1879~1910)의 애도가가 이례적으로 가곡집에 수록되는 것. 항일장령 이조린의 회억에 따르면 ‘9.18사변’ 이후 그가 심양에서 혁명 활동을 할 때 백씨 성의 중국인 교원이 이 노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안중근의 의거는 일제 강점하의 중국인들을 깨우치고 그들의 본보기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후 이민은 이조린의 지시로 이 노래를 수집하려고 특별히 백씨 일가를 찾았다고 한다.
각설하고, 이민은 주변 사람들의 무덤덤한 반응에 한동안 당황하고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곡집을 달라고 주문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정부 부문에 가곡집을 적지 않게 증송했지만 바다에 돌을 던진 격으로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1995년 이민은 북경에서 열린 전국로구(老區)건설촉진위원회 회의에 부회장으로 참석한 기회를 타서 작심하고 ‘항전 14년’의 화두를 꺼냈다. 이 기구는 전국의 옛 혁명구를 위해 봉사하기 위한 사단법인으로, 당과 정부, 군에서 이직, 퇴직한 노간부와 노장군, 노전문가가 그 주요한 성원이다.
“해당된 15분의 발언시간을 초과해서 한 시간 반 동안 얘기했는데요, 누구도 도중에 이야기를 끊이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끝나자마자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아쉽게도 이 항전 14년의 이야기는 그때의 회의에 한정되었고 그 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고 한다.
2002년 이민은 “항일연군정신선전대”를 설립, 항일전적지를 찾아 선후로 60여개 시와 현에 족적을 남긴다. 동북항일연군의 사적과 정신을 항간에 널리 알리고 싶었고, 망각된 동북의 ‘항전 6년’을 사람들에게 깊이 심어주고 싶었다. 항일연군 노전사와 그들의 후대들이 그녀의 생각에 동조했으며 용약 선전대에 참가했다.
이민은 언제인가 중앙의 고위급 지도자가 가정방문을 왔을 때 일부러 이 화제를 꺼냈다고 한다. “동북은 중국 땅이 아니던가요? 우리 노전사들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항일전적지답사를 하고 있는 선전대 (오른쪽 첫사람이 이민이다)

이때 고위급 지도자는 낯이 하얗게 질려서 한겻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란다. 응접실에는 난데없이 한 겨울의 찬 공기가 무작정 들이닥치고 있는 듯 했다.
사실상 ‘항전 14년’은 이미 반세기를 넘고 있는 방대한 현안(懸案)이었다. 그동안 이 현안을 해결하고자 항일 노전사들을 비롯한 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유종의 미를 거둔다. 2014년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69주년에 즈음하여 북경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서 국가적인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현장에서는 장엄한 국가가 주악되고 예포가 14발 울렸다. 이 14발의 예포는 바로 중국인민의 항전 14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의 ‘전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항전 하면 8년인 줄로 알며 여전히 ‘항전 8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항전 14년에 걸린 ‘저주’의 주문은 다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민은 당금이라도 누군가 부르면 선전 현장으로 뛰어갈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아흔 고개의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동북의 항전역사를 알리는 ‘전장’의 전사로 자진하여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동북의 이름 없는 산과 들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옛 전우들을 진정으로 기리고 그 뜻에 보답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밖에 나서니 갑자기 추워진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2014년 겨울의 마지막을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김호림기자
출처: <<중국민족>> 2호, 중국조선어방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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