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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전자의료기기 생산, 대중 건강증진에 크게 이바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4월10일 10시55분    조회:1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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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남룡
- 북경동화원의료설비유한책임공사 남룡 리사장을 적는다
 
 



아인슈타인은 “천재”, 마더테라사는 “사랑”, 메릴린 먼 로는 “섹시”…그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바로 그들의 이미 지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남룡의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것 이 있다면 바로 “대중의 건강증진 기여” 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가.
얼마전 회사의 주식 상장을 준비하고 있던 남룡 리사장은 바쁜 와중에 필자의 취재를 흔쾌히 응했다. 남룡 리사장은 “동화원의료기기”란 브랜드가 적혀 있는 근무복 차림으로 반 갑게 맞아주었다.
너무나 익숙한 근무복 차림, 수년간 여러 매체에서 자주 보아왔던 모습 그대로다. 이러한 남룡 리사장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자기의 기업에 애착을 갖는지, 그의 브랜드 의식을 읽을수 있었다.
그날 남룡 리사장의 취학의 길, 창업의 길, “동화원”이란 브랜드를 만들어 키워가는 20년을 더듬는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사업가 기질”


아버지는 객차공장의 고급기술자, 어머니는 재봉사로 일 하는 그의 가정은 중산계층에 속했다. 집이 길림성 연길시의 서시장 부근이였는데 어머니는 재봉 일을 하시면서 가정 경 제에 큰 보탬을 주셨다. 남룡 리사장은 “저의 경제 관념은 대 부분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것입니다.” 하고 말한다.
어머니는 80년대 말 한국에 갔을 때 남들처럼 한국친척 들이 싸주는 옷보따리가 아니라 한복에 붙이는 금박과 “쌍희” 자를 사가지고 돌아오셨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재봉한 한복 은 서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90년대 초에 그의 어머니는 부동산 시장에 뛰여들어 이미 연길에 집 세채를 마 련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83세의 고령에 북경에 사는 아들 남룡 리사장 집에 왔을 때도 “이렇게 손놓고 있을수 없다”면 서 무슨 장사를 시작하겠다고 서둘렀다고 한다.
남룡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일하면 서 리공과가 취미였다. 그런데 직장에서 일하면서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틈시간 공부를 할 수 있는 문과 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독립을 꿈꾸던 그는 대학 입학지원 서를 제출할 때 “대학은 집에서 멀수록 좋다”는 생각으로 지 원서에 몽땅 타지방 대학을 써넣었다. 어느날 남방도시 광주 에 위치한 중산대학 일본어학부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부모님은 멀리 떠나는 자식을 두고 걱정이 태산같았다.“ 귀 한 자식일수록 멀리 보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걱정 붙 들어 매세요.” 남룡은 이런 말로 부모님을 위로하고는 하루 가 급하게 학교로 떠났다.
시골이나 다름없던 연변에서 개혁개방 분위기가 물씬한 광주로 온 남룡은 새로운 환경이 금시 마음에 들었다. 지금 이나 예전이나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의 숙사는 늘 시클벅 적하다 . 그때 그의 곁방에 산두에서 온 친구가 들어있었는데 가정형편이 괜찮은지 나팔이 6개 달린 록음기를 갖고 있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껏 샀다. 남룡은 대학 첫 방학에 집으 로 돌아갈 때 그 친구한테서 270원을 주고 록음기를 사서 가 져갔다 . 그때까지만 해도 연길에는 나팔 6개 달린 록음기를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방학동안 친구들이 모여서 아직 금지곡이던 등려군의 노 래를 들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배운 디스코를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록음기를 어찌나 쾅쾅 틀어놓고 디스코 를 추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쿵쿵 굴렀는지 방구들장이 내 려앉는 바람에 식구들이 고생을 했지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개학해 학교로 돌아갈 때 고향의 한 친구가 그 록음기를 욕심내서 320원을 받고 되넘겼다. 이렇게 50원을 번 남룡 은 광주로 돌아갈 때 침대표를 사서 편안하게 누워갔다. “이 것이 저의 첫 장사였지요. 자기가 번 돈을 의미있게 쓰는 재 미가 너무 쏠쏠했습니다. 허허...”
 
요즘 먹고 살려면 적어도 두개의 비밀무기가 있어야지

졸업 후 북경 북방공업대학 일본어학원에 배치 받은 남룡 은 좀처럼 마음을 붙일수 없었다. 대학 4년간 개혁개방의 전 초기지인 광주에서 생활해오면서 남방의 경제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었던것이다. 그는 서둘러 심수로 전근할 준비를 한 다 .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대외경제무역부 산하기관인 중 국 오금광산수출입총공사 본사에 입사하게 되였다. 이 기업은 도합 14개 부서를 둔 대형 국영기업이였다. 남룡은 가장 중요한 부서인 철강수입부서에서 2년간 근무하였다.
“저는 일본어를 전공한 실력을 갖고 입사했지만 단순히 번역이나 통역 업무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어는 어디까지 나 소통을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저는 수출입 회사의 전문 인재로 성장하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선배들에게 전문지식을 배우고 수출입에 관련된 서 적을 열심히 읽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1년에 약 40여억 딸라의 철강을 수입했는데 일본이 주요 수출국이였다. 남룡은 1년에 두 차 례씩 진행되는 중일철강공동회의에 참가하여 통역 임무를 맡는 외에 업무에서도 한몫 톡톡히 해내면서 실력을 다졌다. 그의 업무 능력에 상사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88 년 11월 어느날, 그는 홀연히 철밥통을 버리고 일본 으로 떠나 어느 무역회사 판매부장으로 취직하였다. 그때 그 의 월급은 이미 50만 일화(4000여 딸라)에 달했다.
“저는 그때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과의 무 역에서도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으로서 량국간 무역은 제 3국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남룡은 한국시장을 개척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호텔 객실에서 전화를 걸면 비 용이 엄청나게 비싸다는것을 발견하고 공중전화에서 전화번 호부를 뒤져가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련결되 기 바쁘게 이렇게 서두를 뗐다.
“안녕하십니까 ? 저는 중국에서 온 남룡이라고 합니다. 사 장님 기업의 제품을 중국에 수출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혹 시 수입할 제품은요?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거절도 숱하게 당했지만 주문량도 날로 늘어났다. 그때 부산에 있는 윤씨 사장한테도 이와같은 전화를 걸었으며 그 사장과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노력은 쌓은 만큼 이어진다. 마침내 한국과의 무역통로가 열렸다 . 때는 1988년 말, 중국 대련항에서 실은 내화재료 는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부산항까지 운반되였다. 그 과정은 3~4개월이나 걸렸지만 그는 자본축적을 차곡차곡 할수 있 었다.
1991 년, 3년간 일본회사의 판매부장의 신분으로 3국을 날아다니다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자신의 첫 회사를 설립하 였다 . 자본금은 300만 일화(2.4만여 딸라), 첫해 그의 무역 회사는 돈낱가리에 올랐다. 그의 회사는 중국인 최초로 중일 한 3국 무역을 진행한 회사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경 에는 100만 부자가 흔치 않았지만 남룡은 그때 이미 2천만 원의 자산을 가진 부자였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잘 하는것만으로는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언어는 소통을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어학 실력 외에 다른 비밀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언어를 도구로 무역에 서 돈벌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룡은 젊은 후배들에게 반드시 기술과 업무를 열심히 닦으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수입하여 판매하다 직접 생산하여 판매


“저는 무역에서 돈을 벌면서도 무역은 뿌리가 없는 사업 이라고 늘 생각하였습니다. 손에 쥔 자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그 돈을 종자돈으로 실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특급선불이란 우혜정책을 향수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의 일본 무역회사 는 마진이 크게 남지 않았다.
남룡은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시장을 장악할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바로 브랜드의 힘을 지닌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소유하는것이라는 인식을 날로 굳혔다. 뭘 할수 있을가. 그는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아다녔다.
1993년에 우연히 한국에서 약탕기를 본 남룡은 중국의 어마어마하게 큰 중의학시장을 노리고 시장조사에 나섰다. 그때까지 중약계 유명기업인 동인당은 보일러로 약을 달이 고 환자에게 약을 유리병에 담아주는 상황이였다. 환자는 그 약을 먹은 후 유리병을 다시 반환해야 했다. 중일우호병원 을 찾아갔을 때는 약 달이는 보일러실은 뜬김으로 꽉 차 있었다 . 역시 보일러로 약을 달이고 있었다. 그는 북경 동인당약국 , 중일우호병원, 협화병원 등 큰 약국과 병원에 찾아가 약 탕기를 설명했지만 제품을 리해하지 못하고 반응이 미약했다.
그는 잠시 약탕기를 한쪽에 밀어두고 계속하여 중금속 업 무를 추진하였다. 그가 만든 첫 실체가 바로 1994년 하북성 장가구에서 고고성을 울린 동화화학공업광산개발이다. 그 이듬해는 산서성 양천에 동화제련회사를 설립해 금속규소 를 해외에 수출했다.
1997 년 1월, 우연히 연길에서 온 친구가 머무는 려관방을 찾아갔다가 3년전에 자신이 하려던 포장된 중약봉지를 보았다. 연길의 일부 약국에서 이미 한국 약탕기를 사용하 고 있다는것을 알게 된 남룡은 하던 일을 제쳐놓고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약탕기 12대를 수입한 뒤 호남중의병원에 한꺼번에 10대를 팔았다. 그때로부터 수년간 남룡은 한 국에서 약탕기와 탕약포장기계를 수입하면서 시장을 넓혔다.
2000년, 독자지적재산권이 있는 중약 탕약기를 연구개 발하기 시작하여 2000만원의 자금으로 동화원의료기기유 한회사를 설립하고 “동화원”이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남들은 수입제를 선호할 때 그는 국산 “동화원( 东华源 )” 브랜드를 붙여 들어왔다. 수입상품에 자신의 브랜드를 붙 여넣고 고객들에게 차근차근 알린것이다. 이런 작전은 향후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2년 후에는 중관촌 하이테크 산업개발구 창평원에 중국 최대의 현대화 탕약기 제조기지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어 서 30여 개 분회사와 사무소를 가진 그룹으로 성장한 동화 원은 의료설비와 화공제품의 연구개발, 제조, 판매 그리고 국제무역을 하는 기업으로 중국 최대규모의 탕약기 생산기 지로 성장했다.
현재 북경동화원은 국내 시장점유률을 70%이상 점하고 있으며 업계 선두기업으로 국내외 과학연구기관, 병원, 진 료소 , 약상점 등 4만여 호의 단골고객을 보유하고 있다. 현 재 기업의 년간 매출액은 4억원이란 어마어마하게 큰 수치 에 이른다.
동화원은 연구개발에 거금을 투자하여 현재 100여 명의 공정사를 두고 있다. 이런 지속적인 연구개발에 힘을 입어 선후로 30개의 특허를 획득했고 약탕기포장설비 9개 계렬 제품을 출시했다. 동화원이 자체로 연구개발한 “10가지 기 능을 겸비한 자동약탕기”는 중국 중의약 약탕설비의 생산판매 령역에서 최고 브랜드칭호를 수여받았다.
 
약탕기 회사에서 의료기종합메이커로 발전
동화원에서 생산하는것은 단지 약탕기에 그치는것이 아니다 . 7~8년 전부터 전자동 혈압기와 자동신장계, 체성분 분석기, 골밀도측정기, 스트레스분석기, 중의체질판별기 등을 비롯한 전자의료기기를 연구개발하여 생산판매하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올해 초에는 6층 규모로 최신식 설비를 갖춘 연구개발센터(신사옥)를 준공하 였다. 100여 명의 기술연구원들은 이곳에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신제품 개발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동화원은 올해 “건강소옥(健康小屋)”을 보급하는 사업에 가장 큰 력점을 두고 있다. 건강검진용 의료기기를 서로 련계하여 체계적으로 건강을 관리해 주는 “건강소옥” 을 전국적으로 전파하려는것이다.
“건강소옥”은 무료로 대중의 건강을 효률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2010년부터 시작하여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중국전신에서 임직원 및 고객을 대상으로 건강관리 서비스 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는데 동화원이 최초의 시범 모델로 선정되였다. 올해에만 약 5,000 개의 “동화원 건강소옥” 을 전국적으로 구축할 계획이다. “건강소옥” 5,000 개면 10~20 억 원의 매출을 올릴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동화원은 중의약에 바탕을 둔 약탕기로 시작했지만 이제 는 다양한 의료기기를 연구개발하여 생산하는 “의료기종합 메이커”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 약탕기를 보급하 여 중의약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남룡 리사장은 이제 최첨단 전자의료기기 및 이를 련계한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개발하 고 생산함으로써 대중의 건강증진에 이바지하고 있는것이다. 그는 중국을 넘어서 세계 최고의 의료기기 회사로 키우 는 게 꿈이라고 한다.
취재를 끝내면서 공장부지를 돌아보았다. 질서정연하고 깔끔하게 들어앉은 공장건물, 거기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생산 작업장 , 취재팀을 인식하지 않고 각자 자기 일에 몰 두하는 직원들, 그들과 똑같은 “동화원의료기기”란 브랜드가 새긴 근무복을 입고 그들과 생산과정을 점검하는 남룡 리사장… 귀로에서 문뜩 어디서 본 말이 생각난다.
“지금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닌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브랜드 시대다.”
“동화원”과 남룡 리사장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일부 사진은 동화원의료기기회사에서 제공했음.) ▣  


글 /서정옥, 사진 /박복선 김향덕
<<중국민족>> 20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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