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북방에는 최죽송이 있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9월25일 15시48분    조회:436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죽송

북방지역 벼재배전문가인 부친 최죽송 탄생 100돐을 맞으며

글: 최광철

저자 최광철씨가 옛집이 있었던 자리를 가리키며 소개하고있다.(사진 김태국기자)

금년은 나의 부친 최죽송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부친의 생일이나 제사날이면 부친의 생전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지군 하였지만 금년에 들어 와서는 유난히도 부친에 대한 추억들이 많아진다. 글은 서툴지만 부친에 대한 추억들을 정리하여 부친의 령전에 올리려 한다.

아버지 최죽송은 1915년 12월 10일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의 한 빈곤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는 8살 때 어머니를 잃고 부친을 따라 지주집 소작농으로 고생하시다가 1940년 가족을 이끌고 중국에 이주하여 전전하다가 1943년에 연길시 신풍촌에 정착하였다. 당시 신풍촌의 벌판은 사시장철 물이 고여있고 랭기가 많은 지역이여서 벼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아 농민들의 량식고생이 심했다. 그때로부터 랭기가 많은 신풍벌에서 어떻게 하면 벼농사를 지을것인가 하는것이 부친의 꿈이였고 과제였다.

광복후 1947년 신풍촌에서도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땅을 분배받은 기쁨을 안고 부친은 5호의 렬사유가족들을 묶어 호조조를 설립하고 벼농사를 위한 습지개량을 시작했다. 우선 배수구를 빼서 땅의 랭기를 빼고 석탄재와 자갈, 발효시킨 잡초를 밭에 내면서 농토개량에 들어갔다. 최죽송호조조는 연길벌에서 제일 처음으로 벼유지온상기술을 도입하여 처음으로 벼생산량을 높였다.

공산당의 은덕으로 이 땅의 주인이 된 부친은 언제나 정부의 호소에 앞장에 서서 향응하였으며 당의 사업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온갖 심혈을 기울여왔다. 1954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부친은 선후로 호조조 조장, 초급사 주임, 고급사 주임, 대대 당지부서기, 부향장, 주정부 위원, 성정부 감찰위원 등 직무를 력임하였으며 중국공산당 길림성 제3기 대표대회 대표, 길림성 제1, 2, 3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행정직책으로 분망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부친께서 하루도 잊지 않은것은 어떻게 하면 벼생산량을 올려 국가에 공헌하고 농민들이 배불리 먹고 수입을 올릴것인가였다.

주은래총리에게 사업을 회보하고있는 최죽송(오른쪽).(최광철 제공)

아버지는 어려서 마을 서당에서 소학교 정도의 글밖에 읽지 못하였지만 특별히 진취심이 강했고 일을 시작하면 꼭 끝을 보고야 시름을 놓는 성미였다. 1948년도부터 벼재배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부친은 1951년에 고산품종 《원자1호》 를 개발하여 헥타르당 3000근 밖에 안되던 땅에서 헥타르당 만근 대관을 돌파하여 길림성 특등로동모범으로 당선되였고 중앙인민정부로부터 전국 농업로동모범이라는 영예를 수여 받았다. 당시 생산력조건이 박약한 농업환경에서 이같은 높은 소출을 올린다는것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수 없었다. 소문은 연변은 물론 전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1955년에는 또 《원자1호》의 개량품종을 보급하여 헥타르당 산량을 헥타르당 12000근(무당 800근)으로 올렸고 1960년에는 헥타르당 15000근(무당 1026근) 대관을 돌파하였다. 1956년 중앙정부에서 반포한 《농업발전요강》에 따르면 벼재배 목표는 황하이북지역은 400근, 황하와 장강사이의 중부지역은 600근, 장강이남지역은 800근이다. 부친께서는 이 《요강》이 발표되기 이전인 1955년에 벌써 장강을 뛰여 넘은 셈이다.

부친은 매사에서 깐지고 세심하였다. 고산품종을 배육하기 위하여 아버지는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 왔다. 그에게는 포전이 실험실이였고 집이 실험실이였으며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종자의 순도와 성능을 보장하기 위하여 부친은 한개 품종을 시험전에서 3년 이상의 실험과 배육을 거친후에야 대전에 보급하였다. 몇년간의 끈질긴 탐구와 실천을 통하여 자지방에 맞는 20여가지 벼품종을 배육하고 인입하여 전 촌에 량종화를 실현하였다. 그때 부친은 순도 95% 이상의 종자를 생산하였으며 국가에 백여만근의 우량종을 바쳤다.

1956년 인민일보는 《북방에서 누가 벼를 재배할수 없다 했는가》라는 제목의 사론을 발표하고 부친의 벼재배 대면적 증산기술과 경험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때로부터 부친의 벼재배기술과 경험은 북방 벼재배체계로 되였으며 북방 벼재배지구의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게 되였다. 1960년 당시 중국농업과학원 원장이며 중국에서의 벼재배 권위인 정영동지가 연변에 시찰을 내려왔는데 당시 연변주당위 제1서기인 주덕해동지와 함게 신풍대대에 와서 친히 벼포전에 들어가 직접 벼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후 부친의 경험과 성과에 대해 《리론과 실천의 결합》,《높은 산량을 따낼 수 있는 과학적 기술조치》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1962년 중앙에서는 부친의 벼재배에서의 돌출한 기여와 성과로 그에게 국가 과학연구 2등상을 수여하였다. 그리고 중앙농업부에서는 그를 중국농업원 특약연구원, 중국 길림성농업과학 특약연구원으로 초빙하고 《중국 벼재배》편집사업에 참가시켰다.

1962년 6월 23일 주은래총리가 연변에 오셨을 때 친히 신풍촌에 들려 부친의 사업실적을 듣고는 《남방에는 벼재배 전문가 진영강이 있고 북방에는 최죽송이 있다》고 높이 치하했다. 그 이후로 《남진북최(南陈北崔)》라는 말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1965년 10월 20일 수도북경에서 전국 공업, 농업 로력모범대표대회가 열리였다. 부친은 전국 로력모범 일원으로 대회에 참가하여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중앙지도동지들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니였다.

부친께서는 1963년도에 대면적의 무당 900근을 돌파한 벼고산 재배기술경험을 총화했으며 《문화대혁명》의 간고한 나날에도 북방 벼재배지구에서 저온 랭해를 전승하여 벼의 안정된 고산을 쟁취할데 대한 연구를 견지하여 새품종 《경인127》을 내놓았다. 부친은 1971년도에 소주에서 열린 전국벼재배기술회의에 참석하여 전국적으로 제일 처음으로 랭해전승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여 회의 참가자들의 중시를 불러일으켰을 뿐만아니라 상술한 벼재배기술과 경험들이 북방의 13개 성시에 보급되게 하였다.

부친께서는 과학연구와 사업에서 수많은 영광과 영예를 따냈지만 이를 턱대고 사리를 따지거나 조직에 손을 내민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당시 부친의 슬하에는 4명의 자식들이 있어 가정형편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우리 집은 40평방메터의 3칸짜리 헐망한 초가집이였는데 여섯식구가 비좁게 생활하였다. 이때문에 주은래총리가 1962년도에 신풍촌에 와서 부친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부득불 마을의 조건이 보다 좋은 3대 촌민의 집에서 주은래총리를 영접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의 심중에는 대중의 리익이 항상 첫째였고 가정은 그 뒤자리였다. 어느해 중앙에서 부친에게 6천원을 상금으로 포상하였지만 아버지는 그 돈을 한푼도 다치지 않고 신풍촌소학교를 짓는데 돌렸다.

그제날 신풍소학교자리에는 한족학교인 연하소학교가 일떠섰다.(사진 김태국기자)

시비가 전도되였던 《문화대혁명》 10년 동란시기 부친은 《자본주의 농업로선의 집행자》, 《가짜 전문가》, 《담진림(당시 농업을 관할하던 국무원 부총리)이 내세운 검은 전형》, 《주덕해의 자본주의로선의 충실한 집행자》 등 억울한 루명을 쓰고 비판투쟁을 받으면서 심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72년 5월 2일, 이날도 부친께서는 아침 일찍 소로 모상판의 번지를 치다가 갑작스레 신경성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을 일으키며 일하던 맵시 그대로 논판에 쓰러졌다. 촌에서는 다급히 부친을 의료시설이 좋은 지방부대병원으로 호송하였다. 부대병원에서 1년 넘게 치료를 받고 사선에서 헤매던 부친은 1973년 9월 18일 장춘병원에 옮겨졌다가 10월 3일, 병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58세의 나이로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부친께서 돌아가신후 1982년 3월 18일, 당시 길림성당위 제1서기였던 강효초(强晓初)동지가 연변주위 제1서기 조남기 등 성, 주, 시 지도동지들과 함께 신풍촌에 내려와 시찰하면서 우리집을 방문하였는데 우리 식구들이 그때까지 낡은 초가집에서 살고있는 정황을 보고 감개무량해 하시면서 《최죽송동지는 국가에 뛰여난 기여를 한 농민과학가일 뿐만아니라 추호의 사심도 없이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우수한 공산당원이였다》라고 치하하였다.

1982년 5천원의 보조금으로 새집을 지었던 자리.(사진 김태국기자)

그후 자치주 성립 30주년을 앞두고 연길시정부로부터 우리 가정에 5천원의 보조금을 보내왔는데 우리는 그 보조금으로 처음으로 벽돌집에 짓고 새집에 들게 되였다.

부친께서 돌아가신지 어느덧 4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지난 42년간 중국에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었고 오늘의 신풍촌도 그제날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이 변모했다.

석탄재와 자갈, 잡초로 농토개량을 했던 곳은 진달래광장으로 변했다.(사진 김태국기자)

그제날 부친께서 매일같이 다니던 논뚝길은 아스팔트로 변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붙어있던 시험전은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있는 진달래광장으로 되였으며 우리가 살고있던 신풍6대 앞마을 초가집자리는 동락사회구역의 어느 아파트단지에 깔렸으며 부친께서 6천원을 기부하여 지었던 신풍촌소학교 자리에는 현대화시설이 구전한 한족학교인 연하소학교가 들어앉았다. 신풍6대 뒤마을 20여호가 살고있던 곳도 천지시장이나 은포사우나 등 상가들이 빼곡이 들어앉아 그제날 중국 북방의 벼재배를 이끌었던 신풍의 모습은 찾을 길이 바이없다.

부친께서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준 물질적 유산은 하나도 없지만 평생의 심혈과 정성을 나라와 인민을 위한 사업에 바친 고상한 정신과 언제나 먼저 큰집(大家)을 생각하고 나중에야 작은 집(小家)을 고려하는 고귀한 품성은 영원히 우리 자식들의 인생 앞길을 밝혀 주는 등대로 되고있으며 매일같이 우리들을 편달해주고있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곤명시정협위원, 곤명동방금홍부동산개발회사 이사장, 북경세박투자그룹 박철 회장            북경수도국제공항에서 공항고속도로를 따라 시구역방향으로 10여킬로메터 달려 5환로부근에 이르면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있는 번화한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온다. 역동하는 도시...
  • 2021-04-08
  • 김려화 교수, 조혈줄기세포 분화조절 분자 메커니즘 밝혀     얼마전 국제학술지 《eLife》에 게재된 동북림업대학 생명과학학원 유전학과 김려화(조선족.50) 교수의 조혈줄기세포 분화조절 관련 연구 결과가 세계적 관심을 끌고있다. 김교수가 이번 론문( “Rab5와Rab11, 여러 개의 신호전달경로 억제 통해...
  • 2021-04-06
  • 한 중국 류학생이 영국 런던에서 음악의 꿈을 좇아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 영화 《합법 동반자(合法伴侣)》가 지난 12일 전국적으로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19년 제22회 상해국제영화제 및 아시아 신인상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각본상에 노미네이트(提名)된 작품인 데다 인기스타 리치정(李治廷)과 백가(白客)가 주...
  • 2021-03-24
  • 최영덕 로인의 즐거운 예술생활 강가의 돌쪼각, 산기슭에 나딩굴고 있는 나무뿌리… 다른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지만 무순시 최영덕 로인의 손질을 거치게 되면 ‘보배’로 탈바꿈된다.   3월 14일, 필자는 지난 2000년 무순시조선족제1중에서 정년 퇴직한 최영덕(79세) 로...
  • 2021-03-18
  •         리민은 1924년 흑룡강성 라북현 오동하촌의 한 애국자 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친 리석원은 일제에게 빼앗긴 땅에서 살기싫어 20세기 20년대에 중국 동북에 망명해왔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겪으면서 민족독립과 항일의 뜻을 굳혔다. 그...
  • 2021-03-12
  •   항일전쟁시기 가장 처절하고 간고했던 동북전장에서 싸운 동북항일련군에는 녀전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고 경력이 가장 풍부하며 영향력이 가장 크고 기여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전우들사이 평판도 가장 좋은 사람은 녀전사 리재덕이라 할 수 있다. 리재덕((1917-2019) 리재덕은 1917년 1...
  • 2021-03-09
  •  구성지고 신명나는 우리 민족의 소리 - 판소리에 현대음악을 접목시켜 틱톡이라는 새로운 매개체를 통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가 있다. 바로 현재 연변가무단에서 판소리 전승자, 민요가수로 활약중인 최              구성지고 신명나는 우리 민족의 소리 - ...
  • 2021-03-08
  • 국제미술전시행사의 총괄 기획인 허문길 화백   ▲사진설명: 허문길 화백    2월 22일 주칭다오 한국총영사관 김경한 총영사는 조선족 출신 허문길 화백을 면담하면서 중한 양국간의 문화교류행사에 대해 진지한 자문을 구했다.      그렇다면 허문길 화백은 누구인가.    허문길...
  • 2021-02-26
  • 길림성 통화청산그룹유한회사 리청산 회장이라면 동북지역의 조선족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끌끌한 민족기업인으로 년매출이 수억원에 달하고 년간 납세액이 5천만원을 넘는 기업의 총수로 해마다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사심없이 사랑을 쏟아가고 있다.   △ 코로나19와 싸우는 1선 의무일군들에게 보내는 원...
  • 2021-02-24
  • 일전에 필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솔잎식품생산허가증’을 획득하고 ‘솔왕’으로 불리는 연변장백산솔잎연구유한회사 조경수(1956)를 찾아 솔에 대한 일가견을 들어보았다.   일찍 2006년 조경수는 연변일보 중문판에 ‘솔연구의 제1인자’라고 불리며 주목을 받은 적 있다. 솔관련...
  • 2021-02-20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